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퇴고따윈 안 한다네



린신은 그 때 이어폰을 낀 채 문자 메세지를 읽고 있었다. 그 옥으로 장식된 벽시계를 살 수 있을까요? 붉은 숫자를 흘깃 올려다보며 자판도 보지 않은 채 답장을 입력했다.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후렴구의 기타 리프가 정신없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이 아니라 큰 종이 박스의 산이 보였다. 린신은 왼쪽으로 몸을 피해 인부가 종이 박스를 무사히 끌고 나갈 때까지 버튼을 누른 채 기다렸다.

박스와 남자가 멀어지자 엘리베이터에 홀로 올라탄 린신은 15층을 누르고 옆에 있던 거울을 무심히 보았다. 피곤에 절은 눈이 이쪽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어폰 잭을 잡아뺀 뒤 메세지를 하나 더 보냈다. 

[그걸 고치는 데에 10년이 걸렸습니다.]

기술적으로 어려웠다기보다는, 급할 게 없으니 느긋하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의뢰인은 시계를 맡기고 한 달 뒤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로 죽었다. 린신의 집 안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렇듯 나무로 만들어진 벽시계는 모서리에 좀 하나 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하게 무언가가 어긋나 있을 뿐이었다. 린신은 그 정지된 평온함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돌연 마음을 고쳐먹고 먼지를 턴 뒤 작업에 들어간 것이 한 달 전이다. 

'하지만 내가 10년이라면 10년인 거다.'

사실 십 년이나 일주일이나 그에게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시계는 어제 죽었고 오늘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골동품점 입구께에 그것을 걸어 두었다. 그는 그 배치에 만족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 때 까지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차가운 저녁 바람과 함께 자동차 경적 소리가 메아리져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오전에 집을 나설 때 창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신발을 대충 던지듯 벗고 길게 하품을 하며 거실로 갔다. 어둑한 와중에 형체 하나가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는 턱을 긁으며 스위치를 올렸다. 자고 있는 매장소였다. 

스위치를 내리자 거실은 다시 어두워졌다. 린신은 대충 벗어 품에 껴안고 있던 외투를 다시 걸치고 아무렇게나 내던진 구두 대신 슬리퍼 두 쪽에 발을 밀어넣었다. 문이 등 뒤에서 세게 닫혔다. 복도를 가로질러 아직도 15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에 탄 린신은 1층을 누르고 아무 생각 없이 다시 거울을 흘끗 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크서클이 짙게 깔린 눈과 마주친 그는 거의 튕겨나듯이 밖으로 나갔고, 외투를 여미고는 아무도 없는 밤 거리를 광인처럼 발 닫는 대로 걷다가 문득 우뚝 멈춰섰다. 

가로등에 나방이 자꾸 몸을 박고 있었다. 

그는 나방을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몸을 돌렸고 한 시간 동안 걸었던 거리를 30분 동안 정확하게 되짚으며 달려나갔다.

"장소!"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고 비밀번호를 틀리고 나서야 겨우 들어간 집 안에서 린신은 소리를 질렀고 거실 쪽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왜, 하는 대답이 들렸다. 

린신의 시야에 졸린 기색이 역력한 매장소가 들어왔다. 그는 린신을 보더니 길게 하품을 했다. 

"신."
"너..."
"응."
"잘 자."
"알았어."

린신은 더 말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기절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매장소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린신의 침실 문을 열었다. 구겨진 외투를 몸 밑에 깔고 괴상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린신이 보였다. 매장소는 다시 하품을 하고는 외투자락을 당겨 빼낸 뒤 린신의 몸 위에 대충 덮었다.

"늦었잖아."

-

가늘게 눈을 뜬 매장소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린신이 제 몸을 덮고 있던 두꺼운 이불에 막 손을 대던 참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매장소가 물었다.

"아침은 보통 언제 먹어?"
"장소."
"응."
"말할 게 있어."
"해봐."
"사랑해."
"응."

매장소는 다 안다는 듯, 혹은 아무 말 말라는 듯 팔을 벌려 친우를 안았다. 린신은 30분 정도 그 품 안에서 흐느낀 뒤 벌게진 눈을 하고 후라이팬 위에서 계란을 세 알 깼다. 투명한 흰자가 점점 희게 굳으며 퍽퍽 터졌다. 뒤를 돌아보자 마호가니 식탁에 걸터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매장소가 보였다. 린신은 꼴사납게 코를 훌쩍인 다음 "정말 꼴 사납네..."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네가 언제 내 앞에서 멀쩡했던 적이 있었나? 린신은 결국 계란 프라이의 밑바닥을 태워 버렸다. 매장소는 큰 유리컵에 우유를 가득 따랐다. 린신이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50초 데웠다.

"고소한 냄새가 나."
"그러네."
"따스하고," 

린신은 차가운 우유를 마시고 덜 익은 노른자를 수저로 조심스레 떠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린신은 접시를 정리한 뒤 매장소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린신의 손길을 받으며 매장소가 고르게 숨을 쉬었다. 문득 린신의 손이 머리카락에서 매장소의 가슴께로 향했다. 매장소는 잠시 린신을 바라보다가 이내 숨을 크게 서너 번 쉬었다. 린신은 천천히 손을 다시 매장소의 귓가로 가져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었다.

"어때?"
"아주 좋아."
"이제 일주일 동안 뭐 하고 싶어," 하고 매장소가 말했다. 린신은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발끝에서부터 저릿하게 올라왔다. 변하지 않는 골동품들의 녹과 먼지와 가루는 모두 그의 심장에 날아와 달라붙어 있었다. 

"장소."
"응."
"한번만 더 안아줘."

그들은 토요일 자정이 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

(린신의 인생에 있었던 수많은 A씨들 중 하나인)A씨는 고대사에 대한 책을 한 권 찾으러 왔다가 카운터에 앉아 커피를 후후 불고 있는 키 큰 남자와 마주쳤다. 누구세죠, 하고 묻기도 전에 카운터 오른쪽의 책 더미 사이에서 예의 가게 주인이 연하늘색 앞치마를 두르고 나타났다. 아,

"친구입니다."
"예에..."

