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츄(@_Trapezium)님께 드립니다.


“빅터, 가만히 좀 있게. 나랑 비슷한 덩치의 성인 남성을 안고 눕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흠, 좀 더 붉게, 좀 더 파랗게, 더 보랏빛으로, 빛나는 초록색, 창 밖에선 어린 아이가 나무통을 붙들고 토하고 있고 저택의 유령들은 입에서 양잿물과 연기와 넝마 조각을 뱉지. 다음에는 누가 관에 들어갈지 노인의 틀니를 걸고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면서 한 방씩 쏘는 거야. 빵야!”

“계속해.”

“이것 봐, 간지럽지 않아? 간지럽지 않냐고? 맘만 먹으면 이 손가락…붓으로 자네 귓바퀴라도 간질일 수 있는데. 그것도 파란색 물감으로 말이야. 자네 혹시 파란 귀를 가지고 싶지 않나? 그래, 유령들은 사실 모두 푸른색 오라를 풍기는 중이었지…그들의 몸에서는 갓 구운 레몬 파운드 케이크 냄새가 나서, 그들이 주변에 있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안 그러면 긴 빵 칼로 허공을 멍하니 찌르게 될 지도 모르네. 케이크는 달콤한 입에, 술은 정수리에, 소금은 유령들에게.”

“계속해.”

“요컨대 전세계의 모든 덜 구워진 파운드 케이크를 증오하는 붉은 왕이 이 세상에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는 얼굴보다도 큰 콧수염과 콧수염만한 발, 그리고 발 만한 새끼손가락을 가진 아주 멋있는 황제일세. 내가 왕이라고 했나, 빅터? 왕이 먼저인가, 황제가 먼저인가, 아니면 콧수염이?”

“왕.”

“좋아. 그는 흙에서 칼을 뽑고는 케이크를 정확하게 반으로 갈랐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케이크는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고 덜 익어서 뭉그러진 단면이 난잡하게 까발려졌지. 붉은 왕은 혀로 칼을 핥았어. 그는 사실 덜 익은 케이크 반죽을 먹는 걸 즐겼거든.”

“간지러워, 앙리.”

“그래? 빵을 자른 바로 그 위대한 칼도 딱 자네처럼 속삭였지.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모두가 그걸 들을 수 있었지. 사마귀의 눈을 찌르던 개미도, 나무를 오르던 공작 부인도, 탑에서 뛰어내린 젊은 회계사도, 밑에서 그를 저주하던 그의 아버지도, 사과를 베어물던 그의 약혼녀도, 어머니도, 바다를 질주하던 기차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뱀도. 그리고 작은 발을 바삐 놀리며 붉은 폭군에게로 달음박질치던 현자들도. 그들은 모두 돼지였지.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말일세. 무슨 색이었을까?"

"흠."

"물론 초록 색이었지. 그곳의 진흙탕은 마치 초록 페인트를 들이부은 것 같이 생겼거든. 그들은 정신없이 뒹구는 와중에도 코안경을 제대로 잡고 미간을 찌푸렸네. 한 발에 든 중요한 국가 서류가 사실 백지였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말이야. 그들은 모두 마법을 쓸 수 있었지. 하지만 국무 장관으로서의 일처리는 형편없었지."

"그럼 유령들은?"

"유령들은 다 함께 둘러앉아 일출을 지켜보다가 울기 시작했지. 대부분은 안전하게 무덤으로 들어갔지만 일부는 자기가 외출한 틈을 타 빈 무덤에서 아기를 어르던 나쁜 구울들을 쫓아내느라 여념이 없었고, 남은 두엇은 그냥 서로의 눈물을 핥아주었네."

"간지럽다니까, 앙리."

웃지 말고…나까지 웃게 되잖나. 이런 진지한 서사시를 읊으면서 웃으면 쓰나. 여하튼 다들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거지. 붉은 왕은 나무 밑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서 칼을 꿀꺽 먹어치운 다음 잠에 빠졌네. 이제 그를 깨울 사람은 붉은 여왕 뿐이야. 돼지들은 모두 함께 안경점으로 달려가서 예쁘고 빛나는 새 안경을 맞추었네. 빅터, 이제 자야지. 잘 자.


앙리 뒤프레는 말 없이 웅크린 등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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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04


따지 않은 통조림이 먼지구덩이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발로 으깼다. 주황색 국물이 단 내를 풍기며 흘러나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것을 소중히 손에 넣었다. 앙리, 이 가엾은 동물을 좀 보지 않겠나. 자네가 이걸 죽였어. 앙리는 내 곁에 쪼그려 앉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통조림을 땅에 묻었다. 그의 영혼에 안식이 있기를. 

150211

어째서인지 새벽마다 한 가지 기억만이 톱니가 맞물리듯 눈 안쪽에 떠오르고는 했다. 날짜도, 시간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그 일 중에 어째서 단 하나의 장면만이 머리를 채우는지, 아, 울컥 퍼져나오는 거무스름한 잉크, 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쓰여지는 첫 글자, V. 이젠 모두 옅어진 찰나의 시간이 어째서 아직도, 어제 일 같은지. 빅터 프랑켄슈타인, 하고 빼곡히 채워진 종이를 발견한 것은 이틀 전이다. 입과 머리가 가득 찼다. 내 이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고 또 살아서 나라는 인간의 처음과 인생과 매 순간 느꼈던 감정과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깨끗이 지워 버린다 해도 그것만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벌어진 입술에서 혀 끝으로 튀어나오던 작은 목소리, 빅터. 그 후의 너의 표정, 이어지는 너의 몸짓. 다시는 살아 있지 못할 너의 모든 것.


