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님께 드립니다 ><




어젯밤 당신과 함께 걸었지…엄마. 마모루다. 마모루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미소지으면서,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 닫혀 있었던 입이 썼다. 꿈에 네 아버지가 나왔다. 마모루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막 잠이 든 사람처럼 고요히 숨을 쉬었다. 마모루? 내 목소리가 아이에게 닿았다. 담요가 참 따듯하더라. 마모루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나는 에리입니다, 지금은 겨울이고, 12월이며, 또한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며, 눈이 쌓이다가 돌연 잘못된 발걸음처럼 멈추어버린 새벽 한 시의 서재다. 아저씨, 선물이예요. 내가 박스를 내밀었고 그는 뜯는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를 선물을 줌으로써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특별함을 자연스레 받아들었다. 이틀 뒤 서재에서 담요를 몸에 덮고 대충 자고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눈을 떴는데, 꿈 속에서 에리랑 어딜 걸었어, 어디를요, 그러게 말야.



눈이 엷게 깔린 아름다운 오솔길, 우리는 잠시 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함께 오솔길을 걸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로비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당신의 어깨에 눈송이가 녹지 않고 있었다. 아저씨, 눈이 붙었잖아요, 아…눈.



자주 앉던 의자에 올려뒀었어. 알아요. 찾을 책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참 넓더구나. 넓죠. 넓고…집어드니까 말이야, 누가 금방이라도 무릎에 올려뒀던 것처럼 따스해서, 그리고요, 어젯밤 당신과 함께 걸었지…같이 어딘가를 산책했었던 것 같은데…간신히 일정을 맞췄던 기적적인 그 여행이요? 아니, 음, 아니, 글쎄, 그 여행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우리가 몇 번이고 눈이 오는 날 손을 잡았는지, 아, 마모루가 담요를 집었다. 마모루가 한 부분을 가까이 보여주었다. 작은 눈송이가 삭 녹았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저기로 들어왔나 보네요, 마모루가 말한다. 우리는 함께 그 쪽을 얼핏 보았다. 전나무에 흰 눈이 매달려 있었다. 아…. 말은 형체를 잃고 사라진다. 그리운 사람은 입 안의 눈송이처럼 애틋하다.



추워요, 감기 걸리면 큰일나잖아. 마모루가 담요를 단정히 펴서 어깨에 둘러주었다. 기침이 나올 것 같아 잠시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네, 이런. 마모루, 손이 온통 눈 범벅이야, 마모루가,



눈송이…



하고 말했다. 마모루와 내 손이 온통 눈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 조심해요, 손이 녹아내릴지도 몰라. 녹아내리면 뭐 어때, 하고 내가 다시금 웃는다. 아버지가 잡아주는 거야, 녹아내린다면 그것 또한 아름답다. 카페트가 축축해질 거예요…눈 녹은 물로. 지금은 봄이 아니야. 한겨울에는 누구나 조금씩 슬프고 조금씩 추위를 끼고 살며 누구나 무언가를 붙잡으려 안달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억들, 그리고 또 기억,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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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님께 드립니다 >…<)/ 

드뷔시의 Suite pour piano-sarabande를 들으면서 작업했습니다!


