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식님 달성표 보상으로 드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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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너는, 포크로 감자를 찌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무섭고 두려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는 실날같은 불안의 끈을 붙잡고 무엇이 그를 이렇게 두렵게 하는지 알아채려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감자가 설익은 것 같다는(심지어 얼음처럼 차가웠다)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래. 감자 때문이겠지. 태너는 낮게 중얼거렸다. 옘병할 감자 같으니. 그는 포크를 들어 감자를 마저 갈랐다. 그러자 감자는 갈라지기는커녕 데굴 뒤집히며 푸르고 싱싱한 싹을 드러냈다.

순간 태너는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는 딱 돈을 지불한 만큼의 적당한 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카운터 쪽을 슬쩍 돌아보자 마침 돈을 세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빙긋 웃더니 음식 맛이 어떠냐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태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차디찬 감자와 마주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이프로 싹이 난 부분을 크게 잘라냈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것을 소중하게 감싸고 옆에 있던 가방에 넣었다. 화분이라도 하나 사서 이걸 심지 않으면 비참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돈을 세고 있는 주인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고 코트를 집었다. 가게 구석의 TV에서는 7시 뉴스가 막 끝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마지막 소식입니다. XXX가 XX번지의 한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가려던 태너는 번개에 맞은 듯 몸을 돌렸다. 그가 알기로 저 주소에 사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태너는 가방 속의 감자를 깨끗이 잊어버린 채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M에게 뭐라고 할까? 가스 폭발? 테러? 신원 미상의 시체? 일단 뉴스를 마저 들어야 했다. 태너는 소란한 가게 한가운데서 집중해서 귀를 귀울였다. 그리고…

…뒷마당에서 거대 순무가 10개 발견되었습니다.

태너는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수신자는 M이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본드?"
"뉴스 봤나?"
"무슨 짓이냐구요."
전화선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순무가 자랐어. 그것뿐이야."  
"그래요, 10개나 말이죠, 10개. 하나도 아니고."
"알아."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왜? 하나 뽑아가게?"

*

제임스 본드. 누군가 본드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제임스. 제임스? 이름이 불린 남자는 한숨을 푹 쉬고는 베개 밑으로 얼굴을 묻었다. 어둑어둑 한 걸로 봐서 새벽 다섯 시 정도일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시계를 확인해보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겠지만, 알 게 뭐람. 아무리 잠이 없는 00 요원이라도 다섯 시는 한창 꿈을 꿀 시간이었다. Q, 두 시간만 기다려. 두 시간 뒤에 해가 뜨면...그게 뭐 어떤 문제든...해결되어 있겠지. 본드가 중얼거리고는 옆 쪽에 손을 뻗어 Q의 몽실한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착하지, 우리 Q. Q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는 다시 자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뭘 먹을ㄲ...

"제임스!"
"왜, Q?!"
"나는 Q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 나는 그레이트 올드 터닙이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방은 아까보다 더 밝아져 있었다. 번쩍이는 거대한 순무가 푸른 색의 아우라를 내뿜었다. 그는 눈을 다시 감았다.

번쩍이는 거대한, 너무 거대한 순무가 빙빙 돌...아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건 꿈이 아닌 것 같다고 본드는 생각했다. 저 순무가 침대 위로 떨어지면 그와 Q는 곧장 압사할 테고 뉴스 헤드라인에는 -순무에 깔려 죽은 두 남성 어쩌고저쩌고- 비스무리한 게 올라갈 터였다. 그렇게는 안 되었다. 본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삶의 의지를 느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살아서 무사히 몽실한 머리의 Q와 아침 식사를 먹고 싶었다.

일단 본드는 순무...그레이트 올드 터닙에게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물론 저 순무에게는 입이 없지만.

"어..." 그러나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라고 제임스 본드가 거대 순무에게 말했습니다. 본드는 조금 죽고 싶어졌다. 이 정도로 죽고 싶어지면 안 돼. 그는 되뇌었다. 이 순무가 우리 방에서 꺼지기 직전까지는 더 미친 일이 많이 일어날 거라고.

"제임스 본드, 너는 선택받았다."
"예?"
"뒷마당에 가면..." 그리고 그레이트 올드 터닙은 푸른 잔상을 남긴 채 사라졌다.

어쩌면 올드 터닙은 처음부터 방 안에 없었고 우주 어딘가의 순무 행성에서 영상 전화를 건 게 아닐까, 하고 본드는 멍하니 생각했다. 동전 넣는 걸 깜박했나. 참 불쌍한 순무임에 틀림없었다. 동전이 없다니. 이제 서서히 바깥이 밝아지고 있었다. 7시 정각이었다.

"이봐, Q."

Q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내가 조금 걱정했었는데 말이야...순무가 예상보다 빨리 없어졌어. 이제 맘 놓고 아침을 먹어도 돼. Q? Q...듣고 있어? Q? 그는 Q의 맨 어깨를 살짝 잡았다. 긴장이 풀리고 상황을 차분하게 볼 수 있게 되자 본드는 웃음이 나왔다. Q를 깨워서 뒷마당에라도 나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Q는 볼을 톡톡 두드려도, 머리를 쓰다듬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7시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잠이 많았다. 본드는 기지개를 쭉 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순무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왠지 환기를 하고 싶었다. 그는 창문의 잠금쇠를 풀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뒷마당에 드럼통만한 순무 열 개가 가지런히 심겨져 있었다.

*

"Q,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이건 일종의...계시라구."
"어떤 계시요?"
"순무 농사를 지으라는."
"저는 순무를 싫어해요."

방금 그건 청혼이었지만, 본드는 더 말하지 않았다.

*

"빌어먹을 순무 새끼!" Q는 꽥꽥 소리지르며 순무 때문에 비좁아진 뒷마당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왜 저래요?" 태너가 본드에게 속삭였다.
"방금 순무를 발로 찼어." 


