스식님 달성표 보상으로 드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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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너는, 포크로 감자를 찌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무섭고 두려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는 실날같은 불안의 끈을 붙잡고 무엇이 그를 이렇게 두렵게 하는지 알아채려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감자가 설익은 것 같다는(심지어 얼음처럼 차가웠다)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래. 감자 때문이겠지. 태너는 낮게 중얼거렸다. 옘병할 감자 같으니. 그는 포크를 들어 감자를 마저 갈랐다. 그러자 감자는 갈라지기는커녕 데굴 뒤집히며 푸르고 싱싱한 싹을 드러냈다.
순간 태너는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는 딱 돈을 지불한 만큼의 적당한 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카운터 쪽을 슬쩍 돌아보자 마침 돈을 세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빙긋 웃더니 음식 맛이 어떠냐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태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차디찬 감자와 마주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이프로 싹이 난 부분을 크게 잘라냈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것을 소중하게 감싸고 옆에 있던 가방에 넣었다. 화분이라도 하나 사서 이걸 심지 않으면 비참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돈을 세고 있는 주인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고 코트를 집었다. 가게 구석의 TV에서는 7시 뉴스가 막 끝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마지막 소식입니다. XXX가 XX번지의 한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가려던 태너는 번개에 맞은 듯 몸을 돌렸다. 그가 알기로 저 주소에 사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태너는 가방 속의 감자를 깨끗이 잊어버린 채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M에게 뭐라고 할까? 가스 폭발? 테러? 신원 미상의 시체? 일단 뉴스를 마저 들어야 했다. 태너는 소란한 가게 한가운데서 집중해서 귀를 귀울였다. 그리고…
…뒷마당에서 거대 순무가 10개 발견되었습니다.
태너는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수신자는 M이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본드?"
"뉴스 봤나?"
"무슨 짓이냐구요."
전화선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순무가 자랐어. 그것뿐이야."
"그래요, 10개나 말이죠, 10개. 하나도 아니고."
"알아."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왜? 하나 뽑아가게?"
*
제임스 본드. 누군가 본드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제임스. 제임스? 이름이 불린 남자는 한숨을 푹 쉬고는 베개 밑으로 얼굴을 묻었다. 어둑어둑 한 걸로 봐서 새벽 다섯 시 정도일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시계를 확인해보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겠지만, 알 게 뭐람. 아무리 잠이 없는 00 요원이라도 다섯 시는 한창 꿈을 꿀 시간이었다. Q, 두 시간만 기다려. 두 시간 뒤에 해가 뜨면...그게 뭐 어떤 문제든...해결되어 있겠지. 본드가 중얼거리고는 옆 쪽에 손을 뻗어 Q의 몽실한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착하지, 우리 Q. Q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는 다시 자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뭘 먹을ㄲ...
"제임스!"
"왜, Q?!"
"나는 Q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 나는 그레이트 올드 터닙이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방은 아까보다 더 밝아져 있었다. 번쩍이는 거대한 순무가 푸른 색의 아우라를 내뿜었다. 그는 눈을 다시 감았다.
번쩍이는 거대한, 너무 거대한 순무가 빙빙 돌...아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건 꿈이 아닌 것 같다고 본드는 생각했다. 저 순무가 침대 위로 떨어지면 그와 Q는 곧장 압사할 테고 뉴스 헤드라인에는 -순무에 깔려 죽은 두 남성 어쩌고저쩌고- 비스무리한 게 올라갈 터였다. 그렇게는 안 되었다. 본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삶의 의지를 느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살아서 무사히 몽실한 머리의 Q와 아침 식사를 먹고 싶었다.
일단 본드는 순무...그레이트 올드 터닙에게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물론 저 순무에게는 입이 없지만.
"어..." 그러나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라고 제임스 본드가 거대 순무에게 말했습니다. 본드는 조금 죽고 싶어졌다. 이 정도로 죽고 싶어지면 안 돼. 그는 되뇌었다. 이 순무가 우리 방에서 꺼지기 직전까지는 더 미친 일이 많이 일어날 거라고.
"제임스 본드, 너는 선택받았다."
"예?"
"뒷마당에 가면..." 그리고 그레이트 올드 터닙은 푸른 잔상을 남긴 채 사라졌다.
