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큰(@tekniwa)님께 드립니다 >~<)/


로봇 하나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잘라내고 다른 손으로는 들고 있던 커피 머그를 곧장 단면에 들이부어 폐기 처분이 되었다. B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주 복도에서 마주쳤다. Q는 매번 뜨거운 김이 나는 머그를 들고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B도 덩달아 고개를 까딱했다. 둘은 서로의 목적지를 몰랐다. 아무 명패도 없는 흰 문을 열 때면 B는 언젠가, 그들이 같은 흰 문을 열게 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Q는 폐기되었다. B는 지나가는 연구원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Q 말입니다. 연구원이 대답했다. 그래, 그 친구. 갑자기 그걸 마셔버리더라고. 마셨다고요? Q는 자기 목을 뜯었어요. 네가 어떻게 알아. 눈 앞에서 봤으니까. 정 헷갈리면 CCTV 확인해. 15-7번. 연구원은 다시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갔다. B는 홀로 남았다. 그에게는 무언가 격렬한 색이 필요했다. 흰색이 아니라. 


몇 시간 후 그가 앞으로 수백 개는 깨트릴 흰 머그의 첫 시작점이 될 그것이 도착했다. 그것은 작은 갈색 상자에 담겨 그가 쓰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B는 상자를 열고 머그를 꺼낸 다음 텅 빈 벽에 내던졌다. 째지는 소리와 함께 도자기가 박살이 났다. 문 옆에 달린 붉은 비상등이 시끄럽게 울리며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들어왔다. 연구원이 말 없이 날카로운 조각들을 가리키자 문가에 대기하던 로봇이 천천히 들어와 남은 조각들을 모두 완전히 으깨고는 주둥이로 빨아들였다. B는 그 후로 자주 멍하니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그 때마다 주로 날카로운 단면을 가진 사금파리를 생각하고는 했다. 그 사금파리는 B의 손목을 베기도 했고 Q의 목을 잘라내기도 했다. Q의 몸 속에 얽혀 있는 전선이 뜨거운 커피를 만나 새까맣게 탔다. 그러나 겉은 멀쩡했다. B는 로봇 두 명이 죽은 Q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목이 덜렁거리는 Q의 눈과 B의 눈이 마주쳤다. Q는 닥터 ------의 사무실로 옮겨졌다. 곧장 폐기되지 않은 것이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B가 Q가 들어간 사무실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Q는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B는 이상 행동으로 인해 검사를 받고 목 위의 대부분을 교체했다. B는 교체 내내 뼈저리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연구원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해. B는 뭘 말입니까, 하고 물었고 연구원은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B는 이제 무기력한데다가 우울하기까지 하다. B는 카운터에 찾아가 정신과 C병동에 가도 되냐고 요청했고 7분 뒤 기각당했다. 혼자 해결해보라는 답변을 얻었다. B는 지독하게 우울했다. B는 잠시 고민하고는 옥상에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Q가 왜 이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널브러진 B의 잔해를 사람들이 수거했다. B는 또다시 조립되었다.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던 연구원에게 다시 물었다. 뭘 말입니까. 연구원은 뜻밖에도 미소지었다. 그래, 더 해봐.


B는 자신이 이상 행동이 모두 기록되고 분석되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들이 그 데이터들로 인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B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연구원들은 일주일 내내 주문 제작된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머그컵 박스를 가지런히 쌓아둔 채 머그 10개를 동시에 짓밟고 있던 B를 발견했다. 연구원들은 또한 옥상 난간에 서 있다가 한참 뒤에 자신의 머리를 떼어내어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닥터 ------의 페라리에 내던진 B(의 몸체)를 발견했다. B는 복도에 서서 지나가는 연구원들마다 붙잡고 Q가 어디 있는지, CCTV 15-7번을 확인하러 갔는데 왜 담당자는 그런 번호의 카메라는 없다고만 대답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연구원들은 그럴수록 더욱 크게 미소짓고는 가 버렸다. B는 Q가 그리웠다. 미치도록 그리웠다. 미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느 날 상자를 열자 Q라고 쓰여진 머그가 나왔다. 그는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그것을 벽에 던질 뻔 했다. 그 특별한 머그는 B의 찬장으로 들어갔다. B는 자주 찬장을 열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스피커에서 연구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B. B. 왜 그걸 부수지 않지? 이번에는 뭐가 다르지? B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물결 위의 파문이죠. 그게 가라앉으면 어떻게 되지? 무슨 일이 새로 생기나? B가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요. 더 이상은 말이죠. B는 그 날 해가 진 뒤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지켜보던 연구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커피를 끓인 뒤 향을 음미하듯 머그를 들어 코에 가져다댔다. 연구원들이 잡고 있던 펜이 부들부들 떨렸다. B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B는 밝은 방에서 깨어났다. 연구원이 그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차트를 톡 두들겼다. B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B는 차트에 뚜렷하게 적힌 실패라는 단어를 곰씹기 시작했다. 