*

태너가 본드의 집 현관벨을 눌렀을 때엔 이미 기자들은 모두 빠져나간 뒤였지만, 이웃 주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플래시 소리와 사다리까지 동원해 담장 너머의 거대 순무를 보려는 눈빛들에 질릴 대로 질린 본드는 집 안으로 걸어들어가 큰 삽을 들고 걸어나왔다. 당연히 순무에게 쓰려는 거였겠지만 사람들은 그 시퍼런 서슬에 점점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삽으로 뽑아낼 수 없다는 건 본드도, Q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문은 태너 본인이 맞다는 이야기를 대여섯번쯤 한 뒤에야 열렸다. 태너의 눈에 들어온 건 퀭한 눈의 본드와...
"본드?...랑 Q도 있네요, 맙소사, 전 집에 갈게요. 거대 순무가 뭐라고 내가 금 같은 휴일을 소비해가면서 사내커플 인증을 봐야 하는..."
"태너, 진정해. 우린 귀농하지 않기로 했다고."
"지금 그딴 게 중요해요?"
"그딴 거라니, 유능한 쿼터마스터가 사표를 내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찰나 동안 태너의 머릿속에 주마등이 스쳐지나갔다. 차가운 감자, 싹이 난 감자, 거대 순무, 본드, Q, 순무, Q, 순무..
"그나저나 전 이제 죽는 건가요?" 태너가 물었다. 본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그러니까...왠지 그런 게 있잖아요. 아니! 우리의 비밀 연애가 들켜버리다니! 죽어줘야겠어 미스터 태너! 탕/슉/퍽..."
"자네는 현장 요원의 정신상태를 좀 더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됐고 그놈의 순무 좀 보여줘요."


"그러지." 본드는 집을 가로질러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태너는 납득했다. 그러나 납득했다고 상황이 안정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본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Q는 달랐다.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해보고 있었다. 순무 잘 파내서 요리해먹는 방법 같은 건가, 하고 태너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순무들이 정신 오염 가스라도 내뿜는 모양이었다. 멀쩡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태너, 본드, 이걸 봐요." Q가 별안간 휴대폰을 쓱 내밀었다. 그들은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대회의 포스터 같았다. <세계 큰 작물 대회> 라고 쓰여 있는 이 포스터 아래에는 참가 신청서를 내려받을 수 있는 링크가 있었다.

"파내기만 하면 돼요. 내일까지거든요."
"안 그래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중이었는데 잘 됐군. 1등 상금이 얼마야?"  
"됐어요, 이 미친 사람들아. 전 그만 갈래요. 미스 P랑 저녁 데이트가 있어서."
"그게 누군데."
"제 작은 싹감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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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2 스파이 전력에 낸 얀데레Q 

주제 : 트라우마


침잠


저는 제가 죽어서 당신의 머릿속에 각인되길 원했어요. 거의 성공할 뻔 했는데. Q가 말했다. Q는 지난 2년 동안 나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유령이었다. 


참 슬픈 일이에요. 모든 게 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잖아요. 당신이 어제 저를 발견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정말이지, 큰 상처였는데. Q가 말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랬다. 어제 Q는 내 집을 비추는 감시카메라들과 함께 은신처에 있었다. 2년 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는 살아 있었다. 내가 총을 겨누자 그는 속삭였다. 안녕, 제임스. 


그건 당신이 단순히 저를 잊지 못하는 것과는 달라요. 전 당신이 저를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저와 관련된, 저를 생각나게 하는 물건들이나 대화나 단어나 뭐 그런 것들을 보면…네. 그래요. Q가 말했다. 네. 그래요. Q가 한번 더 말했다. 그렇죠. 


나는 당신이 앞으로 평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면 했어요. 눈을 감으면 내가 당신 목을 조르는 광경이 펼쳐졌으면 했어요. 내 생각을 해 주기를-Q가 말했다.-바랬어요. 사랑해요. 그는 나를 사랑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실 어느 정도는 기뻐요.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너무. Q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앞으로 남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기를 바래요. '세상에, 그래, Q는 살아 있었어. 그가 살아 있다니.' 사실 이게 더 좋지만요. 'Q가 죽었어. 그가 죽다니. 그가 죽은 날이 아직도 어제처럼 선명해…' 어쩔 수 없어요.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요. Q가 말했다. 


그건 그렇죠, 제가, 아예 당신 집에, (좀 조용히 좀 해요, Q는 내가 묶인 의자에 손을 올려놓았다.) …붙어 있었던 카메라를 모두 떼 버리고 완전히 당신을 떠났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겠죠.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더 완벽한 결말인 건 틀림없잖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당신은 내가 죽는 순간을 무한히 반복하고. 그렇게. Q가 말했다. 


조금 변화를 주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당신의 인생에. Q가 말했다. 성공했으니 됐어요. 음, 그냥 그렇게 생각할래요.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제 어떻게 할까요? Q가 말했다.


저는 제가 죽어서 당신의 머릿속에 각인되길 원했어요. 저는 그런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사실 당신의 창백해진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았어요. 변화를 받아들이긴 더더욱 싫고요. 말했잖아요. 큰 상처였다고. 그냥…그렇다고요. 그러니까. Q가 말했다. 이제부터 잘 봐요.


이것 봐요. 심지어 당신 총이에요. Q가 말했다. 완벽한 도구죠. Q는 그것을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럼 이제 안녕, 제임스. 앞으로는 5년이 지나도, 10년, 15년, 30년이 지나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요.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 당신은 날 그리워하지 않겠지만. Q가 말했다. 집에 가서 따듯한 물에 편안하게 목욕하고 식사도 한 다음에 이렇게만 생각해주면 돼요. 'Q가 죽었어. 맙소사, 그가 정말 죽다니. 그것도 내 앞에서.' 그리고 그걸 평생 반복하는 거예요. 정말 간단하죠. 



"그럼…이제 당신은 자유야." 

Q가 속삭였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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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1 미쳤다진짜 너무 예전글이라 죽을것같지만 백업하는이유는 블로그를 갈아버릴 예정이기 때문에...(이하생략


 Q는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이른 오후였지만 플랫 안은 다람쥐 굴처럼 어둑어둑했다. 방 중앙에 자리잡은 노트북의 푸른 모니터가 유일한 조명이었다. 그는 건성으로 자판을 건드렸다. 방금 수신된 새 송신기의 업데이트 보고서(20장 짜리였다)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 건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낼 수 있었다. 

 

그는 약속하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더블 오로 시작하는 모 요원이 듣는다면 코웃음 칠 소리지만, 사실 맘만 먹으면 보고서는 30분 내로 완료가 가능했다. 그건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치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Q가 번번이 '당신이 맨몸에 총 하나만 달랑 들고 적의 본부로 뛰어들어가 USB를 빼내 오는 것보다 내가 자판 몇 번 두들겨서 해킹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 이라고 주장하는데도 말이다. 다만 Q는 떼 쓰는 7살짜리 남자아이가 아니라 20대 후반의 어엿한 성인이었기 때문에 더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사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던 내 알 바 아니지. 그는 고양이처럼 길게 기지개를 켰다. 왜냐하면 Q 본인도 입장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정반대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리타분한 늙은 남자. 007에 대한 Q의 이미지는 딱 그 정도였다. 