A씨가 내민 종이 쪽지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들여다보던 린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A씨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지독한 악필이시네요."
"됐고 책은요?"
"저기요." 린신의 긴 검지가 정확히 한 지점을 가리켰다. 회색 종이 달린 입구의 바로 옆 더미였다. 책 더미 위에는 벽시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주인장과 미지의 카운터 친구를 뒤로하고 먼지가 날리지 않게 조심하며 가게를 가로지르던 A씨가 문득 린신에게 물었다. 이 주 전의 대화가 기억난 탓이었다. 

"B가 연락했나요?"
"며칠 전에 했죠." 
"실망했겠네요."
"그러시던가요. 백 배를 줘도 안 내줍니다."
"뭐 말이야?" 남자가 말했다. 
"저거."
"흠." 남자는 딱 두 번 입을 열었고 그 뒤로는 어떤 장르에 흥미를 빼앗겼는지 카운터에서 일어나 가장 높고 깊은 책 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A씨가 먼지투성이 책을 들고 린신의 눈 앞에 흔들 때까지 린신은 그 뒷모습을 홀린 듯 쫓고 있었다.

"아, 맞다."

린신은 대충 돈을 받고 대충 책을 다시 넘겨준 다음 대충 A씨의 등을 두 팔로 밀며 콧노래를 불렀다. 사실 팻말 뒤집는 걸 잊었지 뭡니까, 예? 다음 주까지 안 열어요, 예? 안녕! 문이 닫히고 의외로 얌전히 '끌려나온' A씨는 한숨을 쉬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린신은 문을 걸어잠그고 벽시계를 흘긋 본 다음 조심스럽게 떼어내 옆구리에 꼈다. 

"주인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책을 읽던 매장소가 고개를 들어 린신을 올려다보았다. 
"죽었어."
"언제?"
"몰라."
"좋은 사람이었나?"
"기억 안 나."
"아름답네."
"아름답지."

두 사람은 개구리를 잡은 어린 소년들처럼 엎드려 턱을 괴고 바닥에 눕혀 놓은 벽시계를 이리저리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별안간 시계의 작은 나무 문이 양쪽으로 젖혀지며 붉게 칠해진 톱니를 내장처럼 내보였다. 딸꾹질 같은 소리가 열네 번 울렸다. 흰 옥 날개를 가진 옥 나비들이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왜 안 판 거야?"
"모르겠어."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상관없어. 자네가 원하면 팔게." 
"그럼 내가 사지."
"좋아, 좋아, 마음대로 해."

언제든 저걸 가져가도 좋아, 언제든지, 그러면서 린신은 시계를 저만치 쓱 밀어 버리고는 매장소에게 다급하게 입을 맞췄지만 자꾸 웃음이 나와서 결국엔 얼마 못 가고 멈추고 말았다.

-

린신은 참 많은 곳을 매장소를 데리고 돌아다녔는데, 곁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돌아볼 때마다 조용한 기쁨에 온통 사로잡혀 그대로 길 한가운데에서 멈춰 버리고는 했다. 그들은 연극을 두 편 봤고 영화를 한 번 봤고 공원을 아침저녁으로 산책했으며 집에서 라자냐를 구웠다. '휴가' 라고 쓰여진 종이를 문 밖에 붙인 채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소우주의 골목을 몇 번이고 돌며 매번 새로운 오래된 책을 찾아내 토론했다. 

-

솔직히 일주일은 1초와 똑같았다. 린신은 나흘 째 되던 날 자신의 선택을 내심 후회했다.

-

믿기지가 않아,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이 탄식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자네 곁에 있을 건데 뭘 그러나, 매장소가 라자냐를 길게 늘이며 말하자 린신은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이라도 고맙네, 라고 말했고 그날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

-

결국 계약은 어떻게든 깨진다. 사실은 계약서에 나온 대로 문제 없이 만료되었지만, 린신에게는 어떤 방법이든 고통스러웠다. 

-

매장소는 신발을 신었다. 찬 기운이 감도는 신발장의 센서가 돌연히 켜졌다. 린신은 동상처럼 그를 배웅하려 서 있었다.

"안녕." 매장소가 말했다.

"괜찮겠어?" 매장소가 말했다. 

"정말로?" 매장소가 말했다.

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매장소가 무거운 금속 문을 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후회하나?" 문이 닫히기 직전 매장소가 웃으며 물었다.
"아니."

-

린신이 문을 열었다.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박스가 가득 담긴 끌차를 붙잡은 채 린신에게 말했다.

"어디 있죠?"
"안방에요. 잠시만요..."

안쪽으로 들어간 린신은 곧 키 크고 가벼운 남자를 품에 안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기다리던 배달원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스티커를 꺼내 박스들 중 하나에 붙였다. 그리고는 남자를 받아들어 박스 안에 조심히 넣고 린신이 보는 앞에서 포장했다. 도와드릴까요, 린신이 물었다. 테이프를 떼는 소리가 요란했다. 

안녕히 계세요,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타자 문이 닫혔다. 

"좋아...안녕."

린신이 속삭였다. 바보 같을 정도로 덧없는 휴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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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꽃꽂이' 로 연성했습니다! 단츄님께 드립니다><)



투명한 막이 부서지듯 매장소가 눈을 떴다. 창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닫으려 팔을 뻗자 길고 흰 소맷자락에서 무언가 천천히 떨어졌다. 꽃잎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응시하다가 손가락을 안 쪽으로 접었다. 좀 더 큰 손이 나타나 형체를 완전히 잃을 뻔한 그것을 빼앗아 갔다. 위를 보자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린신이 있었다. 일어났어, 응, 린신은 얼굴을 찡그렸다. 해가 중천이야.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추듯 창문께에서 빛이 다급히 들어왔다, 그는 거대하고 묵직한 푸른 빛을 잠시 상상했다가 그 위압감에 생각을 멈춘다. 자라고 한 건 자넬세. 린신은 길 잃은 장난감 나무배처럼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탄식 비슷한 소리를 내며 등을 돌려 버렸다. 문을 여는 그의 머리통에 대고 매장소가 무심히 물었다. 그건 자네 건가, 그래, 깨우지 마. 린신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가 가고 난 후 매장소는 창문을 닫고 다시금 잠들었다. 이번에는 며칠 동안 깨지 않았다.