Q가 왜 뜨거운 커피를 목구멍에 들이부었을까? 연구원이 말했다. 자넬 사랑했기 때문이야. 무슨 말씀이시죠? 닥터 ------가 얼마나 웃었는지. B를 사랑해요. 고장난 Q가 말한다. 죽고 싶을 만큼. 연구원이 다시 말했다. 너흰 너무 극단적이야. 왜 그런 지 모르겠다니까. 왜 머그를 벽에 던졌지? Q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B가 대답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실패야. 너흰 비인간적인 그걸 좀 벗어 버려야 해. 좀 멀쩡해지라고.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해. 전 마지막에 커피를 마시지 않았죠. 그걸로는 부족하지. B는 그 말을 듣고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연구원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렇게 웃었고 웃음이 멈추자 B는 폐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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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식님 달성표 보상으로 드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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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너는, 포크로 감자를 찌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무섭고 두려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는 실날같은 불안의 끈을 붙잡고 무엇이 그를 이렇게 두렵게 하는지 알아채려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감자가 설익은 것 같다는(심지어 얼음처럼 차가웠다)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래. 감자 때문이겠지. 태너는 낮게 중얼거렸다. 옘병할 감자 같으니. 그는 포크를 들어 감자를 마저 갈랐다. 그러자 감자는 갈라지기는커녕 데굴 뒤집히며 푸르고 싱싱한 싹을 드러냈다.

순간 태너는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는 딱 돈을 지불한 만큼의 적당한 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카운터 쪽을 슬쩍 돌아보자 마침 돈을 세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빙긋 웃더니 음식 맛이 어떠냐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태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차디찬 감자와 마주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이프로 싹이 난 부분을 크게 잘라냈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것을 소중하게 감싸고 옆에 있던 가방에 넣었다. 화분이라도 하나 사서 이걸 심지 않으면 비참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돈을 세고 있는 주인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고 코트를 집었다. 가게 구석의 TV에서는 7시 뉴스가 막 끝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마지막 소식입니다. XXX가 XX번지의 한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가려던 태너는 번개에 맞은 듯 몸을 돌렸다. 그가 알기로 저 주소에 사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태너는 가방 속의 감자를 깨끗이 잊어버린 채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M에게 뭐라고 할까? 가스 폭발? 테러? 신원 미상의 시체? 일단 뉴스를 마저 들어야 했다. 태너는 소란한 가게 한가운데서 집중해서 귀를 귀울였다. 그리고…

…뒷마당에서 거대 순무가 10개 발견되었습니다.

태너는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수신자는 M이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본드?"
"뉴스 봤나?"
"무슨 짓이냐구요."
전화선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순무가 자랐어. 그것뿐이야."  
"그래요, 10개나 말이죠, 10개. 하나도 아니고."
"알아."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왜? 하나 뽑아가게?"

*

제임스 본드. 누군가 본드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제임스. 제임스? 이름이 불린 남자는 한숨을 푹 쉬고는 베개 밑으로 얼굴을 묻었다. 어둑어둑 한 걸로 봐서 새벽 다섯 시 정도일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시계를 확인해보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겠지만, 알 게 뭐람. 아무리 잠이 없는 00 요원이라도 다섯 시는 한창 꿈을 꿀 시간이었다. Q, 두 시간만 기다려. 두 시간 뒤에 해가 뜨면...그게 뭐 어떤 문제든...해결되어 있겠지. 본드가 중얼거리고는 옆 쪽에 손을 뻗어 Q의 몽실한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착하지, 우리 Q. Q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는 다시 자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뭘 먹을ㄲ...

