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


밤새 비가 왔다고 한다면 허울 좋은 거짓이다. 비는 어둔 밤이 아니라 아침에 왔다. 12시 쯤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게 무어냐 하면…김우진. 요즘이 장마 철인 건 알지, 잘 알지, 그래, 좋아. 어젠 비가 내리지 않아서. 12시를 알리는 시계가 종을 뎅 울리고 나는 잠자리에 들어 이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어머, 날짜가 하루 또 넘었군. 정확하게. 어머, 넘어갔어. 이제 밤 내내 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어제 하루를 꼬박 걸렀으니. 나 윤심덕에게 쩍쩍 갈라지는 여름날 오전을 선물한 자연이여, 이제 빚을 갚을 때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비웃지 말아, 김우진. 넌 이걸 비웃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말이지, 창백한 아침 해가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아침에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지는 것을 기어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이상하게도 네게 뭔갈 써 보낼 맘이 생기더군. 이유는 별 거 없다. 네게 어떠한 하나의 이미지, 뚜렷한 영상을 떠올리게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네 희곡집을 하나하나 태우던(그래, 그 안에 들어 있는 네 낯뜨거운 연애 편지까지 포함해서)초록 옷의 여인, 윤심덕을 네 눈 바로 앞에 우겨넣기 위해. 밤 잠 못 이루는 여인을 그려 봐. 나이와 용모는 네가 아는 대로. 너무 잘 아는 대로. 눈 앞에 극장을 그리고 가구와 소품을 그리고 여배우의 동선을 짜. 몇 막 몇 장인 것 까지는 내 알 바 없고. 아, 이 장의 부제는 이게 좋겠어. 무엇이 그녀를 괴롭게 하는가. 난 이 부제가 네 그 고운 필체로 만년필에 의해 쓰여지는 게 보고 싶어. 그걸 쓰고 난 다음의 네 표정도 보고 싶고. 좀 더 눈을 감아, 김우진. 뭔가를 제대로 회피하고 싶다면 말이야. 겁 많은 사람 같으니.


김우진. 네 이름을 쓰는 것은 딱히 즐겁진 않지만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끌어안고 싶고 그 채로 네 이마에 총을 탕 겨누고 싶다가도 그 다음엔 또 차갑게 우그러진 네 시체를 끌어안을 생각을 한다. 너는 내 낫지 않는 상처이자 효능 없는 약이다. 그러나 사실 말이지, 그 상처가 낫지 않게 헤집는 건 나 자신이노라, 여배우 윤심덕이 말하다. 방금 좀 어느 나라의 황제 같았는데. 이것이 바로 배우의 자랑거리지. 


김우진. 밤새 태워진 네 책은, 네가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로 태어난 최고의 과실들은 연기가 되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들은 형체가 없었다가, 내가 바라보자 형태를 갖추어 내 심장을 끄집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앉았다. 그러나 멍청한 뇌는, 이 덩어리는 아직 그걸 몰라. 아직도 제 심장이 산 자의 그것처럼 붉게 펄떡펄떡 뛰는 줄로만 알지. 심장은 한숨을 쉬고 말해, 멍청한 것아, 나는 이제 너와의 연을 끊겠다. 윤심덕을 움직이는 것은 나다. 자, 이렇게 윤심덕의 심장은 홀로 윤심덕을 조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능의 완벽한 승리이며, 총의 장전을 막던 마지막 마지노선의 종말이었지요. 둘이 아닌 하나로 다시 태어난 여배우의 회색 연기빛 심장. 아, 김우진, 너는 날 움직이게 해. 그것이 증오이든 사랑이든, 무엇이 대수이냐. 


1926년 


윤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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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낮공 꽃안웅 보고 나서…사찬 정말 좋다 심덕언니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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