린신이 무심한 손놀림으로 옥으로 만들어진 화병을 매만졌다. 보지 않아도 조각된 문양들을 느낄 수 있었다. 비류가 밝은 창문에서부터 머리를 내밀었다. 아이는 린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직 아무것도 담지 않은 화병을 바라보았다. 비류. 린신이 말했다. 화병 바닥에 뭐가 있는지 알려줄까? 아이는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연 사라져 버렸다. 린신은 낄낄 웃다가 뚝 그쳤다. 손이 점점 차가워졌다. 나쁜 예감이 등뼈에서부터 스물스물 올라와 그의 뒷목에 도사렸다. 열 개? 그가 문득 생각한다. 빈 화병은 계속 비어 있을 것이다.

찻잔이 굴러떨어졌다. 린신이 기침을 했다. 린신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또는 매우 하기 싫은 표정으로 흉한 그것들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나도 알아. 매장소가 대답했다. 더 할 말 없지? 린신이 나직하게 물었다. 없네. 이젠 꽃잎으로만은 안 끝날 걸. 자네는 정말, 정말, 정말 악취미를 가지고 있어. 나도 알아, 나도 안다니까...매장소가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나. 그리고 이번 한 번 만이야.

린신이 또 무언가를 숨겼다. 물론 본인 역시 알고도 남았겠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린신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린신의 목에 손을 대자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턱과 윗입술을 양쪽으로 잡고 벌렸다. 린신, 숨겨도 소용없어, 매장소는 바닥을 나뒹구는 화병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 화병의 주둥이에서 토악질하듯 볼품없이 빠져나온 그것을 하나씩 집어 린신의 목구멍에 넣었다. 린신이 작게 신음했다. 린신, 그가 말한다. 가만 있어. 나는 몸에 힘을 풀었다. 목구멍에서부터 흙이 차올랐다. 놀랍게도 말할 수 있었다. 잘려나간 줄기 밑둥을 삼킨 흙이 서서히 요동친다. 나의 말은 줄기를 거쳐 결국 꽃으로 나왔다. 장소. 내가 다시 틔워낸 꽃. 나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말하고 또 말하고, 속삭이고, 삼키고, 전날 밤엔 다섯 송이를 삼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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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 님께 드립니다.



보인다, 보이지 않아,
어느 쪽이 옳은가? 어떤 이는 보이는 쪽이 옳다 하였다.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쪽이 옳다 하였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소경염은 잠시 고민한 뒤 답을 말하고는 모든 이의 얼굴을 쓱 바라보았다. 모두 빠짐없이 만족한 듯 웃고 있었다. 소경염은 그들의 입이 괴이할 정도로 벌어지는 것을 보고 몰려오는 한기에 몸을 떨다가 잠들었다.

​그곳은 거울 속이야, 황제가 말을 걸었다. 이제 그만 나오려무나.

​끝나는 게 싫다면 살지 않으면 돼, 스물 한 살이 된 7황자 정왕 소경염은 비둘기와 쥐가 소곤대는 소리로 그의 친우가 매령이 아닌 다른 곳으로 기어가 거둬졌으나 곧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알 수 없을 때 죽었다. 그 후 경염은 어떻게든 살았다. 그 무거운 현실을 등에 지고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조금씩 떼어내어 씹어 삼켰다. 서른 살이 넘어가자 밤마다 황제의 검은 옷을 입은 또다른 소경염이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너 또한 외로움에 잠기는구나, 그 편지를 보낸 것은 나다. 임수의 죽음을 목격하셨는지요, 목격했고말고, 아이야, 독은 어쩔 수 없는 독이란다. 아아, 이제는 그만두자. 사는 것이 끝없는 지옥이로구나. 절대로 오지 않을 매장소의 끝을 위해 잔을 들자. 그들은 마주보고 술잔을 바닥으로 기울여 버렸다. 황제 소경염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 꺾이더라도, 그 때란 언제입니까, 황제 폐하, 과거입니까, 혹은 미래, 그 때 꺾이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혹은 그 때 꺾이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혹은, 폐하, 이제 주무셔야지요, 밤은 차고 길어요, 가지 말아라, 불면의 밤이 나를 괴롭히는구나, 햇수를 아느냐, 모릅니다, 몰라야 한다, 모두가 알아도 너는 몰라야 한다, 폐하, 폐하는 평생 꺾이실 운명입니다, 폐하는 점점 꺾여나가 결국 바닥에 들러붙으실 겁니다, 그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시겠고, 아아,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나는 네게 미래를 주려고 했었어, 그거 아니, 여러 가지의 미래를 생각해 봐, 나는 네게 그걸 주려고 했었는데, 기억하니, 폐하, 밤은 차고 길어요, 이제 주무세요

​혹시 거울을 좋아하시는지? 이건 아주 대단한 거울입니다, 이국의 가면을 쓴 자가 말하고는 비단 장막을 끌어내렸다. 소경염은 거기서 한번에 세 명 그리고 다섯 명의 자신을 볼 수 있었고 구부러지고 늘어지고 뒤틀린 자신 역시 볼 수 있었다. 소경염은 길게 웃고는 큰 장막을 품에 끌어안은 사내에게 큰 보화를 내렸다.

소경염은 적막한 봄의 소택을 즐겁게 거닐었다. 소택의 매화 향은 맡아도 맡아도 끝이 없었다. 그의 어린 호위는 매화를 좋아한다. 매화 향의 남자, 매화줄기 같은 남자. 소경염은 손에 상처가 나는 것도 잊은 채 꽃이 가득 들러붙은 나뭇가지를 마구 꺾고는 아직도 물이 차 있는 연못으로 발을 옮겼다. 선생, 매화가 참으로 아름답구료, 매화 철이로군요, 아, 선생 나는 그대는 나는 나는 이건 당신을 위한 매화 가지요 ​이제 가라앉아 주지 이제 안녕히, 물 속을 헤치다 보면 그대를 다시 만날까.