"제임스!"
"왜, Q?!"
"나는 Q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 나는 그레이트 올드 터닙이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방은 아까보다 더 밝아져 있었다. 번쩍이는 거대한 순무가 푸른 색의 아우라를 내뿜었다. 그는 눈을 다시 감았다.

번쩍이는 거대한, 너무 거대한 순무가 빙빙 돌...아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건 꿈이 아닌 것 같다고 본드는 생각했다. 저 순무가 침대 위로 떨어지면 그와 Q는 곧장 압사할 테고 뉴스 헤드라인에는 -순무에 깔려 죽은 두 남성 어쩌고저쩌고- 비스무리한 게 올라갈 터였다. 그렇게는 안 되었다. 본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삶의 의지를 느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살아서 무사히 몽실한 머리의 Q와 아침 식사를 먹고 싶었다.

일단 본드는 순무...그레이트 올드 터닙에게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물론 저 순무에게는 입이 없지만.

"어..." 그러나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라고 제임스 본드가 거대 순무에게 말했습니다. 본드는 조금 죽고 싶어졌다. 이 정도로 죽고 싶어지면 안 돼. 그는 되뇌었다. 이 순무가 우리 방에서 꺼지기 직전까지는 더 미친 일이 많이 일어날 거라고.

"제임스 본드, 너는 선택받았다."
"예?"
"뒷마당에 가면..." 그리고 그레이트 올드 터닙은 푸른 잔상을 남긴 채 사라졌다.

어쩌면 올드 터닙은 처음부터 방 안에 없었고 우주 어딘가의 순무 행성에서 영상 전화를 건 게 아닐까, 하고 본드는 멍하니 생각했다. 동전 넣는 걸 깜박했나. 참 불쌍한 순무임에 틀림없었다. 동전이 없다니. 이제 서서히 바깥이 밝아지고 있었다. 7시 정각이었다.

"이봐, Q."

Q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내가 조금 걱정했었는데 말이야...순무가 예상보다 빨리 없어졌어. 이제 맘 놓고 아침을 먹어도 돼. Q? Q...듣고 있어? Q? 그는 Q의 맨 어깨를 살짝 잡았다. 긴장이 풀리고 상황을 차분하게 볼 수 있게 되자 본드는 웃음이 나왔다. Q를 깨워서 뒷마당에라도 나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Q는 볼을 톡톡 두드려도, 머리를 쓰다듬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7시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잠이 많았다. 본드는 기지개를 쭉 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순무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왠지 환기를 하고 싶었다. 그는 창문의 잠금쇠를 풀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뒷마당에 드럼통만한 순무 열 개가 가지런히 심겨져 있었다.

*

"Q,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이건 일종의...계시라구."
"어떤 계시요?"
"순무 농사를 지으라는."
"저는 순무를 싫어해요."

방금 그건 청혼이었지만, 본드는 더 말하지 않았다.

*

"빌어먹을 순무 새끼!" Q는 꽥꽥 소리지르며 순무 때문에 비좁아진 뒷마당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왜 저래요?" 태너가 본드에게 속삭였다.
"방금 순무를 발로 찼어." 