숲 속에는 호수가 없어요. 누군가 말했다. 미신입니다. 누군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들의 덩어리죠.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름달이 비추는, 고개를 숙이고 그 빛에 의해 바닥이 엷게라도 보일까 눈을 찌푸리다 보면 무언가가 올라올 거라고 믿게 되는 그런 호수가 있을 거라고, 있어야 한다고 한 사람이 말하면 어떨까요? 꿈에서 본 게 아닐까요? 하지만 그걸 5인이 주장한다면, 아니, 10인이 동시에 꿈을 꾸었다면…숫자는 점점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 이상으로는 늘어나지 않아요.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서약을 하게 됩니다. 숲 속에는 인어가 사는 호수가 없다. 나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없다.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서약을 거부한 한 사람이 남게 됩니다. 이제 다수가 말 할 차례입니다. 들어 봐, 차분하게, 그렇지. 에이시, 숲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 넌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거야. 사사즈카 에이시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문을 열었고 깊은 숲의 질척한 가장자리에서 또다시 살짝 비틀거렸고,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녹슨 랜턴을 꽉 쥐었다. 에리가 말했다. -얼마나 걸려요? 그녀는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그녀의 눈은 번쩍였다. 두 시간 쯤. 사사즈카가 대답했다. 사사즈카는 서재 책상에 핀으로 박아 둔 에리의 답변을 기억해냈다. 칼로 갈색 봉투를 살며시 잘라내자 질 좋은 종이가 딸려나왔다.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지금 갈게요. 기다려요.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기묘한 정신을 끌어안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눌 준비는 되었는지에 대해 확신조차 할 수 없는 채로. 어두운 숲은 이를 악물고 그들을 기다렸다. 에리 역시 랜턴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발 아래가 흙인지 진흙탕인지 물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옅고 넓은 물웅덩이를 걸었다. 텅 빈 하늘이 바닥에 비춰지다가 발걸음을 내딛는 주변으로 넋없이 흩어졌다. 이 밤이 지나면 코우바야시 에리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별빛이 흐르는 엷은 땅과 울부짖는 나무와 오직 혼자 남은, 인어에 대한 꿈을 꾸는 남자에 대한 꿈을. 혼자 남은 것은 인어인가? 인어일 것이다. 그녀는 흐릿한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억을 안고 다시 돌아가겠지. 말을 타고…그리고 비밀을 간직한 것은 두 사람이 된다.


그들의 숨에 불덩어리가 섞여들었다. 바람이 한 층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숲에 있는 것과 동시에 들판에 서 있었다. 들판은 물로 채워졌다. 그들은 물 속에서 물을 찾아 움직였다. 사사즈카는 나뭇가지를 헤치며, 달이 호수 속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눈 앞에 그렸다. 거대한 돛처럼 생긴 흰 새 한 마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얼마 뒤 은색으로 빛나는 고리 하나가 물 위로 떠올랐다. 사사즈카는 그것을 집었다. 순간 그는, 물 속의 하얀 눈 두 개를 보았다. 검은 물은 달빛에도 불구하고 깊고 짙어서, 그 빛나는 눈은 마치 길고 검은 통로의 반대편 끝에 홀연히 나타난 것 같았다. 그쪽의 눈이 천천히 감겨 사라지자 이쪽의 눈도 감겼다. 날이 밝고 자신의 방 바닥에서 일어난 사사즈카는 온통 진흙투성이인 부츠와 은색 고리를 발견했다. 새의 발목에 끼울 만한 크기였어. 그가 에리에게 말했다. 에리가 대답했다. 누군가가 물 속에서 그 새를 새장에 안전히 넣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먹이를 주고… 그들은 각자 머릿속에 돛 같은 새, 흰 새를 그리며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치웠다. 이슬이 눈물방울처럼 가지를 휘감았다. 에리는 그것을 손끝으로 훔쳤다. 누가 울고 있어요. 무거운 침묵이 그들의 길을 밝혔다. 


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가 있는 빈터 위에 보름달이 완벽한 퍼즐처럼 끼워맞춰졌다. 저 멀리서 늑대와 까마귀가 끊임없이 울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직 무언가로 채울 여백뿐이었다. 둘은 호숫가에 앉았다. 맑은 물이 가장자리를 삼켰다. 사사즈카 씨, 그 고리를 줘요. 에리가 호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속삭였다. 사사즈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은빛 고리는 더욱 작아 보였다. 한 사람의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라면…두 사람. 둘. 두 개의 고리. 하지만 고리는 하나였고, 사사즈카가 어떤 생각을 완성하기도 전에 그녀는 고리를 건네받았다. 이제 그 순간이 찾아왔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에리, 말해봐. 사사즈카가 말했다. 네 꿈은 뭐지? 이제 네가 꾸게 될 꿈은…하지만 그 전에는. 에리가 말했다. 나는 물을 가르고 있어요…