​녹아 내리는 손 끝을 물에 담그자 붉은 액체가 돌연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상처가 꾸덕하게 굳기까지는 작은 연고 통과 며칠이 더 필요했다. 경염에게는 아직 둘 다 없었다. 어쩌면 이 손을 잘라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갑자기 시작된 그의 천한 번째 속죄가 절정으로 치달을 것이다. 경염. 상처입은 물소가 늪에 빠져 죽은 것을 보았어. 임수가 소리친다. 꿈에서 말이야. 나흘 뒤가 길일이라는구나. 경염, 상처를 늪에 담그면 어떡해. 늪에 빠져 죽을 셈이냐! 경염은 그 말을 들은 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빼낸다. 잘 했어. 임수가 멀어져가며 또 외쳤다. 난 간다. 피가 퍼진다. 자세히 보니 흙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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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입니다.
​*약한 고어 묘사가 있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Z의 동생은 문을 열자 구식 타자기 자판에 얼굴을 묻은 채 죽어 있는 그의 누나를 볼 수 있었다. 옆에는 텅 빈 원고지가 반듯하게 놓였다. Z와 동생이 사는 5층 빌라는 벽 두께가 부실해 평소 원성이 자자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동생은 성악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다. 먹을 잔뜩 머금은 붓이 호를 그리듯 비명이 쏟아졌다. 바로 옆의 큰 길을 지나던 모 일간지 기자는 가방을 갈무리하고 급히 노선을 틀어 더러운 유리 문을 열어제꼈다. 모르겠어요, 워낙 조용해서, 최근에 뭐가 그렇게 갑갑한지 미친 사람처럼 벽을 두들기던데요, 누가 가끔 찾아와서 한참 얘길 하다 갔는데 모두 뭔갈 독촉하는 내용이었죠, 다음 날 오전에는 집필 중 사망한 30대 초반의 무명 작가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기자는 빛을 보지 못 한 문인들의 생활고에 대해 덧붙이고는 글을 마무리했다. 몇 시간 후 반박 기사가 떴다. 비주류 장르문학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인식을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두 기자는 며칠 후 모 메이저 방송사에서 주관한 대토론회에 나가 서로를 열심히 비난했다. 해당 사건을 다룬 수많은 기사들은 Z의 사인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너무 잔인한 것에는 검열이 필요했다. 암묵의 룰이었다. 부검의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인터뷰에서, Z의 얼굴에서 자판 하나하나를 떼어내는 것은 그들의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아주 막막한 기분이었다고 밝혔다. 정확하게는, Z는 죽은 뒤 허리가 꺾여 타자기에 얼굴을 묻은 것이 아니라 타자기로 얼굴이 완전히 빨려들어가 죽은 사람 같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 끔찍한 사인을 안 것은 부검의들의 주저하는 인터뷰가 나오기도 한참 전이었다. 어떻게든 소문은 났다. Z의 동생이 누나의 사체를 보고 넋이 나가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어이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사거리 전체에 쭉 퍼졌다. 사람들은 주문을 읊듯 말했다. 얼굴이 타자기로 빨려들어갔대. 어린아이마저도 어른에게 그것을 물었다. 정말로요? 어른들은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계속 반복했다. 빨려들어갔어. 청소기처럼? 그래. 얼마 뒤에야 그들은 아이들에게 못 할 말을 해줬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단지 무언가 넋이 나간 모양새로 아이를 안고 어르는 것 뿐.

한 달 뒤에 이번에는 젊은 남자 하나가 죽었다. 신체 부위를 발견한 것은 그의 연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너무 긴 여백이 있었다. 그들은 두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거나 울거나 또는 서로를 어르고 달래느라 진이 빠졌다. 먼저 놓아버린 것은 상대방 쪽이었다. 이제 그만 좀 끊자는 대답이 전화선을 통해 귓가로 비수처럼 박혀오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뜨거운 화가 그의 뱃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는 전화기에 대고 악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죽어 버리라는 저주만은 입 밖으로 내뱉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귓가에서 폭탄 같이 터지는 비명에 전화기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플라스틱 이음새가 부서지며 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마치 로드킬 당한 작은 동물처럼 보이는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작게 뚫린 구멍들 안에서 피가 울컥 쏟아지며 깨진 부분에서 눈알 하나와 귀 하나, 그리고 긴 혀가 굴러떨어졌다. 그의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 빠진 신체 부위들이 아주 멀리 떨어진 아파트의 속이 빈 전화기 안에 어떻게 끼어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눈만 마주치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은 문틈이 자신을 동강낼 까 두려워했고 손잡이가 목에 박힐까 두려워했고 손톱깎이가 피부를 찢어버릴까 두려워했고 펜 다섯 개가 위장 속으로 들어갈까 두려워 모든 종이와 펜을 숨겨두었다.

린신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린신은 어느 날 새벽 들것에 실려 옮겨진 환자를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옆에서 간호사 하나가 휴지통을 낚아채며 토하고 있었다. 린신을 비롯한 의사들은 최선을 다했고 환자는 통조림들과 함께 죽었다. 린신은 집에 가서 매장소의 곁으로 파고든 다음 습관적으로 손목을 만져 보고는 역시 습관적으로 코 밑에 손을 대었다. 매장소는 곤히 잠들어 일어나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끄려던 린신은 문득 탁자 위에 필기구 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위 하나와 볼펜 세 개와 자 하나, 얇고 긴 지우개, 그리고 잉크가 말라 버린 형광펜 하나가 들어 있었다. 린신은 가위를 꺼내 서랍에 넣고 조용히 열쇠로 그것을 잠갔다가 1분 뒤에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통에 든 모든 것을 다 털어넣고 다시 잠갔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매장소가 그를 돌아보았다. 손에는 동그란 탁상시계가 들려 있었다. 린신은 그와 눈을 맞춘 채 가볍게 까슬한 볼에 키스한 후 그의 손에서 시계를 넘겨받았다. 혹은 뺏어갔다. 린신은 그가 아침식사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가려 할 때 충동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앉아. 매장소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어쨌든 그는 고분고분하게 식탁에 앉았고 린신은 접시에 식사를 담은 다음 미루고 또 마루다 마지못해 젓가락과 수저를 내밀었다. 넘겨주는 손끝에서 정전기가 일었다. 매장소가 살짝 손을 뺐다. 린신은 수저를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왜 이래, 매장소가 웃었다. 린신은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급하게,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어, 하고 물었고 매장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뉴스가 그들이 할 말을 앗아갔다. 카메라가 활짝 열리는 병원 문을 비추었다. 린신의 병원은 아니었다. 뉴스가 끝난 뒤에는 공익 광고가 나왔다. 그들은 TV를 껐다.