*

태너가 본드의 집 현관벨을 눌렀을 때엔 이미 기자들은 모두 빠져나간 뒤였지만, 이웃 주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플래시 소리와 사다리까지 동원해 담장 너머의 거대 순무를 보려는 눈빛들에 질릴 대로 질린 본드는 집 안으로 걸어들어가 큰 삽을 들고 걸어나왔다. 당연히 순무에게 쓰려는 거였겠지만 사람들은 그 시퍼런 서슬에 점점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삽으로 뽑아낼 수 없다는 건 본드도, Q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문은 태너 본인이 맞다는 이야기를 대여섯번쯤 한 뒤에야 열렸다. 태너의 눈에 들어온 건 퀭한 눈의 본드와...
"본드?...랑 Q도 있네요, 맙소사, 전 집에 갈게요. 거대 순무가 뭐라고 내가 금 같은 휴일을 소비해가면서 사내커플 인증을 봐야 하는..."
"태너, 진정해. 우린 귀농하지 않기로 했다고."
"지금 그딴 게 중요해요?"
"그딴 거라니, 유능한 쿼터마스터가 사표를 내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찰나 동안 태너의 머릿속에 주마등이 스쳐지나갔다. 차가운 감자, 싹이 난 감자, 거대 순무, 본드, Q, 순무, Q, 순무..
"그나저나 전 이제 죽는 건가요?" 태너가 물었다. 본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그러니까...왠지 그런 게 있잖아요. 아니! 우리의 비밀 연애가 들켜버리다니! 죽어줘야겠어 미스터 태너! 탕/슉/퍽..."
"자네는 현장 요원의 정신상태를 좀 더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됐고 그놈의 순무 좀 보여줘요."


"그러지." 본드는 집을 가로질러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태너는 납득했다. 그러나 납득했다고 상황이 안정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본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Q는 달랐다.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해보고 있었다. 순무 잘 파내서 요리해먹는 방법 같은 건가, 하고 태너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순무들이 정신 오염 가스라도 내뿜는 모양이었다. 멀쩡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태너, 본드, 이걸 봐요." Q가 별안간 휴대폰을 쓱 내밀었다. 그들은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대회의 포스터 같았다. <세계 큰 작물 대회> 라고 쓰여 있는 이 포스터 아래에는 참가 신청서를 내려받을 수 있는 링크가 있었다.

"파내기만 하면 돼요. 내일까지거든요."
"안 그래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중이었는데 잘 됐군. 1등 상금이 얼마야?"  
"됐어요, 이 미친 사람들아. 전 그만 갈래요. 미스 P랑 저녁 데이트가 있어서."
"그게 누군데."
"제 작은 싹감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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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2 스파이 전력에 낸 얀데레Q 

주제 : 트라우마


침잠


저는 제가 죽어서 당신의 머릿속에 각인되길 원했어요. 거의 성공할 뻔 했는데. Q가 말했다. Q는 지난 2년 동안 나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유령이었다. 


참 슬픈 일이에요. 모든 게 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잖아요. 당신이 어제 저를 발견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정말이지, 큰 상처였는데. Q가 말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랬다. 어제 Q는 내 집을 비추는 감시카메라들과 함께 은신처에 있었다. 2년 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는 살아 있었다. 내가 총을 겨누자 그는 속삭였다. 안녕, 제임스. 


그건 당신이 단순히 저를 잊지 못하는 것과는 달라요. 전 당신이 저를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저와 관련된, 저를 생각나게 하는 물건들이나 대화나 단어나 뭐 그런 것들을 보면…네. 그래요. Q가 말했다. 네. 그래요. Q가 한번 더 말했다. 그렇죠. 


나는 당신이 앞으로 평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면 했어요. 눈을 감으면 내가 당신 목을 조르는 광경이 펼쳐졌으면 했어요. 내 생각을 해 주기를-Q가 말했다.-바랬어요. 사랑해요. 그는 나를 사랑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실 어느 정도는 기뻐요.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너무. Q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앞으로 남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기를 바래요. '세상에, 그래, Q는 살아 있었어. 그가 살아 있다니.' 사실 이게 더 좋지만요. 'Q가 죽었어. 그가 죽다니. 그가 죽은 날이 아직도 어제처럼 선명해…' 어쩔 수 없어요.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요. Q가 말했다. 


그건 그렇죠, 제가, 아예 당신 집에, (좀 조용히 좀 해요, Q는 내가 묶인 의자에 손을 올려놓았다.) …붙어 있었던 카메라를 모두 떼 버리고 완전히 당신을 떠났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겠죠.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더 완벽한 결말인 건 틀림없잖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당신은 내가 죽는 순간을 무한히 반복하고. 그렇게. Q가 말했다. 


조금 변화를 주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당신의 인생에. Q가 말했다. 성공했으니 됐어요. 음, 그냥 그렇게 생각할래요.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제 어떻게 할까요? Q가 말했다.


