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바닥 틈새로 흘러 들어오던 밤에 나는 아직 나 말고 깨어 있는 사람이 나와 함께 있구나, 하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만 잠에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일 해가 뜨면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가 하루의 끝에서 하는 생각들과 이따금씩 내뱉는 한숨의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이틀 전 그는 하워드에 대해, 그가 여럿과 함께 즐겨 찾던 술집과 그 자신은 모르는 말버릇과 짤막한 유언, 죽음, 일상의 소소한 습관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쪽이 좋았다. 군인으로서든 그냥 사람이든 하워드라는 남자는 나보다 그라함이 더 잘 알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그는 4년 전 참석했던 메이슨 씨의 장례식에서 결국 이야기를 멈추고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물을 한 잔 따랐다. 기차 사고였다고 했다. 그 날 메이슨 준위는 고함을 지르지 않는 대신 전화기를 붙들고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라함은 그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덥군." 그가 말했다.
"어째서 하워드를 기억하는 게 이렇게 간단한 일일 수 있지?" 그는 지친 얼굴로 컵을 들었다.
"얼음 넣어요. 오전에 얼려뒀어요." 탁한 더위가 모두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냉동실에서 얼음을 세 개 꺼냈다. " 약속을 했는데, 앞으로 내 남은 생 동안 어떻게든 이루어 주어야 하는 그런 약속이라네. 하지만 지금 이건 그냥 이야기일 뿐이야. 어째서 지금의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건 이것뿐인 건가?"
그건 슬프기 때문이라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 그는 여느 때 같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워드 메이슨이 가장 위험했고 목숨을 걸어야 했던 임무에서 어떻게 살아돌아왔는지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워드는 굉장히 유능했고 위험을 잘 스쳐보낼 수 있을 만한 순발력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그가 죽기 전의 이야기다. 단 한 순간에 그의 운은 완전히 바닥났다.
"그럼 나는 당신에 대해 누구에게 이야기하죠?"
"누구든지." 나는 그 밤 내내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를 들었다. 컵 속의 얼음이 녹아내렸다.
나는 문을 닫고 눈을 감았다. 먼 곳에서 그가 불을 끄고 창문을 살짝 여는 소리가 졸음에 잠겨 먹먹해진 귀로 다가왔다. 여름의 밤은 길고 또한 무덥다. 버티기 힘들어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바람을 맞으면 나아질까,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차로 묘지에 갔다. 아직 단단히 굳지 못한 흙이 젖어들어가며 비 오는 날마다 돌아오는 묘한 냄새가 났다. 나는 묘지 주변에 가면 다들 으레 느끼는 냉기 한가운데에 서서 무덤 속에 잠든 하워드 메이슨을 위해 잠시 기도했다. 무거운 공기를 가르는 딱딱한 목소리가 바로 이 자리에서 추도문을 읊을 때, 그라함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다고 그가 말했다.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꽃을 내려놓았다. 그의 차례는 빠르게 돌아오고 빠르게 끝이 났다. 그 후, 그는 한 번 더 묘지로 갔다. 그리고 다시는 말을 하지 못 할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오늘은 세 번째였고 그는 그저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내가 알기론 그는 아직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 적어도 오늘은 더 시도해볼 수 없을 터였다.
"내가 틀렸군. 전혀 간단하지 않네." 그라함은 차가운 돌에 손을 가져다댔다. 주변의 모든 게 묵묵히 가라앉고 있었다. 가장 위태롭게 좌초해버린 배는 그 사람이었다. 젖어가는 잔디 위에 주저앉은 그는 마치 바닥으로 빨려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두 눈은 흙 속에서 끝까지 썩지 않고 밤이면 위를 향해 형형히 빛날 터였다. 그것 참 쓸쓸한 일이었다. 나는 잠시 몸을 뒤로 돌렸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죽은 젊은이들의 수없이 많은 가족들은 이미 울음을 멈추고 집에 돌아간 지 오래였다. "다들 어려워해요. 몇 번이고 시험해 봐도 막상 정말 준비됐다고 느낄 땐 아무 것도 못 하잖아요. 안 그런 사람은 없어요. 괜찮아요."
"그런 건가."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잠시 잊어버려요.
잠깐 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비바람에 부러진 나무 냄새가 나는 좁은 오솔길을 통과해서 천천히 입구로 돌아갔다. 미지근한 비가 콧등에 하나 둘 떨어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한 안개는 어느 곳에나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우산이 없었다. 챙기는 걸 잊었다고 말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들면 눈으로 물방울이 들어오는 날씨에 어떻게 우산을 잊었을까. 어떻게 무덤가에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