…짙어서 내 숨을 막는 물을. 나는 그 안으로 뛰어들고…


그는 고개를 들어 에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편지를 받는 그녀, 만년필을 휘갈기는 그녀, 말을 타는 그녀, 웃는 그녀, 말하는 그녀, 그녀의 집, 방, 책들, 그가 그녀와 함께한 모든 시공간이 한 점으로 모였다. 그 점이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그녀는 동시에 날카로운 새의 눈, 차가운 맑은 물 같은 눈으로 부드럽게 그를 마주했다. 흰 날개가 사사즈카를 끌어안았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답장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도 이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날개가 그의 볼을 찔렀다. -미안해, 내가 잘못 봤어. 그가 속삭인다. -흰색이 아니라 은색이군. 에리는 공기를 가르며 날아올랐다. 큰 날개가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가렸다. 호수가 날갯짓의 반동으로 물결쳤다. 그녀가 화살처럼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사즈카는 호수로 몸을 숙였다. 고리 하나가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그는 그것을 집었다. 빛의 눈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눈 속의 흰색에 대하여, 그 흰색이 품은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렸다…그리고 눈을 감았다. 


보름달이 뜨면 돌아와요. 호수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우바야시 에리는 꿈을 꾼다. 별빛이 흐르는 엷은 땅과 울부짖는 나무와 오직 혼자 남은, 인어에 대한 꿈을 꾸는 남자에 대한 꿈을. 혼자 남은 것은 남자다. 그는 혼자서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고리를 끼우러 뭍으로 올라온다. 달빛을 폐에 가득 채우며…


숲 속의 인어에 대한 꿈을 꾸는 사람은 오직 이 세계에 하나뿐이다. 하지만 비밀을 간직한 것은 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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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연뮤전에서 냈던 4p짜리 류빅토리아+오너캐 드림베포본 웹공개합니다ㅇㅇ 


4월에요

4월에


 이제 와서 보니 부제: 미뇽의 ㅁ는 M의 ㅁ 같은 거 붙였어도 좋았을듯



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은 굉장히 신중하게, 그리고 적절한 때에 이루어져야 했다. 조금이라도 놓쳤다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은근한 냉기에 나는 고개를 빼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아침 햇빛이 방 안에 성큼 걸어 들어올 테고, 내 눈은 졸음을 벗을 것이다. 


나직한 초침 소리, 드문드문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잠결에 속삭이는 의미 없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나는 바구니 안으로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조금 더 잘까, 하고 멍하니 유혹에 몸을 맡길 무렵 나는 큰 바늘이 딸깍, 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오전, 모든 게 정상…은 아니고. 


그녀는 잠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난 뒤 목이 말라 부엌으로 기어가다가 어느 새 잠에서 깨어 식탁으로 비척비척 걸어와 앉는 그녀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볼품없게 나동그라지는 일은 기본이었다. 식탁 밑에서 조심스레 밖으로 기어 나오자 그녀는 아, 하고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러면 나는 그 손으로 올라탔다. 그리고…아침 식사. 나는 빵 한 덩어리에 올라타서 맹렬하게 그것을 조각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느냐고? 괜찮다. 그러려고 한 거다. 


어쨌든 그녀가 웃는 걸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앙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부터 할 일은, 글쎄. 웃는 것보다는 다른 걸 더 잘 이끌어낼 것 같지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 그걸 알았으면 난 진작에 우주를 정복했을…아닙니다. 우주 정복은 햄스터설치류에게 양보할 예정이다.

오전 7시 45분이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꼬리가 있다는 것은 꽤 유용하다. 가끔은 밟히지만, 뭐.


조심스럽게 슬리퍼를 침대 밑으로 끌었다. 예상한 바였지만 소리가 너무 컸다. 분명히 무거워 봤자 일 텐데! 고작 털로 만들어진 슬리퍼 따위가! 그녀가 눈을 뜨고 아래를 본다면 곧바로 한 손엔 끌려가던 슬리퍼를,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불쌍한 꼬리를 쥐고 흔들어서 저 열린 창밖으로 사정없이 내던져버릴 것…이라기에는, 음, 아니다. 이건 내 망상일 터였다. 높은 확률로 불안감에서 비롯된. 일정에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분홍 색 슬리퍼는 보기에 참…뭐랄까, 


펑 하고 앙리 모양의 작은 형체가 나타나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조금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젠 별 게 다 보이네. 