 아마 본드의 머릿속에서의 Q는 미화시키는 취향이 없는 한 당돌한 '새파란 애송이'일 것이고, 그의 핸드폰 전화번호부 내에서도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007의 핸드폰에 있는 Q의 번호가 "애송이" 라거나 기타 수식어 없이 그냥 "Q" 가 맞다고 해도 Q에게는 별로 감정적인 데미지가 없었다. Q의 핸드폰에는 007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혼자만의 묘한 승리감을 느끼던 Q는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문가 너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는 대신 차분하게 노트북을 덮었다. 전날 새벽 내내 '파라노말 액티비티' 를 비롯한 호러 무비를 연달아 시청한 끝에 Q는 무덤덤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가 언제나 생각하는 본드의 눈은 맹수의 그것과 참 비슷했다. 귀신이나 악마보다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육식의 무언가가 더 무서웠다. 굳이 따지자면 말이다. 둘 다 절대 마주치기 싫은 건 확실했다. 

 

"007. 다음번에 내 플랫으로 올 일이 생기면, 문을 사용해주기 바라요."

"그러지." 젊은 쿼터마스터는 자신의 말이 "무기는 꼭 반납해 주세요." 와 같은 맥락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M이 그러던데. 오늘 가택근무라고···"

"해야 할 일은 다 끝냈어요."


본드는 닫힌 노트북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Q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 못 끝낼 것 같으면 이걸 전송해버릴 사람은 내 밑으로 50명이 넘어요. 지금은 쉴 타임이죠."

"권력 남용인가?"

"아뇨. 불청객의 방해에 의한 당연한 권리라고 해 두고 싶은데요."

"상관없어." 그가 웃었다. 

흰 셔츠의 목깃에 가려 본다고 애를 꽤 쓴 것 같은 옅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분명히 어딘가의 호텔 화장실에서 박박 문질렀을 것이다. Q는 속으로 조소했다. 내 잔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나 보네요. 

"셔츠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어요?"

"없었어. 일 끝나자마자 바로 왔거든."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꼴에 Q는 뒷목이 당겼다. M이 사무실 의자에 파묻힌 채,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코빼기도 안 비칠 007의 업무 보고서를 기다리며 F5를 연타하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사실 제임스 본드는 모든 MI6 윗분들의 평균 혈압치를 높이기 위해 CIA에서 파견한 요원이 아닐까, 하고 Q는 생각했다. 담당 쿼터마스터의 정신적 스트레스도 포함해서.


"피범벅인 남자랑 같은 방 안에 있는 건 제가 관용을 베푸는 게 가능한 한계치 밖이니까 제발 셔츠 좀 갈아입으세요. 피 냄새는 딱 질색이니까." 

"'피범벅'은 너무 과격한 표현 같은데. 자네답지 않군."

"아. 바가지를 더 긁히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미안해." 007은 쉽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귀중한 시간을 자존심을 건 말싸움으로 채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이 많은 쪽이 참아야지.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리고 혹시나 M이 들었다면 필히 비웃을) 속엣말을 중얼거리며 본드가 말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새로 다려진 셔츠는 네 방 벽장······"

"밑에서 세 번째 서랍이요. 잘 외우시네요."

"반복 학습은 누가 뭐래도 좋은 거야. 사이즈는 여러 갠가?"

"S만 안 집어 입으시면 별 말 안 할게요."

"어차피 안 들어가." 

                                                                                                     

                                                                                                           ***

 

 


007이 말끔한 모습으로 플랫 거실에 다시 나타났을 때 Q는 새로 끓인 따뜻한 얼 그레이를 두 잔의 머그에 따르고 있았다. Q와 B. 본드는 자기 몫이 확실한 것 같은 컵을 집어들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발치의 작은 협탁에는 쿠키와 고급 초콜릿들이 올려져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발렌타인 데이 때 Q의 사무실 책상 위 광경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B?"

"당신 거 맞아요." 

"의외로 세심한 구석이 있군."

"발로 뛰는 현장 요원이 컴퓨터 담당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Q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집까지 불쑥불쑥 찾아와서 하룻밤 지내다 가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지금까지 나에 대해 뭘 보고 들은 거죠?" 

"남들이 보고 듣는 것과 같은 것들." 

"수작 부릴 심산이면 당장 그 컵 내려놓고 집에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 바쁘니까."

"30분 내로 끝낼 수 있다고 했던 건 누구시더라?"

"방해하는 사람이 없고 조용해야 가능한 조건이라고 꼭 말로 해야 하나요?"

 

본드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Q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작은 초콜릿의 껍질을 깠다. 손바닥 위에 5개쯤 모이자 그는 한 알을 내밀었다. 007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몬드 들어간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오늘은 어땠어요?" 별안간 Q가 물었다. 본드는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반복되어 온 일이었다.

"두 명 줄였어."

"어떻게요."

"둘 다 기절시켰지." 

"잘 됐네요." Q가 활짝 웃었다. 안도감과 그 밖의 무언가가 뒤섞인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면서 007은 저녁에 꼭 장난감 사다 주셔야 돼요, 라고 말하는 어린 아들을 앞에 세워놓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Q가 원하는 건 간단했다. 사람 좀 덜 죽여요.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웬만하면 임무 수행 때 막무가내로 인명피해 좀 내지 말라구요. 되도록이면.

지금까지 손에 피를 가득 묻혔다고 해서 앞으로도 평생 핏구덩이에서 굴러야 할 의무는 당신에게 없어요.

007은 비슷한 말을 했던 여자가 생각났다. 그녀의 이름은 베스퍼였다. 

 

이제 와서 죄책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뭐지? 본드는 반박했었다. 그런다고 과거가 지워지지는 않아.

Q가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지워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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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요

4월에


 이제 와서 보니 부제: 미뇽의 ㅁ는 M의 ㅁ 같은 거 붙였어도 좋았을듯



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은 굉장히 신중하게, 그리고 적절한 때에 이루어져야 했다. 조금이라도 놓쳤다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은근한 냉기에 나는 고개를 빼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아침 햇빛이 방 안에 성큼 걸어 들어올 테고, 내 눈은 졸음을 벗을 것이다. 