저는 제가 죽어서 당신의 머릿속에 각인되길 원했어요. 저는 그런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사실 당신의 창백해진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았어요. 변화를 받아들이긴 더더욱 싫고요. 말했잖아요. 큰 상처였다고. 그냥…그렇다고요. 그러니까. Q가 말했다. 이제부터 잘 봐요.


이것 봐요. 심지어 당신 총이에요. Q가 말했다. 완벽한 도구죠. Q는 그것을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럼 이제 안녕, 제임스. 앞으로는 5년이 지나도, 10년, 15년, 30년이 지나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요.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 당신은 날 그리워하지 않겠지만. Q가 말했다. 집에 가서 따듯한 물에 편안하게 목욕하고 식사도 한 다음에 이렇게만 생각해주면 돼요. 'Q가 죽었어. 맙소사, 그가 정말 죽다니. 그것도 내 앞에서.' 그리고 그걸 평생 반복하는 거예요. 정말 간단하죠. 



"그럼…이제 당신은 자유야." 

Q가 속삭였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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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1 미쳤다진짜 너무 예전글이라 죽을것같지만 백업하는이유는 블로그를 갈아버릴 예정이기 때문에...(이하생략


 Q는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이른 오후였지만 플랫 안은 다람쥐 굴처럼 어둑어둑했다. 방 중앙에 자리잡은 노트북의 푸른 모니터가 유일한 조명이었다. 그는 건성으로 자판을 건드렸다. 방금 수신된 새 송신기의 업데이트 보고서(20장 짜리였다)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 건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낼 수 있었다. 

 

그는 약속하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더블 오로 시작하는 모 요원이 듣는다면 코웃음 칠 소리지만, 사실 맘만 먹으면 보고서는 30분 내로 완료가 가능했다. 그건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치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Q가 번번이 '당신이 맨몸에 총 하나만 달랑 들고 적의 본부로 뛰어들어가 USB를 빼내 오는 것보다 내가 자판 몇 번 두들겨서 해킹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 이라고 주장하는데도 말이다. 다만 Q는 떼 쓰는 7살짜리 남자아이가 아니라 20대 후반의 어엿한 성인이었기 때문에 더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사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던 내 알 바 아니지. 그는 고양이처럼 길게 기지개를 켰다. 왜냐하면 Q 본인도 입장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정반대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리타분한 늙은 남자. 007에 대한 Q의 이미지는 딱 그 정도였다. 

 아마 본드의 머릿속에서의 Q는 미화시키는 취향이 없는 한 당돌한 '새파란 애송이'일 것이고, 그의 핸드폰 전화번호부 내에서도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007의 핸드폰에 있는 Q의 번호가 "애송이" 라거나 기타 수식어 없이 그냥 "Q" 가 맞다고 해도 Q에게는 별로 감정적인 데미지가 없었다. Q의 핸드폰에는 007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혼자만의 묘한 승리감을 느끼던 Q는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문가 너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는 대신 차분하게 노트북을 덮었다. 전날 새벽 내내 '파라노말 액티비티' 를 비롯한 호러 무비를 연달아 시청한 끝에 Q는 무덤덤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가 언제나 생각하는 본드의 눈은 맹수의 그것과 참 비슷했다. 귀신이나 악마보다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육식의 무언가가 더 무서웠다. 굳이 따지자면 말이다. 둘 다 절대 마주치기 싫은 건 확실했다. 

 

"007. 다음번에 내 플랫으로 올 일이 생기면, 문을 사용해주기 바라요."

"그러지." 젊은 쿼터마스터는 자신의 말이 "무기는 꼭 반납해 주세요." 와 같은 맥락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M이 그러던데. 오늘 가택근무라고···"

"해야 할 일은 다 끝냈어요."


본드는 닫힌 노트북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Q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 못 끝낼 것 같으면 이걸 전송해버릴 사람은 내 밑으로 50명이 넘어요. 지금은 쉴 타임이죠."

"권력 남용인가?"

"아뇨. 불청객의 방해에 의한 당연한 권리라고 해 두고 싶은데요."