어쩌면 올드 터닙은 처음부터 방 안에 없었고 우주 어딘가의 순무 행성에서 영상 전화를 건 게 아닐까, 하고 본드는 멍하니 생각했다. 동전 넣는 걸 깜박했나. 참 불쌍한 순무임에 틀림없었다. 동전이 없다니. 이제 서서히 바깥이 밝아지고 있었다. 7시 정각이었다.
"이봐, Q."
Q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내가 조금 걱정했었는데 말이야...순무가 예상보다 빨리 없어졌어. 이제 맘 놓고 아침을 먹어도 돼. Q? Q...듣고 있어? Q? 그는 Q의 맨 어깨를 살짝 잡았다. 긴장이 풀리고 상황을 차분하게 볼 수 있게 되자 본드는 웃음이 나왔다. Q를 깨워서 뒷마당에라도 나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Q는 볼을 톡톡 두드려도, 머리를 쓰다듬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7시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잠이 많았다. 본드는 기지개를 쭉 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순무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왠지 환기를 하고 싶었다. 그는 창문의 잠금쇠를 풀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뒷마당에 드럼통만한 순무 열 개가 가지런히 심겨져 있었다.
*
"Q,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이건 일종의...계시라구."
"어떤 계시요?"
"순무 농사를 지으라는."
"저는 순무를 싫어해요."
방금 그건 청혼이었지만, 본드는 더 말하지 않았다.
*
"빌어먹을 순무 새끼!" Q는 꽥꽥 소리지르며 순무 때문에 비좁아진 뒷마당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왜 저래요?" 태너가 본드에게 속삭였다.
"방금 순무를 발로 찼어."
*
태너가 본드의 집 현관벨을 눌렀을 때엔 이미 기자들은 모두 빠져나간 뒤였지만, 이웃 주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플래시 소리와 사다리까지 동원해 담장 너머의 거대 순무를 보려는 눈빛들에 질릴 대로 질린 본드는 집 안으로 걸어들어가 큰 삽을 들고 걸어나왔다. 당연히 순무에게 쓰려는 거였겠지만 사람들은 그 시퍼런 서슬에 점점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삽으로 뽑아낼 수 없다는 건 본드도, Q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문은 태너 본인이 맞다는 이야기를 대여섯번쯤 한 뒤에야 열렸다. 태너의 눈에 들어온 건 퀭한 눈의 본드와...
"본드?...랑 Q도 있네요, 맙소사, 전 집에 갈게요. 거대 순무가 뭐라고 내가 금 같은 휴일을 소비해가면서 사내커플 인증을 봐야 하는..."
"태너, 진정해. 우린 귀농하지 않기로 했다고."
"지금 그딴 게 중요해요?"
"그딴 거라니, 유능한 쿼터마스터가 사표를 내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찰나 동안 태너의 머릿속에 주마등이 스쳐지나갔다. 차가운 감자, 싹이 난 감자, 거대 순무, 본드, Q, 순무, Q, 순무..
"그나저나 전 이제 죽는 건가요?" 태너가 물었다. 본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그러니까...왠지 그런 게 있잖아요. 아니! 우리의 비밀 연애가 들켜버리다니! 죽어줘야겠어 미스터 태너! 탕/슉/퍽..."
"자네는 현장 요원의 정신상태를 좀 더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됐고 그놈의 순무 좀 보여줘요."
"그러지." 본드는 집을 가로질러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태너는 납득했다. 그러나 납득했다고 상황이 안정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본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Q는 달랐다.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해보고 있었다. 순무 잘 파내서 요리해먹는 방법 같은 건가, 하고 태너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순무들이 정신 오염 가스라도 내뿜는 모양이었다. 멀쩡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태너, 본드, 이걸 봐요." Q가 별안간 휴대폰을 쓱 내밀었다. 그들은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대회의 포스터 같았다. <세계 큰 작물 대회> 라고 쓰여 있는 이 포스터 아래에는 참가 신청서를 내려받을 수 있는 링크가 있었다.
"파내기만 하면 돼요. 내일까지거든요."
"안 그래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중이었는데 잘 됐군. 1등 상금이 얼마야?"
"됐어요, 이 미친 사람들아. 전 그만 갈래요. 미스 P랑 저녁 데이트가 있어서."
"그게 누군데."
"제 작은 싹감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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