나직한 초침 소리, 드문드문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잠결에 속삭이는 의미 없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나는 바구니 안으로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조금 더 잘까, 하고 멍하니 유혹에 몸을 맡길 무렵 나는 큰 바늘이 딸깍, 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오전, 모든 게 정상…은 아니고. 


그녀는 잠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난 뒤 목이 말라 부엌으로 기어가다가 어느 새 잠에서 깨어 식탁으로 비척비척 걸어와 앉는 그녀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볼품없게 나동그라지는 일은 기본이었다. 식탁 밑에서 조심스레 밖으로 기어 나오자 그녀는 아, 하고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러면 나는 그 손으로 올라탔다. 그리고…아침 식사. 나는 빵 한 덩어리에 올라타서 맹렬하게 그것을 조각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느냐고? 괜찮다. 그러려고 한 거다. 


어쨌든 그녀가 웃는 걸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앙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부터 할 일은, 글쎄. 웃는 것보다는 다른 걸 더 잘 이끌어낼 것 같지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 그걸 알았으면 난 진작에 우주를 정복했을…아닙니다. 우주 정복은 햄스터설치류에게 양보할 예정이다.

오전 7시 45분이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꼬리가 있다는 것은 꽤 유용하다. 가끔은 밟히지만, 뭐.


조심스럽게 슬리퍼를 침대 밑으로 끌었다. 예상한 바였지만 소리가 너무 컸다. 분명히 무거워 봤자 일 텐데! 고작 털로 만들어진 슬리퍼 따위가! 그녀가 눈을 뜨고 아래를 본다면 곧바로 한 손엔 끌려가던 슬리퍼를,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불쌍한 꼬리를 쥐고 흔들어서 저 열린 창밖으로 사정없이 내던져버릴 것…이라기에는, 음, 아니다. 이건 내 망상일 터였다. 높은 확률로 불안감에서 비롯된. 일정에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분홍 색 슬리퍼는 보기에 참…뭐랄까, 


펑 하고 앙리 모양의 작은 형체가 나타나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조금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젠 별 게 다 보이네. 


“그래요, 잘 고르셨네요. 빅토리아에게 딱 어울려요.”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쿠!


다행히 매트리스 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제 평소보다 더 깊이 잠들었던 걸까. 그럼 조금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어쨌든 지금은 이게 먼저다. 마침내 늘어진 시트 거의 가까이까지 슬리퍼가 닿았다. 조금만 더 끌어당기면 된다. 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툭 하고 늘어진 팔에, 나는 빠르게 옆으로 굴렀다. 다행히 그 손 끝에 내가 닿는 일은 없었다. 


슬리퍼는 먼 거리를 날아갔다.


아, 여기서 내가 명확히 해야 할 점은 내가 18cm에 불과한 작은 용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7cm가 인간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어쨌든 난 내 기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러분, 작은 동물의 눈높이에서 생각해 주세요, 이 광고는 스위스 당국의 협찬으로 이루어졌으며…다 됐다. 나는 슬리퍼를 침대 아래의 내 잠자리 바구니 옆에 딱 붙여 두고는 꼬리로 그것을 만족스레 툭툭 쳤다. 


나는 분홍 색 슬리퍼가 놓여 있던 자리로 가서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아무것도 까딱하지 않고 고요하게 찬 바닥에 몸을 비비고 있으려니 별 잡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그래. 내가 내 취미 생활을 언제 깨달았느냐 하면…그렇지. 몇 주 전에, 부엌에서였다. 


‘앙리, 무슨 파이를 좋아하나?‘ ‘응? 나는…‘ 그가 뭐라고 말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빅토리아가 팔을 걷어붙이고 밀가루 포대를 탕 하고 도마 위에 내려놓았을 때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중간은 적당히 넘기고, 음, 이것도 넘기고,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서…구르다가…오븐 속에서 팍 하고…이런저런 일이 있은 후에 나는 한동안 입을 열 때마다 밀가루가 나오는 기적을 체험했다. 생략이 너무 많지 않냐는 질문이 들어올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으니까. 5일 전 점심 메뉴를 5초 안에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님 말고.

빅토리아 프랑켄슈타인과 앙리 뒤프레의 급작스레 굴러들어온 반려동물로 살아가면서 두 사람에 대해 무언가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언가 사고를 치고 싶은가. 혹시 내 머릿속을 까보면 인간의 엄지손가락 반 만한 뇌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부수고 어지럽히고 망쳐라.> 나는 누군가를 놀래켜 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전 8시, 모든 게 정상! 기대 이상의 슬리퍼 대용품! 


위에서 이불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일어난 모양이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앞으로 30초 안에 모든 게 끝날 터였다. 준비한 시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그래서 허무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매일 한다면 어떨까. 좋은 생각이었다. 


                              *


나는 눈을 반쯤 뜨고 발을 휘저어 슬리퍼에 대강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솜을 밟는 기분이었다. 잠깐. 솜?


어?


                              *    


“언니! 발닦개가 되게 해주세요!”    

“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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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4 케노님께 드림(......)부끄러워 죽겠다 


London Rain


그는 문가에서 잠시 망설이고는 손끝으로 푸른 문을 살짝 밀었다. 곧 틈이 살짝 벌어졌다. 닥터는 한 쪽 팔을 시험해보듯이 문 밖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였다.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어때요?“

그는 종종, 비 오는 날이면 삭신이 쑤시다고 앓는 소리로 엄살을 부렸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당신 나이가 1000살이 넘었으니 몸이 안 쑤시는 게 이상하다며 장난이 반쯤 섞인 타박을 놓았다. 부루퉁한 얼굴로 조종 장치에 기댄 그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비가 오면 지구의 인간들이나 달렉이나 상냥한 우드들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들 조금씩 우울해지기 마련이라고. 난 내가 원할 때 빼고는 슬픈 게 싫어.

그럼 당신이 그걸 사라지게 하면 되잖아요? 당신의 그…뭐랄까 특허라도 받아야 할…기린 댄스를 춘다던가. 난 그거 되게 웃기던데. 당신은 닥터잖아요?

안 돼. 그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이유라는 게 없기 때문에 없앨 수 없어. 