“그래요, 잘 고르셨네요. 빅토리아에게 딱 어울려요.”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쿠!


다행히 매트리스 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제 평소보다 더 깊이 잠들었던 걸까. 그럼 조금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어쨌든 지금은 이게 먼저다. 마침내 늘어진 시트 거의 가까이까지 슬리퍼가 닿았다. 조금만 더 끌어당기면 된다. 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툭 하고 늘어진 팔에, 나는 빠르게 옆으로 굴렀다. 다행히 그 손 끝에 내가 닿는 일은 없었다. 


슬리퍼는 먼 거리를 날아갔다.


아, 여기서 내가 명확히 해야 할 점은 내가 18cm에 불과한 작은 용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7cm가 인간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어쨌든 난 내 기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러분, 작은 동물의 눈높이에서 생각해 주세요, 이 광고는 스위스 당국의 협찬으로 이루어졌으며…다 됐다. 나는 슬리퍼를 침대 아래의 내 잠자리 바구니 옆에 딱 붙여 두고는 꼬리로 그것을 만족스레 툭툭 쳤다. 


나는 분홍 색 슬리퍼가 놓여 있던 자리로 가서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아무것도 까딱하지 않고 고요하게 찬 바닥에 몸을 비비고 있으려니 별 잡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그래. 내가 내 취미 생활을 언제 깨달았느냐 하면…그렇지. 몇 주 전에, 부엌에서였다. 


‘앙리, 무슨 파이를 좋아하나?‘ ‘응? 나는…‘ 그가 뭐라고 말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빅토리아가 팔을 걷어붙이고 밀가루 포대를 탕 하고 도마 위에 내려놓았을 때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중간은 적당히 넘기고, 음, 이것도 넘기고,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서…구르다가…오븐 속에서 팍 하고…이런저런 일이 있은 후에 나는 한동안 입을 열 때마다 밀가루가 나오는 기적을 체험했다. 생략이 너무 많지 않냐는 질문이 들어올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으니까. 5일 전 점심 메뉴를 5초 안에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님 말고.

빅토리아 프랑켄슈타인과 앙리 뒤프레의 급작스레 굴러들어온 반려동물로 살아가면서 두 사람에 대해 무언가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언가 사고를 치고 싶은가. 혹시 내 머릿속을 까보면 인간의 엄지손가락 반 만한 뇌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부수고 어지럽히고 망쳐라.> 나는 누군가를 놀래켜 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전 8시, 모든 게 정상! 기대 이상의 슬리퍼 대용품! 


위에서 이불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일어난 모양이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앞으로 30초 안에 모든 게 끝날 터였다. 준비한 시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그래서 허무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매일 한다면 어떨까. 좋은 생각이었다. 


                              *


나는 눈을 반쯤 뜨고 발을 휘저어 슬리퍼에 대강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솜을 밟는 기분이었다. 잠깐. 솜?


어?


                              *    


“언니! 발닦개가 되게 해주세요!”    

“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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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Creature X Mint and X


Written by Mignon


그가 할 말을 마치고 일어서자, 나는 우산 끝을 그의 눈에 거의 던지듯이 찔러 넣는다. 그것은 군청색의 긴 장우산이다. 그의 목 아래가 거세게 흔들린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사형수다. 그러나 사형수는 곧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불신자에게 고개를 두어 번 내젓는다. 내 치마는 물에 젖어갔다. 누군가 나를 일으켜주었으면, 하고 잠깐 생각했다. 일으켜줄 사람은 이곳에 없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반듯한 얼굴의 반쪽이 뭉개져서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나는 잠시 흐느꼈다. 