매장소가 무슨 짓이야, 하고 물었을 때는 이미 뭔가가 꽤 진행된 뒤였다. 사실 둘 중 누구도 이것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린신, 최소한 벽지라도 바꿔 줘. 흰색이 어때서 그래, 깔끔하고, 린신은 이 말을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매장소는 웃지 않았다. 그의 눈이 어지러이 방 안을 훑었다. 아무 것도 그를 잡아끌지 못했다. 그의 흥미를 돋굴 수가 없었다. 린신, 펜이라도 좀 줘. 종이도 같이. 그는 오늘도 이뤄지지 않는 부탁을 한다. 린신은 차분히 거절한다. 무슨 생각을 했어, 하고 묻는다, 매장소는 웃는다. 곧 죽을 거라는 생각. 린신이 약을 먹였다. 린신이 물을 먹였다. 린신이 컵을 가져갔다. 린신이 방을 나갔다. 린신이 다시 들어왔다. 린신이 약을 먹였다. 린신이 약을 가져왔다. 린신이 약을 내밀었다. 린신이 약을, 치료를 위한 치료, 해방을 위한 감금, 매장소,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마, 하고 그가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치자 스프링이 울부짖었다. 방은 아직도 새하얬고 안에는 린신과 침대와 매장소와 약과 물컵이 들어 있었다. 린신, 죽게 해 줘. 무슨 생각 해? 죽는 생각. 어떻게? 린신은 방을 나갔다. 그는 그날 밤 매장소를 껴안고 잤다. 꿈에서 침대가 그를 혼자 남겨두고 매장소를 푹 꺼진 매트리스 안으로 삼켜 버렸다. 어린아이 같은 악몽이야, 그가 생각한다. 유치하고. 그는 자신을 약간 자책하며 종이와 펜을 넘겨주었다. 매장소는 종이의 구석에서부터 작은 패턴을 세밀하게 채워넣었다. 린신은 그 종이가 빽빽히 채워지기 직전에 그것을 뺏어서 주머니에 넣어 버렸고 매장소는 쓸쓸한 표정으로, 내 취미였는데, 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린신은 문을 열고 바닥에 웅크린 채 죽어 있는 매장소를 발견했다. 그는 매장소가 평소에 했던 것처럼 방 안을 천천히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매장소에게 다가가 습관적으로 손목을 쥐고는 역시 습관적으로 코 밑에 손을 가져다댔다. 매장소는 잠들어 일어나지 않았다. 린신은 약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구두로 밟아서 잘게 부수었다. 그는 하루종일 바쁘게 일했다. 마침내 오후 늦게,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누워 있는 매장소의 주변에 온갖 물건들이 들어찼다. 카페트와 부서진 의자와 매장소가 즐겨 읽던 혹은 손대지 않던 책들과 부서진 전등과 부서진 플라스틱 컵과 펜과 종이 베개 빵칼 그 가위 안경 이어폰 양말과 그 외의 모든 것을 주었는데 그는 그중 아무 것도 맘에 들어하지 않아서 린신은 이젠 제발 그가 하나를 골라 주었으면 했는데 그는 정말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그 자신을 원했고 그 자신을 골라서 자기 자신을 죽였다. 린신은 죽은 매장소를 발견했다. 자넨 언제나 내게 발견되고는 해, 나는 알면서도 자네를 발견하고, 언젠가의 과거에서 매장소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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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tobira_moon)님과 함께 풀었던 썰 중 일부로 연성했습니다. 항상 같이 이야기해주시는 케노님 감사합니다 ><

누군가는 군왕 소경염의 혼이 아는 이 하나 없는 구천을 떠돌 것이라 말한다. 누군가는 소경염이 궁으로 소리 없이 들어와 나무에 아로새겨진 손때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흐느낀다고도 한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증거와 은밀한 이야기를 들이밀었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복화술사처럼 입 없이 말을 옮겼다. 어린 궁녀들은 이유 모르게 밤이 두려워 함께 숨죽여 울었다. 소경염은 부드러운 적색 비단처럼 모두의 눈을 덮었고 덮인 아래에는 고요한 어둠만이 남았다.

열전영이 무언가 쓰여진 종이를 발견한 것은 이틀 전 밤의 일이었다. 그는 펼쳐볼 생각도 못한 채 종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직 채 굳지 않은 물감 같은 기억이 다시금 흉하게 흘러내렸다. 군왕은 전영과 함께 절벽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칼로 멋대로 자른 듯한 절벽들이 맹수의 이처럼 서로 들러붙은 황량한 지형이었다. 그들은 매복 중이었다. 골짜기가 아래에서 위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전영은 드물게 현기증을 잠깐 느꼈으나 입을 꾹 다물고 그것을 견뎠다. 군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영. 예. 참으로 깊군. 그 말은 정말로 무거웠던가, 아니,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웠던가, 전영은 군왕이 부득불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이곳에 온 것이 과연 잘 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전영 역시 그와 함께 같은 나이를 세었고 함께 끝없어보이는 전장을 누비고 또 누볐다. 군왕의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단지 점점 깊숙한 살 어드메로 파고들 뿐이었다. 꺼지지 않는 빛. 적을 베어낼 때마다 그 눈은 두려움을 주면서도 동시에 편안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 빛은 어느 순간에 가장 위태로웠는가, 전영은 다시금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아직이다. 전영이 알겠다 대답하자 군왕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기다리는 것에는 익숙해. 다만...

그들은 해가 진 뒤 골짜기를 피로 물들였다. 군왕이 짧게 소리치자 말이 굽으로 바닥을 짓이기며 머리를 돌렸다. 전영은 그 뒤를 따랐다. 갑옷이 나를 옥죄는 것 같군, 군왕이 말했다.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전영이 말했다. 아니, 아니야. 마무리할 것이 있어. 전영은 그것이 무언지 알고 싶지 않아서, 알 수 있다 해도 거절할 것이어서,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천천히 군왕의 막사를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소경염은 그날 밤 자다가 숨을 거두었다.