으음. 납득이 갈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네요. 음…아닐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고 지금 부엌에서 타는 냄새가 나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오븐에 수플레 올려놓은지 몇 시간이나 됐지?

어머나.

그 때 나는 한바탕 무릎을 치며 바닥을 구르는 그의 얼굴에 까맣게 타서 이미 형체를 잃은 수플레 조각을 명중시켰다. 물론 내 얼굴도 멀쩡하게 유지되지는 않았고. 맙소사, 우리 꼴 좀 봐요. 10분 뒤 내가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수플레 반죽을 떼어내며 외쳤다. 우리 둘 다 엄마한테 한 쪽씩 귀를 잡혀 샤워기로 공격당해도 할 말이 없겠군요. 그가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지내왔다.

“방금 전에 모니터로 확인한 것 같이, 비가 오는군.“

“우산 챙겼어요.“

“나가려고?“

내가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가 엉겁결에 다른 쪽 손으로 내가 건넨 커다란 파란색 장우산을 받아들었다. 

“당연하죠.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난 비 오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좋았어…어…음…그러지 뭐. 레이디가 원하시는 대로.“

나는 윙크를 하고 여전히 그와 팔짱을 낀 채 함께 타디스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문가에서 수다를 떠는 동안 빗줄기는 모니터로 보았을 때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옆에서 닥터가 헛기침을 하며 옷 젖을 걱정은 덜 해도 되겠구만, 하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찰랑이는 물웅덩이는 여전히 길 곳곳에 누워 있어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발목까지 흙탕물에 담글 수도 있었다. 나는 마침 긴 다리를 잘못 가눠 바닥에 코를 박을 뻔한 닥터를 잘 잡고 반쯤 끌고 다녔다. 그의 매우 탁월한 균형감각은 1000년 더산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터였다. 바뀔 리가 없다. 

“당신은 혼자 여행할 때가 많았나요, 닥터?“

“아니. 내 옆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아마도.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혼자 다니기도 했지.“

“당신이 말하는 가끔이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영원이예요.“

“그렇겠네.“

“…그래서. 그럴 땐 비가 오면 어떻게 했죠?“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모르겠어요.“

닥터는 활짝 웃었다. “비가 오지 않는 곳으로 갔지.“

그와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구름이 빈틈없이 꽉 이가 물려진 채로 물방울을 하나하나 떨어트리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살던 집에서 크리스마스 쯤 되면 바닥에 깔아 놓던 두꺼운 진회색빛 양모 담요 같았다. 알고 지내던 프리랜서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필요가 없어졌다며 싼 값에 넘겨준 물건이었다. 왼쪽 가장자리에 커피 자국이 살짝 있는 것 빼고는 완벽한 카페트였다. 슬리퍼를 벗고 양 손에 코코아 컵을 든 채 가만히 그 위를 걸어다니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났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톡 하고 콧잔등을 쳤다. 걷다 보니 어느새 공원 한가운데로 와 있었다. 얕은 가랑비라도 비는 비인지 사람들은 주위의 건물 안으로 피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적적한 공터가 천천히 어두워졌다. 

나도 모르게 닥터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제 가로등이 하나씩 켜질 거예요.“

그러자 내가 마법 주문이라도 말한 것처럼 주욱 늘어선 가로등들이 비를 맞으며 순서대로 희뿌연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네요.“

“뭐가?“ 닥터가 말했다.

“비가 오면 슬퍼져요.“

“내가 울 몫을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는 것 같잖아.“

“흠.“

나는 고개를 끄떡인 다음, 아직도 우산 손잡이를 꼭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닥터에게서 우산을 가져왔다. 그의 붕 뜬 머리가 천천히 젖어들어갔다. 어둑해진 채로 천천히 우리의 머리 위로 회전하는 구름은 땅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차갑네요.“

“있지, 클라라.“ 그가 말을 꺼냈다. “지금은 어때?“

“네?“

“우울한 기분이 드냔 말이야.“ 

“…아뇨. 왜냐하면 난 지금 당신이랑 함께 비를 맞고 있으니까.“

닥터, 지금 완전 물에 빠져서 홀딱 젖은 생쥐 꼴이라구요. 얼마나 웃긴 지 알아요? 내가 깔깔 웃었다. 그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 너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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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7 민트님께 드림


부부사기단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큰길이니 골목이니 샅샅이 뛰어다니는 동안 우리는 주차장으로 조용히 들어가 자동차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좁긴 했지만 대강 버틸 만 했다. 옆을 돌아보니 백작은 고급 와인을 음미하는 상류층 같은 얼굴로 혈액 팩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볼이 쑥 파였다. 
"그만 좀 쪽쪽 빨아."
"맛있잖아."
"없어 보여." 
백작은 3분의 1쯤 남은 팩을 입에서 마지못해 뗐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맛있어?"
"맛있지."
"내가 만든 건."
"됐어." 
나는 며칠 전, 백작이 실험실에서 보여주었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의 반반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양이 어찌나 안타깝던지 사진으로 한 50장 연속 촬영해서 벽에 걸어두고픈 심정이었다. 물론 그는 카메라에 안 나오니 말짱 헛일이겠지만. 어쨌든 우리에게는 뭔가 좀 더 멀쩡한…것이 필요했다. '하하, 우리 귀여운 백작이 음식투정하면 못 써요' 하고 넘어가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소중히 숨겨두었던 빨대를 꺼냈다. 문득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백작이 빨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뭐."
"내 빨대는."
"뭐."
"빨대."
"빨대가 뭐." 나는 포장비닐을 벗겨내어 혈액팩에 빨대를 푹 꽂았다. 그와 동시에 백작이 소리를 빽 질렀다.
"나도!"
"아 그럼 세X일레븐 가서 뭐라도 산 다음에 빨대 주세요 하면 되잖아!"
"지갑 안 들고 나왔다!"
"그럼 말아! 애도 아니고 빨대에 왜 이렇게 집착해!"
백작은 뭐라 말하려고 입을 잠깐 뻐끔대다가 잠시 후 본래의 고급인간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차분해지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나는 말없이 백작의 손에 들려 있던 혈액팩을 그의 입가에 가져다대어 밀었다.
"남은 거 다 마시면 하나 줄게."
"그 전에 자리부터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여긴 더워."
"슬슬 들어가자, 그럼. 가방 챙겨."
나는 겉옷 주머니에 혈액 팩을 대여섯개 집어넣었다. 백작은 책가방을 메고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바깥이 아직도 소란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쩌긴 어째, 뛰어야지…" 그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골목길을 미친 듯이 가로질렀다. 뒤에서 누군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 저 놈들 뛴다! 저기로 간다!