여전히 얼굴에 우산이 박힌 채로 그 자리에서 비틀대는 X는 마치 줄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 긴 평행봉을 쥐고 이리저리 앞뒤를 재는 무용수 같다. 물론 그는 진짜 무용수보다 서투르고, 불안정하고, 곧 사라질 연기 같고, 무엇보다 그 가엾은 무용수와는 달리 바닥으로 낙하해도 부러진 곳 하나 없이 일어날 터였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다. 언제나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사람을 농락하고 비웃고 조롱한다. 그리고 관객이 홀린 듯이 객석에서 일어나 걸어오면 손을 잡고 무대 아래, 캄캄한 그곳에 처넣는다. 온 도시에, 온 세상에 그의 감옥이 존재했다. 아차 하면 끌려들어가는데, 피해자들은 자신이 끌려들어가는지도 모르다가 문이 잠겨버린 후에야 알아차린다. 이 모든 것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흐릿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눈 앞 역시 흐리다. 낮에는 이러지 않았다. 낮에 나는 집 밖에 있었다. 아침에는 문을 닫기 전에 짧게 손을 흔들었다. 벌써 등 뒤로 멀어진 창문에 비치던 너는 누구였던가. 너는 내 서랍 속의 맹독, 싸구려 휴지에 싸인 반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값비싼 보석. 그러나 맹독은 사실 색소를 푼 물, 반지는 손을 대면 먼지로 바뀌고, 보석은 감정할 가치조차 없는 모조라고, 그가 말한다. X가 말한다. 


"결국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처음부터." 


"닥쳐."


모든 것이 바뀌고 비틀리기 시작한다. 비가 폐허 위에 내려앉자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창문이 닫히고 커튼이 내려졌다. 가벼운 추위에 떨며 온갖 틈을 모조리 잠그는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언제 올지 기다리며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날들이 수백, 수천 번 반복되고 세대는 수만 번 바뀐다. 나는 그 사이로 영원을 그러쥐었다. 나의 영원한 계단, 집, 추위.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 나는 행복을 너에게 주고 싶었다. 너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백 개가 넘는 창문을 모두 닫고 함께 추위를 궁금해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내게 물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해? 춥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해. 하지만 나는 알아. 추위라는 게 뭔지 알아. 나는 그 때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피곤한 손으로 문을 열자 빈 집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바깥으로 밀려나왔다. 굳이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집 문을 잠그고 펼쳐서 바닥에 내려놓았던 우산을 다시 집어들었다. 없다. 



바닥에 툭 떨어진 검은 양복이 기묘하게 움찔거렸다. 나는 일어서서 뒷걸음질로 계단을 한 칸 올라갔다. 그것은  나비다. 넥타이가 검은색의 나비로 변했다. 나비는 비를 맞으면서도 날아올라 허공을 몇 바퀴 돌았다. 나는 이렇게 뒷걸음질로 계단을 계속 올라가다가 넘어지면 어디를 제일 먼저 다칠지 고민하고 있었다. 


눈 앞에 새카만 나비 무리가, 머리가 없는 몸이 있다. 팔이 움직인다. 장갑이 벌레처럼 꿈틀댄다. 나와 가자. 아가씨,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네 집은 여기가 아니다. 편안하고, 따듯한 곳으로 갑시다. 추위에 떨도록 내버려두자. 진짜 추위가 무엇인지 알려주자. 사실 알려줄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살아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으니까. 죽은 생명이다. 그는 지옥 같은 추위에서 태어났다. 아무도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지 않았고 그 어떤 축복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저주다. 


이제 이 바보 같은 공연을 끝낼 시간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비 한 마리를 잡아서 손으로 으깼다. 나머지는 비명을 지르며 회색 하늘로 날아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계속 내린다. 우산이 있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푸른 색의 긴 장우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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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0) 2015.01.14

그와 그녀는 꽤 오래 함께 살았다. 그들이 함께 산 집은 어느 후미진 공네의 흔히 널린 옥탑방 중 하나로, 방 한 개에 화장실 하나와 창고 겸 옷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그녀는 고등어를 팔아서 월세를 냈다. 그는 집에 있었다. 그녀가 집을 나서면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채웠다. 꿈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누군가가 꿈에 나왔다. 집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행복한 꿈이었다. 소소한 일상을 한 스푼 덜어 내어 그대로 꿈 속에 섞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그녀를 반길 준비를 한다. 그의 하나뿐인 신발, 그녀가 사 주었던 신발은 얌전히 닦여 방 한 구석에 놓여저 있다.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신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다. 나가자. 산책 가자. 그는 오늘을 위해 신발을 아꼈다. 코트에 팔을 꿰어 넣는다. 손이 마주잡힌다. 신발은 꼭 맞았다. 그와 그녀는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밤 달빛이 셌다. 