전영의 손 안에서 종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매화나무에 대한 짧은 시였다. 전영은 제 몫이 아닌 다과를 훔친 아이처럼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다시금 알기를 거부했다. 그는 무언가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고 또 억누른 채 종이를 화로 속에 던진 다음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글자는 회색 연기로 화해 위로 끝없이 올라간다. 흩어지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어쩌면 흩어지기 전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 하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어 그 재 맛이 나는 글자들을 한가득 마셔버릴지도 모른다고, 열전영은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 남자는 모든 것을 알던 사람이니까. 모든 것을.

여전히 누군가는 궁의 구석진 곳에서 진주처럼 흩어진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궁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는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가장 깊은 복도에서 소곤대다가 혀를 잘렸다. 그래서, 소경염의 생을 관통하는 그리움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 산 자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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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입니다.

오후에 만난 소경환은 꽤 졸려 보였다. 따듯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품을 했다. 우리는 볕 좋은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앞에 내려놓은 요거트 망고 스무디에서 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춘곤증 같네요, 봄도 아닌데요. 나는 웃으며 내 몫을 조금 끌어당겼다. 경환은 세상에서 제일 쓴 커피만 세 잔 연속으로 들이부어도 멀쩡할 것 같은 이미지인데 실상은 망고와 요거트 둘 다 포기할 수 없어 망고요거트를 먹는 단 것 마니아였다. 경환이 조금 멍한 얼굴로 스무디를 먹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퍽 귀엽다는 생각에 웃어 버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뇨, 단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요. 내가 말했다. 혹시 초콜릿 같은 것도 좋아하세요? 그의 눈이 잠시 동그래지더니 이내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좋아합니다. 영문을 모르겠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좋아하니까, 그러자 그는 거의 나무 테이블에 이마를 박을 기세로 얼굴을 묻고는 격렬하게 스무디를 먹기 시작했다. 잠이 깨셨나 봐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고개를 언제쯤 들까,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경환의 입에 요거트 크림이 묻어 있었다.

실례고 뭐고 모두 날아가버린 채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그가 영문을 모를 차례다. 나는 미소를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휴지를 몇 장 가져왔다. 경환은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팔을 뻗어 휴지로 그의 입가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입에 크림 믇으셨어요. 그래서...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경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스무디를 들고 바깥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나는 그의 가방을 챙기고 같이 뒤따라나갔다. 경환은 카페 문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다가 스무디를 목구멍에 붓다가 울다가 웃다가 다시 머리를 뜯다가 아주 난리를 치고 있었다. 경환 씨.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져 있어서 또 웃어버릴 뻔 했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괜찮으세요? 그럴 수도 있지요, 저도 크림 얹어진 것 마실 때면 매번 입가가 엉망이예요. 그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네, 그래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마저 들어가서 침착하게 다 마시고 일어납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가 이끄는 대로 다시 카페 안으로 끌려들어왔다. 그는 정말 춘곤증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부드러운 꿈 속에 빠진 듯 보이는 남자, 무언가 행복한 상상 중인 멍한 남자, 소경환.

​*현대 AU입니다. ​퇴고 안함 주의...

어라, 친구랑 키스중이네, 어라, 친구랑 손 잡고 걷는다, 어라, 이거 이래도 되나. 되겠지. 그와 관련된 일이면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려서, 그리고 그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아서 우리는 매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자주 만나다가 5년째 되는 날에 만나러 가기 위해 신발을 신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집을 합쳤다. 책 때문에 꽤 복작했던 이삿날의 밤이 다가오고 우리는 반 정도 남은 책 더미를 포기한 뒤 먼지 묻은 옷을 갈아입고 가까운 뷔페로 저녁 먹으러 갔다. 다녀와서 기절하듯 침대에 함께 엎어진 뒤 다음 날 아침 꽤 많은 책들을 다락방으로 올려보냈다. 다락방에서는 나무 냄새와 뭐라 말할 수 없는 좋은 냄새가 났고 우리는 그 곳을 아늑하게 꾸민 다음 가끔 올라가서 책을 읽었다.

린신. 린신, 린신...그냥 불러 봤는데 그가 뜻밖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이래, 너.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매장소.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잊어버린 물건의 위치를 알아차린 그 순간처럼, 또는 아무렇지 않게 호흡하는 것처럼 내 이름을 부르고는 나를 안고 입맞추었다. 입술을 떼자 배가 고파졌다. 밥 먹자. 그래서 조금 일찍 점심을 먹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가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빨리. 그의 품에서는 매번 기분이 좋았다. 주치의랑 사는 게 얼마나 좋은데. 나는 또 웃는다.

린신과 처음으로 키스한 건 그와 아주 크게 싸웠던 날이었다. 나는 맨발에 대충 슬리퍼를 끼워 신고 그의 집을 나왔다. 딱히 어떻게 되든 상관 없는 애들은 아직도 그의 소파에서 맥주 캔을 마지막 방울까지 먹겠다는 일념으로 빨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리가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 한 것처럼 행동했다가 결국 좀 꺼지라고 미친 사람들처럼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서 내가 나간 것이다. 여름이라 더웠는데, 나는 어지러웠다. 나는 조금만 더워도 현기증이 쉽게 났다. 공기가 눅눅해서 혀로 입 안을 자꾸자꾸 훑었다. 점점 길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차가운 그 무엇이든 좋으니 누가 나를 구원해줘, 이 아름다운 여름 밤에서 나를. 나는 길 한가운데에서 아이처럼 울다가 1분 뒤에 눈물을 닦고 은행이나 편의점, 어디든 냉방이 되는 곳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린신이 쫓아왔다. 매장소. 그가 나를 붙잡는다. 어디 가려고. 나는 멍하니 저만치 떨어진 편의점을 발견했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그곳으로 끌고 들어간 다음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하나는 내 입으로 들어갔다. 넌 왜 안 먹어. 그거 빨리 먹기나 해. 왜. 다 먹으면 이것도 그 고집 센 입에 집어넣을 거라서. 나는 헤헤 웃으며 아직도 눈물 맛이 나는 하드를 쭉쭉 빨았다. 다 먹고 나서 그냥 니 껀 니가 먹으라고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린신은 따라나왔다. 린신. 왜. 키스할래?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린신은 결국 그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고, 그날의 키스에서는 내 아이스크림 맛만 났다는 사실이며, 또한 너무 길어서 숨이 막혔다는 것. 그뿐이었다. 우리는 그 다음부터 자주 입을 맞췄다. 중독 수준이었다. 아무도 없고 눈이 마주치면 그랬다. 우리 잘래? 린신이 그러다가 말해서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고 난 다음 날 별 것 아닌 걸로 싸우다가 한 시간 만에 화해했다. 우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서로만 보면 어린 십대들처럼 군다. 나는 그것에 만족한다. 나쁠 건 아무것도 없다.