백작은 다리를 바삐 놀리는 와중에도 키티 책가방을 앞으로 돌려메고 지퍼를 열어 혈액팩을 꺼냈다. 참 대단한 의지력이었다. 그가 뛰는 내 손목을 턱 붙들 때까지도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기, 지금 뭐야?

"빨대."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크게 떴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빨대 줘."

그 후 나는 약 일주일 내내 밤마다 빨대 꿈을 꾸었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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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9 비랑님이랑 연성딜

1.
사죠는 말야, 하고 쿠사카베가 입을 열었다. 그를 곁눈질로 살펴보자 맨 윗 단추 두어 개가 열린 셔츠가 보였다. 5분 전의 뜀박질이 아직도 영향을 미친다는 듯 위로 길쭉한 몸뚱아리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 역시 얼굴에 확 끼쳤다. 쿠사카베는 말이야, 참 말라깽이야. 게다가 위로 멀찍이 커. 단 맛이 나는 단어들이 입 안에서 그냥 녹아버린다. 쿠사카베가 말하도록 두자, 그대로 두자. 옅은 빛의 머리카락이 착 가라앉는다.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집까지는 아직 먼 길이 남아 있었다.

사죠는 말이야, 하고 쿠사카베가 다시 운을 떼는 것이 들렸다. 아이스크림 좋아해? 큰 초콜릿 덩어리가 흘러내리는 그거, 큰길에서 오른쪽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가게에서 파는 거. 거기 안 가봤지? 쿠사카베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웃었다, 더우니까 말이야. 

그러자 사죠 리히토는, 길 한가운데에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다. 

*

한 손에는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 다른 손에는 흘러내리는 더운 손이 닿는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30분 전에 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더위 때문에 어지러운 머릿속에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쿠사카베와 내게 날개가 돋아나서, 태양을 등지고 날아오른다면 얼마나 시원할까, 그런 목소리가 계속계속 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많은 날개가 필요하지 않았다. 등 하나에 날개 하나씩, 왜냐하면 손은 이렇게 잡은 채로 그대로일 테니까. 우리는 가볍게 축축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올라 집 앞에 소리 없이 착지한다. 문 앞에서 쿠사카베는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들어가자. 나긋이 접히는 그의 눈꼬리가 기막히게 완벽해서, 사죠는 그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응?"

등에는 날개는커녕 깃털 하나도 돋아나지 않았다. 사죠는 자신이 방금 소리내어 웃은 것을 알아차렸다. 무언가 차가운 액체가 손에 닿았다. 녹은 아이스크림일 터였다. 사죠는 잠시 길에 멈춰서서 아직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특제 더블사이즈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달았다. 그 맛은 마치 쿠사카베 히카루,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있지, 그 가게 이름은 ----야. 잘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잘 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 없다고 사죠 리히토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음에 그곳에 가고 싶어진다면, 쿠사카베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여름 내내 말이다. 녹아 흐르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여름의 맛. 

"아냐."
"아이스크림 맛있어?"
"항상 여름이었으면 좋겠어." 사죠는 얼굴부터 목까지 잔뜩 붉히고는 말했다. "항상."

*

사죠는 분명히 더워 하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손은 찼다. 쿠사카베는 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갸우뚱하면서 잡은 손가락을 힘주어 엮었다. 혀 끝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착 감겨들었다. 그는 작년 이맘때쯤 혼자 하교길을 걷다가 그 아이스크림 가게에 홀린 듯이 들어가 앉았다. 인심 좋아 보이는 주인 아저씨가 내어준 오늘의 아이스크림(100엔을 깎아준다고 했다)을 한 입 먹고, 쿠사카베 히카루는 말 그대로 감동했다. 그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네 개를 더 먹은 후 값을 치른 다음 집에 가서 복통으로 약 이틀 밤낮을 앓았다. 꽤 좋은 경험이었죠, 아이스크림은 하루에 하나씩, 이런 구호가 생겼으니까. 다음주에 멀쩡한 모습으로 가게에 나타난 쿠사카베가 말하자 아저씨는 껄껄 웃고는 한 스쿱을 더 얹어주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옆을 돌아보니 사죠는 아이스크림에 온 정신을 쏟은 채 열심히 초코를 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고양이 같아서 쿠사카베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귀엽단 말이야.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쿠사카베 히카루는 생각한다. 

문득, 사죠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선을 옮기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휘적이는 게 보였다. 아, 한 부분에 시선이 고정된다. 초콜릿이 녹아서 그의 손가락으로 흐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갑자기 아이스크림, 사죠의 길고 차가운 손, 사죠의 웃는 입, 그리고 사죠라는 사람 자체가 쿠사카베의 눈 앞에 차가운 바람처럼 밀려들어왔다. 더워서 그런 거야. 쿠사카베가 생각한다. 더우니까. 아...사죠, 좋아해. 쿠사카베에게는 이 말을 할 기회가 참 많을 터였다. 언제든지.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사죠가 아이스크림을 베어물자 쿠사카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사죠는 참 고양이 같이 귀엽단 말이야. 이 생각을 아까도 했었던 것 같은데, 아, 더위, 더위, 더위, 모든 게 더위 때문이었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이 사실이 쿠사카베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취할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사죠는 다시 그 가게에 들어가 얼굴을 찌푸리고 어떤 것이 제일 맛있을지 고민할 것이고, 나는 다시 초콜릿을 추천하고, 또 다시 밖으로 나와서 푸르게 뻗은 나무 아래를 지나 집으로 들어가고, 다시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렇게 텅 빈 거리를,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사죠는 잠시 길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여름이었으면 좋겠어." 그는 얼굴부터 목까지 잔뜩 붉히고는 조용히 덧붙였다. "항상."