그는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나고, 신발이 아직도 신문지에 잘 싸여 있는지 확인한다. 그녀는 산책을 가자고 말 한 적이 없었다. 가끔 같은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그의 코를 톡톡 두드리며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바깥에는 말이야, 이러저러한 게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한 창문이 되어 주었다. 그녀에게서는 대부분 고등어 비린내가 났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그녀 자신의 바깥세계 대부분이 생선 판매대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이야깃거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오늘 도매상에서 비닐봉지 네 개를 받아들고 걸어가는데, 또는 매상을 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그는 가끔 물어보았다. 손님은? 어느 날 이렇게 묻자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너무 피곤하니까 어느새 잊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음, 하고 눈을 굴렸다. 걔들은 돈을 주고, 나는 생선을 주고. 그게 다야.  그녀는 본전을 치기 위해 열심히 생선 머리를 쳤다. 그는 새 신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오늘은 문이 잠깐 열렸다 네가 방 안을 다급히 둘러본다 허망하고 공허한 표정이다 너는 몸을 들어 아, 하고 한 마디를 내뱉는다 너는 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 나는 다시 웅크린다 이 꿈은 언제쯤에야 끝이


집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그는 부스스 잠에서 깬다. 그녀는 짐을 문가의 서랍장 위에 내려놓고 신발을 벗은 뒤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걸어가 찬 손을 마주잡았다. 이것 봐, 차갑잖아. 그가 말한다. 그녀는 듣지 않았다. 이것 봐, 차갑잖아. 그가 한 번 더 말한다.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입을 꼭 다물고, 그렇게 고개를 자꾸 흔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널브러진 긴 우산이 보였다. 어디 갔었던 거야, 하고 그녀가 말을 꺼낸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문을 열 줄 모르니까. 너도 그걸 알지? 너도? 그는 생각했다. 알지?


그녀는 손에 집히는 물건을 그에게 집어던졌다. 팔고 남은 고등어가 들어 있는 검은 비닐봉지도 그 중 하나였다. 날아가는 봉투에서 미끈한 고등어가 빠져나와 바닥으로 볼품없이 떨어졌다. 그의 발치에 비린 물이 닿는다. 그와 그녀 모두 한참 전에 죽어버린 고등어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얼마 후 이불을 덮고 웅크리며 그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아무 것도. 


그녀의 손을 잡아채어 그만두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녀는 너무 약했다. 그는 점점 더 구석으로 물러났다. 날카로운 접시 조각 비슷한 것이 등을 타고 후두둑 떨어졌다. 목구멍에서 우울한 신음이 끓어 올라왔다. 다가오는 그녀의 등 뒤에 그림자가 졌다. 검은 장갑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형체를 분간하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어째서, 입만 보이는지. 입꼬리가 그림처럼 올라간 그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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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여기에서 멀다.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보이지는 않을 거리다. 그렇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모성. 나는 하늘을 꿈꾸었지만 동시에 중력을 사랑했다. 나를 땅에 붙이는 그것. 기체에 올라타 레버를 올리면, 느긋하고도 차분한 감각으로 온 몸을 감싸던, 그러나 5분 뒤면 잠깐 동안 온전히 사라질 그것.

죽음은 눈 앞에 여러 방법으로 다가온다. 마치 강철 가시가 달린 벽 사이에서 압사당하는 느낌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사실 이 말 그대로였다. ELS는 분명, 생명체였지만 배려심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으로부터 진화할 것이다. 그들은 과격했지만 동시에 배우는 게 빨랐다. 여러 기체와 함선들을 완벽하게 카피한 그것들은 적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적이 되어 보라는 옛 격언을 직접 실천에 옮겼다.