"상관없어." 그가 웃었다. 

흰 셔츠의 목깃에 가려 본다고 애를 꽤 쓴 것 같은 옅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분명히 어딘가의 호텔 화장실에서 박박 문질렀을 것이다. Q는 속으로 조소했다. 내 잔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나 보네요. 

"셔츠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어요?"

"없었어. 일 끝나자마자 바로 왔거든."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꼴에 Q는 뒷목이 당겼다. M이 사무실 의자에 파묻힌 채,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코빼기도 안 비칠 007의 업무 보고서를 기다리며 F5를 연타하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사실 제임스 본드는 모든 MI6 윗분들의 평균 혈압치를 높이기 위해 CIA에서 파견한 요원이 아닐까, 하고 Q는 생각했다. 담당 쿼터마스터의 정신적 스트레스도 포함해서.


"피범벅인 남자랑 같은 방 안에 있는 건 제가 관용을 베푸는 게 가능한 한계치 밖이니까 제발 셔츠 좀 갈아입으세요. 피 냄새는 딱 질색이니까." 

"'피범벅'은 너무 과격한 표현 같은데. 자네답지 않군."

"아. 바가지를 더 긁히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미안해." 007은 쉽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귀중한 시간을 자존심을 건 말싸움으로 채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이 많은 쪽이 참아야지.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리고 혹시나 M이 들었다면 필히 비웃을) 속엣말을 중얼거리며 본드가 말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새로 다려진 셔츠는 네 방 벽장······"

"밑에서 세 번째 서랍이요. 잘 외우시네요."

"반복 학습은 누가 뭐래도 좋은 거야. 사이즈는 여러 갠가?"

"S만 안 집어 입으시면 별 말 안 할게요."

"어차피 안 들어가." 

                                                                                                     

                                                                                                           ***

 

 


007이 말끔한 모습으로 플랫 거실에 다시 나타났을 때 Q는 새로 끓인 따뜻한 얼 그레이를 두 잔의 머그에 따르고 있았다. Q와 B. 본드는 자기 몫이 확실한 것 같은 컵을 집어들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발치의 작은 협탁에는 쿠키와 고급 초콜릿들이 올려져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발렌타인 데이 때 Q의 사무실 책상 위 광경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B?"

"당신 거 맞아요." 

"의외로 세심한 구석이 있군."

"발로 뛰는 현장 요원이 컴퓨터 담당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Q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집까지 불쑥불쑥 찾아와서 하룻밤 지내다 가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지금까지 나에 대해 뭘 보고 들은 거죠?" 

"남들이 보고 듣는 것과 같은 것들." 

"수작 부릴 심산이면 당장 그 컵 내려놓고 집에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 바쁘니까."

"30분 내로 끝낼 수 있다고 했던 건 누구시더라?"

"방해하는 사람이 없고 조용해야 가능한 조건이라고 꼭 말로 해야 하나요?"

 

본드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Q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작은 초콜릿의 껍질을 깠다. 손바닥 위에 5개쯤 모이자 그는 한 알을 내밀었다. 007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몬드 들어간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오늘은 어땠어요?" 별안간 Q가 물었다. 본드는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반복되어 온 일이었다.

"두 명 줄였어."

"어떻게요."

"둘 다 기절시켰지." 

"잘 됐네요." Q가 활짝 웃었다. 안도감과 그 밖의 무언가가 뒤섞인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면서 007은 저녁에 꼭 장난감 사다 주셔야 돼요, 라고 말하는 어린 아들을 앞에 세워놓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Q가 원하는 건 간단했다. 사람 좀 덜 죽여요.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웬만하면 임무 수행 때 막무가내로 인명피해 좀 내지 말라구요. 되도록이면.

지금까지 손에 피를 가득 묻혔다고 해서 앞으로도 평생 핏구덩이에서 굴러야 할 의무는 당신에게 없어요.

007은 비슷한 말을 했던 여자가 생각났다. 그녀의 이름은 베스퍼였다. 

 

이제 와서 죄책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뭐지? 본드는 반박했었다. 그런다고 과거가 지워지지는 않아.

Q가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지워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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