2. 
난방이 고장난 건 아니었다. 분명히 그건 멀쩡했다. 처음에는 쿠사카베도 동의했다. 그가 돌연 우기기 시작한 것은 30분 전의 일인데, 내가 간신히 꺼낸 체크무늬의 두꺼운 이불을 다시 벽장에 집어넣으려는 찰나였다. 잠깐, 잠깐만, 사죠. 그가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이게 정말 고장난 게 아닐까? 응? 모처럼 덮을 것도 새로 꺼냈는데, 써 봐야지. 그렇지?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그를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꺼운 체크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는 나란히 코코아를 한 잔씩 타서 손에 쥐었다. 후 하고 불자 씁쓰름한 단 내가 진동했다. 그제 빨아서 어제 말린 이불에서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그리고 버석버석했다. 동굴 속에 들어간 두 마리 쥐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리에게는 긴 앞니도, 갉아먹을 치즈도 없었지만.

얼마 뒤 쿠사카베가 졸기 시작했다. 그의 컵은 벌써 비어 있었다. 나는 컵을 꽉 쥐고 놓지 않는 쿠사카베를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그것을 뺏을 수 있었다. 부엌에 가져다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컵을 쥔 채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에, 무언가 나를 잡아끌었다. 

"…사죠."

원래도 처진 눈이 졸음에 취해 더 늘어졌다. 

"어디 가?"
"컵, 좀…싱크대에…쿠사카베, 좀 놔."
"안 돼."
"왜?"
"그냥 안돼."

나는 잠시 고민하고는, 컵을 가까운 탁자 위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쿠사카베를 따라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잠이 깬 건지 자는 중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재워 줘야지."
"……"
"사죠가 안 재워주면 안 잘 거야."

그러고는 입을 뾰루퉁하게 내미는 것이었다. 코코아를 더 많이 먹였어야 했는데, 그러면 따듯하고 배가 불러서 바로 잠들었을 텐데. 뭔가 굉장히 귀찮은 햄스터를 키우는 주인이나 할 법한 생각을 되뇌이며 사죠는 손을 내밀어 쿠사카베의 볼을 쓰다듬었다. 쥐, 햄스터, 털투성이의 작은 동물들, 그리고 쿠사카베. 이들의 공통점을 서술하시오, (3점). 정답: 쓰다듬어주면 좋아한다. 귓가에 실로폰 소리가 메아리쳤다. 맞추긴 했는데 왠지 머쓱한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하나. 사죠는 착잡한 표정으로 쿠사카베의 눈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눈을 감겼다. 그는 순순히 사죠의 행동에 따랐다. 착하지, 우리 설치류. 

"쿠사카베, 졸려?"
"거의."
"그럼 내가 말하는 거 들으면서 자."
"으응."

*

너는 지금부터 햄스터야. 내가 햄스터야? 그래. 넌 햄스터야. 그것도 꽤 큰. 알았어. 넌 지금 뭐 하고 있어? 사죠랑…아니, 사죠 햄스터랑 이불 속에 누워 있어. 아냐. 넌 지금 톱밥 속에 들어가 있어. 톱밥? 응, 톱밥. 그렇구나, 톱밥… 그리고 손에는 해바라기씨를 들고 있고. 해바라기씨, 맛있지. 맞아. 맛있고 열량도 높고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 그럼 이제 그걸 한입 먹어.

쿠사카베가 입을 우물거렸다. 

먹었어. 그래, 잘했네. 계속 그렇게 해. 그럼 이 해바…해마…라기씨를 다 먹으면…어떡하지?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첫번째 해바라기씨를 다 먹자마자 내가 새로 줄 거니까. 그렇구나…그럼 넌 해바라기야?

응?

해바라기씨를 준다며. 

…그건 그렇지만…나는…나도 햄스터야. 어떻게? 너랑 사귀는 햄스터인데, 네가 너무 좋아서 널 위해 해바라기씨를 100개 사뒀어. 그러니까 부족할 일은 없다는 이야기야. 아, 그렇구나. 고마워. 애인이 있다는 건 좋은 거구나. …그, 렇지, 뭐…말하자면. 

하나 다 먹었어? 아니, 아직…조금…남았네. 그래, 그래. 천천히 먹어, 쿠사카베. 이제 따라해. 으응. 내가 이걸 다 먹으면 나는 잠에 든다. 

내가 이걸 다 먹으면 나는…

쿠사카베는 잠에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톱밥 속에서 서로 꼭 껴안고 잠든 햄스터일지도 모른다고 사죠는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쿠사카베가 잠든지 10분 뒤에 덩달아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해바라기씨를 먹는 꿈을 동시에 꾸었다. 겨울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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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Creature X Mint and X


Written by Mignon


그가 할 말을 마치고 일어서자, 나는 우산 끝을 그의 눈에 거의 던지듯이 찔러 넣는다. 그것은 군청색의 긴 장우산이다. 그의 목 아래가 거세게 흔들린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사형수다. 그러나 사형수는 곧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불신자에게 고개를 두어 번 내젓는다. 내 치마는 물에 젖어갔다. 누군가 나를 일으켜주었으면, 하고 잠깐 생각했다. 일으켜줄 사람은 이곳에 없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반듯한 얼굴의 반쪽이 뭉개져서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나는 잠시 흐느꼈다. 


여전히 얼굴에 우산이 박힌 채로 그 자리에서 비틀대는 X는 마치 줄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 긴 평행봉을 쥐고 이리저리 앞뒤를 재는 무용수 같다. 물론 그는 진짜 무용수보다 서투르고, 불안정하고, 곧 사라질 연기 같고, 무엇보다 그 가엾은 무용수와는 달리 바닥으로 낙하해도 부러진 곳 하나 없이 일어날 터였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다. 언제나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사람을 농락하고 비웃고 조롱한다. 그리고 관객이 홀린 듯이 객석에서 일어나 걸어오면 손을 잡고 무대 아래, 캄캄한 그곳에 처넣는다. 온 도시에, 온 세상에 그의 감옥이 존재했다. 아차 하면 끌려들어가는데, 피해자들은 자신이 끌려들어가는지도 모르다가 문이 잠겨버린 후에야 알아차린다. 이 모든 것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흐릿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눈 앞 역시 흐리다. 낮에는 이러지 않았다. 낮에 나는 집 밖에 있었다. 아침에는 문을 닫기 전에 짧게 손을 흔들었다. 벌써 등 뒤로 멀어진 창문에 비치던 너는 누구였던가. 너는 내 서랍 속의 맹독, 싸구려 휴지에 싸인 반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값비싼 보석. 그러나 맹독은 사실 색소를 푼 물, 반지는 손을 대면 먼지로 바뀌고, 보석은 감정할 가치조차 없는 모조라고, 그가 말한다. X가 말한다. 