새벽 네 시에 깨어난 린신이 옆자리에서 열심히 눈물만 줄줄 흘렸다. 푸르스름한 빛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악몽이라도 꿨어? 손바닥으로 눈물을 슥슥 닦아 주었다. 그가 내 손바닥을 잡고 오목한 곳마다 입술을 가져다댔다. 간지러웠지만 참았다. 그러고 나서 그가 다시 울었다. 그만 울어, 린신. 꼴 사납게. 네가 울다 푸스스 웃었다. 네가 가버리는 꿈을 꿨어. 그럼 잡아, 왜 안 잡고 그래. 널 잡는다는 건 널 보낼 수 있게 된다는 뜻이야. 그게 뭐야, 이해가 안 돼. 널 잡아두지 않는다면 넌 절대로 떠나지 않겠지, 한번도 잡힌 적이 없으니까, 알겠어, 알았으니까 일단 그만 울어, 응? 키스할래, 린신? 린신? 널 잡은 다음에는? 내가 널 꽉 붙들 수 있을 것 같아? 날 떠나지 않게? 린신, 진정하고, 나 봐. 날 보라고. 네가 있어서 이 정도로 살아갈 수 있는 게 내 지금 상태야. 내가 왜 친구랑 주치의를 동시에 걷어차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자 그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매장소. 응.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응. 자자. 그래. 그를 안고 머리를 토닥였다. 숨이 점점 고르게 변했다.

새해에 그가 나를 꼭두새벽부터 불러냈다. 코트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만나자마자 그가 말했다. 사랑해.

이제 돌이킬 수 없네, 하고 그가 말한다

하늘에서 폭죽이 맥없이 터진다 : 그 어떤 폭죽도 내 몸 속에서 폭발하는 것만큼 거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신경쓰든 말든 아름다웠다.

너를 안아도 될까, 하고 네가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네게 안긴다 안긴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헤어짐을 바라본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다시 만나서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그렇게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영원을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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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랑(@haranging) 님께 드립니다!

눈송이가 눈에 들어가서 눈을 비비고 나니 네가 사라져 있어서 30분 동안 울었다. 앨빈은 집에 들어가서 핫케이크를 접시채로 들고 내 입에 밀어넣었다. 버터가 흐르는 핫케이크는 달았고 어린 내 눈에서 떨어져 입으로 타고 내려간 눈물은 썼다. 앨빈, 그랬었다.

앨빈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책방으로 들어가 아무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집히는 것마다 읽어내려가기 바빴다. 종이에 대충 일주일 정도 영업하지 않는다고 휘갈긴 뒤 문에 붙이고 문을 잠그고 문에 기대고,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하나의 짧은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가장 큰 끝을 향해 천천히, 산책하는 듯한 걸음으로 다가간다. 그 길은 아직도 슬픔 투성이다. 적응하려면 멀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그 길을 동행해줄 것을 안다.

며칠 뒤 책을 읽다 잠들었다. 꿈 속에서 거의 내 앉은 키만큼 쌓인 눈밭 한가운데에 작은 등불 그리고 읽다 만 책과 함께 파묻혔다. 눈으로 만들어진 벽은 단단하게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작은 아지트가 등불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손 안의 책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잠에서 깬 뒤에도 한동안, 틈새 없이 꼭꼭 붙어 있는, 몇 세기만 더 지나면 완전히 화석화 될 것 같은 오래되고 아름다운 책 더미가 단단하게 뭉쳐진 눈더미처럼 느껴졌다. 앨빈, 그거 알아? 네 아버지는 가장 위대한 이글루 건축가셨어...앨빈에게 말한다. 앨빈이 웃는다.


책방에는 잘못 낸 작은 창문이 있대, 앨빈이 소곤거렸다. 앨빈 때문에 귀가 간지러웠다. 근데 책에 묻혀서 안 보인대, 나중에 찾을 거야, 알맞은 책을 골라내는 것처럼, 혹시 모르지, 창문에 대한 책을 쑥 뺐더니 거기에 작고 쓸모없는 창문이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숨어있을지, 책 더미 하나가 우르르 무너졌다. 나는 허리께쯤 오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찾아냈다. 정말로. 그 손님은 내 손바닥 두 개 만 했으며 의외의 인물이 자길 발견해서 정말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힘주어 창문을 열어제끼자 햇빛이 훅 하고 한 줄기 빛을 쏘아보냈다. 책방에는 잘못 낸 작은 창문이 있는데...나는 거기에서 다시 꿈 속의 세계로 빠져들고, 거기에는 날개가 찢긴 나비가 있었다. 그 나비를 어르고 달래 꺼낸 뒤 작은 창문틀에 내려놓자 나비 날개에 달린 큰 눈 같은 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두려워하지 마, 햇빛이 네 눈물을 말려버릴 테지, 나비가 기쁨에 찬 세찬 비명을 지르며 맑다못해 소름끼치는 허공으로 날아가고, 내 폐를 책의 부드러운 냄새와 얼음 같은 바깥 공기가 동시에 뒤섞여 채우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 나비가 바다까지 날아가기를 바랐고, 직후에 그 나비라면, 그 큰 눈을 가진 나비라면 어쩌면, 아니 당연히, 성공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네슈 님께 드립니다 ㅇ0ㅇ)/