사실, 인간들도 별반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가시 하나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플래그 슈트의 의의는 무엇인가. 시체 수거반이 왔을 때 적의 시체인지, 아니면 아군의 그것인지 구분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아닐까. 어쨌든 나는 곧 금속으로 뒤덮일 것이다.
고통스러울까. 잘 모르겠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내 플래그 커스텀이 폭발했을 때가 기억난다. 몸의 반쪽이 화염에 휩싸였다. 나는 치료를 받았지만, 한동안 화상 입은 쪽 손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오른손이었다. 루시가 수프를 뜬 수저를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들고 후후 식히는 것을 못 봐서 유감이었다. 그녀는 병원에만 오면 침착한 얼굴을 벗어던지고 모든 일에 서툴러지고는 했다.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그 때는 내가 처음으로 죽음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아니, 그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처음으로 생각한 순간이었다.

왼손 손목이 점점 무거워졌다. 금속이 슈트에서부터 살갗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기체를 빠르게 한 바퀴 회전시켰다. 조여 오던 ELS가 잠시 멈추었다. 어쨌든 잠시 뿐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지 생각했다.

5분 정도였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연습하던 곡을 떠올렸다. 4분 30초 정도 되는 소품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그녀는 첫 음부터 미스키를 낸 뒤, 내게 사과하고 한번 더 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연주회는 내일이다.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었다.

진심으로 가고 싶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은빛 가시로 뒤덮인 앞 유리 사이에 얼기설기 엮인 금속 구체가 보였다. 꽤 끔찍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황폐한 행성. 그 어떤 나무도 없고 물과 흙과 빛도 없다. 그렇다면 안은 어떨까? 그건 행성이라기보다는 행성의 모양을 한 블랙홀 같았다.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나는, 이미 궤도에 말려든 셈이 아닐까. 나는 끌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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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그라함의 기일이었다. 나는 먼지가 더께진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기본 연결음이 놀리듯 길게 이어져서 끊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려놓으려던 참에 달칵 소리와 함께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묘한 안도감이 들면서 어깨의 힘이 빠졌다. 여보세요?

"응, 나야."

너야? 적당한 말을 입 안으로 굴려 보는 그녀의 찡그린 얼굴이 눈에 선했다. 지금이라도 끊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기다리자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이 말을 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에게 상황을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그래 보았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서 우리는 전화선을 사이에 두고 또 다시 망설였던 것이다.

그녀는 지난번 통화에서도 그렇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몇 년 전에 갓 이사해서 나무 박스 두어 개를 품에 안은 채 인부들에게 뭐라 소리치는 그녀를 뒤로하고 휴대폰 배터리부터 갈아끼운 것은 나였다. 그것부터 하지 않았더라면 301호가 아니라 302호라고 전화한 그녀의 남편의 뒤늦은 노력은 허사가 되었을 터였다. 나는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올 걸, 하고 하루 종일 되씹었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는 부부의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거실 쇼파에서 그라함이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 후 뒤늦은 신혼 생활에 푹 빠진 그녀에게 전화하는 일은 한 달에 두 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점차 아무도 없는 집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톱을 물어뜯으며 친구나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보다 텔레비전을 켜고 멍하니 뉴스를 보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확인하려면 그 편이 나았다. 사상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면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눈을 붙이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문이 열렸다. 열리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너무나 당연한 일에 감사해하고 매달려 왔다는 걸 깨달은 때는 너무 늦은 때였다.

"아무 일도 없어."

장례식 날에 그녀는 나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보기 흉하게 코를 훌쩍이며 정말 안됐다고 울먹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열 번 정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어야 했다. 텅 빈 관에다가 뿌릴 뼈마저 없었지만,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어쩌면 내심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집에 가서 좀 자고 일어나면 그라함이 들어올 거야. 뭣 하러 장례식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까지 벌였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지도 몰라.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자 그녀는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힘들 때 꼭 전화하라고 덧붙이고는 집으로 가 버렸다. 나는 전화하지 않았다.

"이번 주에 시간 있어?"
이제야 좀 사람이랑 말을 할 기운이 생겼나 봐? 그녀가 말했다. 화가 난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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