"결국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처음부터." 


"닥쳐."


모든 것이 바뀌고 비틀리기 시작한다. 비가 폐허 위에 내려앉자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창문이 닫히고 커튼이 내려졌다. 가벼운 추위에 떨며 온갖 틈을 모조리 잠그는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언제 올지 기다리며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날들이 수백, 수천 번 반복되고 세대는 수만 번 바뀐다. 나는 그 사이로 영원을 그러쥐었다. 나의 영원한 계단, 집, 추위.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 나는 행복을 너에게 주고 싶었다. 너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백 개가 넘는 창문을 모두 닫고 함께 추위를 궁금해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내게 물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해? 춥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해. 하지만 나는 알아. 추위라는 게 뭔지 알아. 나는 그 때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피곤한 손으로 문을 열자 빈 집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바깥으로 밀려나왔다. 굳이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집 문을 잠그고 펼쳐서 바닥에 내려놓았던 우산을 다시 집어들었다. 없다. 



바닥에 툭 떨어진 검은 양복이 기묘하게 움찔거렸다. 나는 일어서서 뒷걸음질로 계단을 한 칸 올라갔다. 그것은  나비다. 넥타이가 검은색의 나비로 변했다. 나비는 비를 맞으면서도 날아올라 허공을 몇 바퀴 돌았다. 나는 이렇게 뒷걸음질로 계단을 계속 올라가다가 넘어지면 어디를 제일 먼저 다칠지 고민하고 있었다. 


눈 앞에 새카만 나비 무리가, 머리가 없는 몸이 있다. 팔이 움직인다. 장갑이 벌레처럼 꿈틀댄다. 나와 가자. 아가씨,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네 집은 여기가 아니다. 편안하고, 따듯한 곳으로 갑시다. 추위에 떨도록 내버려두자. 진짜 추위가 무엇인지 알려주자. 사실 알려줄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살아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으니까. 죽은 생명이다. 그는 지옥 같은 추위에서 태어났다. 아무도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지 않았고 그 어떤 축복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저주다. 


이제 이 바보 같은 공연을 끝낼 시간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비 한 마리를 잡아서 손으로 으깼다. 나머지는 비명을 지르며 회색 하늘로 날아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계속 내린다. 우산이 있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푸른 색의 긴 장우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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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는 꽤 오래 함께 살았다. 그들이 함께 산 집은 어느 후미진 공네의 흔히 널린 옥탑방 중 하나로, 방 한 개에 화장실 하나와 창고 겸 옷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그녀는 고등어를 팔아서 월세를 냈다. 그는 집에 있었다. 그녀가 집을 나서면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채웠다. 꿈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누군가가 꿈에 나왔다. 집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행복한 꿈이었다. 소소한 일상을 한 스푼 덜어 내어 그대로 꿈 속에 섞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그녀를 반길 준비를 한다. 그의 하나뿐인 신발, 그녀가 사 주었던 신발은 얌전히 닦여 방 한 구석에 놓여저 있다.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신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다. 나가자. 산책 가자. 그는 오늘을 위해 신발을 아꼈다. 코트에 팔을 꿰어 넣는다. 손이 마주잡힌다. 신발은 꼭 맞았다. 그와 그녀는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밤 달빛이 셌다. 


그는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나고, 신발이 아직도 신문지에 잘 싸여 있는지 확인한다. 그녀는 산책을 가자고 말 한 적이 없었다. 가끔 같은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그의 코를 톡톡 두드리며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바깥에는 말이야, 이러저러한 게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한 창문이 되어 주었다. 그녀에게서는 대부분 고등어 비린내가 났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그녀 자신의 바깥세계 대부분이 생선 판매대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이야깃거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오늘 도매상에서 비닐봉지 네 개를 받아들고 걸어가는데, 또는 매상을 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그는 가끔 물어보았다. 손님은? 어느 날 이렇게 묻자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너무 피곤하니까 어느새 잊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음, 하고 눈을 굴렸다. 걔들은 돈을 주고, 나는 생선을 주고. 그게 다야.  그녀는 본전을 치기 위해 열심히 생선 머리를 쳤다. 그는 새 신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오늘은 문이 잠깐 열렸다 네가 방 안을 다급히 둘러본다 허망하고 공허한 표정이다 너는 몸을 들어 아, 하고 한 마디를 내뱉는다 너는 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 나는 다시 웅크린다 이 꿈은 언제쯤에야 끝이


집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그는 부스스 잠에서 깬다. 그녀는 짐을 문가의 서랍장 위에 내려놓고 신발을 벗은 뒤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걸어가 찬 손을 마주잡았다. 이것 봐, 차갑잖아. 그가 말한다. 그녀는 듣지 않았다. 이것 봐, 차갑잖아. 그가 한 번 더 말한다.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입을 꼭 다물고, 그렇게 고개를 자꾸 흔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널브러진 긴 우산이 보였다. 어디 갔었던 거야, 하고 그녀가 말을 꺼낸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문을 열 줄 모르니까. 너도 그걸 알지? 너도? 그는 생각했다. 알지?


그녀는 손에 집히는 물건을 그에게 집어던졌다. 팔고 남은 고등어가 들어 있는 검은 비닐봉지도 그 중 하나였다. 날아가는 봉투에서 미끈한 고등어가 빠져나와 바닥으로 볼품없이 떨어졌다. 그의 발치에 비린 물이 닿는다. 그와 그녀 모두 한참 전에 죽어버린 고등어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얼마 후 이불을 덮고 웅크리며 그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아무 것도. 


그녀의 손을 잡아채어 그만두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녀는 너무 약했다. 그는 점점 더 구석으로 물러났다. 날카로운 접시 조각 비슷한 것이 등을 타고 후두둑 떨어졌다. 목구멍에서 우울한 신음이 끓어 올라왔다. 다가오는 그녀의 등 뒤에 그림자가 졌다. 검은 장갑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형체를 분간하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어째서, 입만 보이는지. 입꼬리가 그림처럼 올라간 그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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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04


따지 않은 통조림이 먼지구덩이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발로 으깼다. 주황색 국물이 단 내를 풍기며 흘러나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것을 소중히 손에 넣었다. 앙리, 이 가엾은 동물을 좀 보지 않겠나. 자네가 이걸 죽였어. 앙리는 내 곁에 쪼그려 앉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통조림을 땅에 묻었다. 그의 영혼에 안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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