아무도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 입에 잠깐 넣었다가 굴려 본 다음 뱉지도 않을, 그런 이름들이 빼곡하게 적힌 작은 종이조각들을 기억하니, 태오 씨, 그만 해요, 아냐, 잠시 저쪽 가서 벽 보고 서 있어,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그는 종이조각들을 눈송이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그중 어느 것도 그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이름은 주인과 함께 묻혔다 조태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최준호가 녹아내릴까봐 그를 뜨거운 불 옆에 두었고 최준호는 무방비 상태로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조태오가 그를 앉혀 두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조태오는 최준호씨와 마주보고 있었다 나도 거기 있었지 최준호라는 이름을 썼었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준호씨는 이제 죽어서 없어 준호씨는 어제 교통사고로 죽었어 우리 준호 씨 준호 씨 무슨 이름이 좋아요 새로 골라 그가 거울을 들이밀었다 누구시죠 누구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 당신도 누군가를 찾고 있군요 혹시 최준호를 찾으시나요? 준호 씨는 죽었어요 미안해요 그렇다면 저는 누구인가 하면 글쎄요 모르겠군요 알게 되면 연락드리죠 안녕 전화를 끊자 어디선가 거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준호 씨 이런 건 이름으로 쓸 수 없어요 왜죠 너무 이상하니까 알겠어요 그럼 김범신 어때요 그 이름이 좋은가요 네 좋아요 그게 좋아요 좋아요 왜 좋죠 모르겠어요 이제 그건 제 것이니까 조태오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반복하며 그에게 매달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범신 씨, 하고 부르자 그가 웃으며 조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사랑스러운 김범신 씨 아냐 이름 없는 나의 연인이여 내가 당신을 한번 더 죽이게 해줘 당신이 선택한 이름을 죽이게 해줘 아니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나는 바라고 있어 당신의 불멸을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건 조태오에게 뼈저리게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김범신을 죽이려면 그를 우선 살려내야 하지 그의 이름은 지독히도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준호 씨 이리 와보세요 그는 오지 않았다


준호 씨 준호 씨는 그냥 간단한 일 하나를 쓸데없이 길게 끈 것 뿐이야 당신은 최준호고 최준호가 아닌 적 따윈 없었어 당신은 모든 사람들이 길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당신과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아무 감정 없이 뜻 없이 당신을 그저 부를 부르기만 할 아무 의미 없는 이름 하나만 대충 말하면 돼 준호 씨의 진짜 이름은 나만 부를 수 있으니까요 알겠어요? 난 준호 씨한테 당신을 온전히 내게만 허락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야 사랑해요 준호 씨 너무 사랑해요 아 지금부터 사랑을 하자 당신과 나와 최준호와, 그렇게


하지만 그 이름은 안 돼, 하고 조태오가 속삭인다 그건 준호 씨를 삼켜버릴 거예요 나의 나만의 나를 위해 존재할 당신을 삼켜버릴 거야 그렇다면 저는 기꺼이 삼켜지겠습니다, 당신은 여느 때처럼 성스러웠다 나는 다음 날 당신을 위한 새 신분증을 가져다주었다 흔하디 흔한 아무 느낌도 의미도 없는 머릿속에서 대강 생각난 이름을 붙였다 그걸 받아든 준호씨의 표정이 어땠는지, 아, 나는

에리님께 드립니다 ><




어젯밤 당신과 함께 걸었지…엄마. 마모루다. 마모루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미소지으면서,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 닫혀 있었던 입이 썼다. 꿈에 네 아버지가 나왔다. 마모루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막 잠이 든 사람처럼 고요히 숨을 쉬었다. 마모루? 내 목소리가 아이에게 닿았다. 담요가 참 따듯하더라. 마모루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나는 에리입니다, 지금은 겨울이고, 12월이며, 또한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며, 눈이 쌓이다가 돌연 잘못된 발걸음처럼 멈추어버린 새벽 한 시의 서재다. 아저씨, 선물이예요. 내가 박스를 내밀었고 그는 뜯는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를 선물을 줌으로써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특별함을 자연스레 받아들었다. 이틀 뒤 서재에서 담요를 몸에 덮고 대충 자고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눈을 떴는데, 꿈 속에서 에리랑 어딜 걸었어, 어디를요, 그러게 말야.



눈이 엷게 깔린 아름다운 오솔길, 우리는 잠시 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함께 오솔길을 걸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로비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당신의 어깨에 눈송이가 녹지 않고 있었다. 아저씨, 눈이 붙었잖아요, 아…눈.



자주 앉던 의자에 올려뒀었어. 알아요. 찾을 책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참 넓더구나. 넓죠. 넓고…집어드니까 말이야, 누가 금방이라도 무릎에 올려뒀던 것처럼 따스해서, 그리고요, 어젯밤 당신과 함께 걸었지…같이 어딘가를 산책했었던 것 같은데…간신히 일정을 맞췄던 기적적인 그 여행이요? 아니, 음, 아니, 글쎄, 그 여행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우리가 몇 번이고 눈이 오는 날 손을 잡았는지, 아, 마모루가 담요를 집었다. 마모루가 한 부분을 가까이 보여주었다. 작은 눈송이가 삭 녹았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저기로 들어왔나 보네요, 마모루가 말한다. 우리는 함께 그 쪽을 얼핏 보았다. 전나무에 흰 눈이 매달려 있었다. 아…. 말은 형체를 잃고 사라진다. 그리운 사람은 입 안의 눈송이처럼 애틋하다.



추워요, 감기 걸리면 큰일나잖아. 마모루가 담요를 단정히 펴서 어깨에 둘러주었다. 기침이 나올 것 같아 잠시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네, 이런. 마모루, 손이 온통 눈 범벅이야, 마모루가,



눈송이…



하고 말했다. 마모루와 내 손이 온통 눈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 조심해요, 손이 녹아내릴지도 몰라. 녹아내리면 뭐 어때, 하고 내가 다시금 웃는다. 아버지가 잡아주는 거야, 녹아내린다면 그것 또한 아름답다. 카페트가 축축해질 거예요…눈 녹은 물로. 지금은 봄이 아니야. 한겨울에는 누구나 조금씩 슬프고 조금씩 추위를 끼고 살며 누구나 무언가를 붙잡으려 안달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억들, 그리고 또 기억,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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