은날님께 리퀘 받았던 서재키스 앙빅......은 서재키스인데 왠지 그날따라 스파이를 존나 끼얹고싶어져서 끼얹음...망...설정구멍주의 나는 첩보물이 뭔지 1도 모른다

150222

금요일 저녁 8시 46분을 향해 시간은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서재 문 앞에 서서 앙리 뒤프레가 되뇌였던 다짐들은 약 10분 정도 전에 깃털처럼 날아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다짐이 적힌 작은 깃털들이 '뜻밖의 계획 실패' 라는 이름의 큰 벽난로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인생이란 원래 맞닥트리는 모든 것이 내게 엿을 먹이는 상황이 대다수 아니었던가. 예를 들면, 일을 핑계로 한 데이트가 박살난다거나.

"맙소사. 접선 10분 전 교체라니 스위스의 어느 윗대가리가 고급 인력을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굴린단 말입니까. 앙리 뒤프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담당, 이걸 깨먹으시면 어쩌냐는…"

도청 장치가 없는 것은 확실하니까…아마 그럴 것이다.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고풍스러운 자수의 테이블보에 흉하게 눌어붙은 자국이 남았다. 등 뒤의 카메라에서 작게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각도를 바꾸어 그의 담배가 테이블보에 입힌 피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재 보려는 수였다. 여전한 정적 속에서 그는 약 500m 떨어진 골방의 비명을 상상했다. 뭐, 빠져나가는 돈은 내 통장의 것이 아니니까. 그는 그저 보고서에 한 줄을 덧붙이기만 하면 되었다. <재떨이가 없었음.> 그리고…

그는 뒷말을 삼키고는,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등을 기댔다.

앙리 뒤프레는 목에 걸린 신분증을 자연스레 빼내어 손수건으로 닦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 구멍이 뚫린 책등 안에서 붉은 불빛이 번쩍이는.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내가 책임자라면 아마 이 서재의 모든 책 속에 카메라를 심었을 테지, 그러니 이해한다, 라고 그는 조용히 생각한다. 어차피 보라고 한 행동이었다. '그쪽' 사람들도 이미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목 아래를 내려다보자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자신의 사진과 어딘가 미묘한 느낌의 이름이 새겨진 그것이 보였다. 시드니 칼튼이라니. 물론 가명이었다. 지금은 그가 최근 48시간 동안 그 신분증으로 제네바 안을 아무 문제 없이 돌아다녔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려 줘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바로 이 순간까지도. 요컨대 과하게 편집증적인 보안국 사람이란 길에 흔히 밟히는 흙이나 자갈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까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데이트 요청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그를 펄쩍 뛰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사건인 게 맞았다. 지지난번 접선 때 종이 봉투 아래에 넣은 하트 모양 포스트잇에게 키스라도 해 주고픈 심정이었다. 차? 커피? 빅터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커피. 사랑에 빠진 바보들이란 실수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위대한 우연의 일치인지 우주의 도움인지, 커피. 하고 말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입을 찍은 카메라는 한 대도 없었다. 현대 기술이여, 영원하라.

그래 봤자 앙리 뒤프레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찰국 본부로 뛰어들어와서 서류 가방을 내던지고, 다음 접선 때는 커피를 달라구요, 차는 맛이…더럽게…없단 말입니다!-라고 외치는 것 뿐이었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의 사무실 책상 속 가장 깊은 곳의 노랑 별 모양 메모지에는 한 줄의 글귀가 새로 쓰여졌다. '곁들일 것은?'

그런데, 이 집에 발을 들이기 10분 전에 받은 문자는 그의 어깨를 바닥 끝까지 내리누르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고작 네 글자였지만 그는 그것들이 거대한 바윗덩어리 네 개처럼 느껴졌다. <담당 교체.> 그의 마음 속 냉장고에서 일주일 간 소중히 간직해온 킷-캣이 소량의 부스러기만을 남긴 채 바삭 부서졌다. 그렇게 된 일이었다. 앙리 뒤프레는 이 모든 상황을 보고서에 추가로 기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앞서 밝힌 대로, 한 줄이면 되니까. 자, 따라 해 봅시다. "재떨이가 없었습니다, sir."

시작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보안국과 감찰국의 타겟이 겹쳤고 한참의 '어리석고 비효율적인 난투극' 끝에(이 표현을 쓴 것은 빅터 쪽이었다)두 명의 첩보원은 각자가 원하는 정보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뒤로 이어진 쓸모없는 수많은 회의 끝에 보안/감찰국은 서로 일부 협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인류가 달에 첫 걸음을 내딛은 이후의 가장 큰 발전이라고 직원들은 한동안 쑥덕거렸다. 60년 전 감찰국이 보안국의 타겟을 미리 '삭제' 해버린 뒤로 두 기관은 냉전 상태였다. 이번의 애매한 협동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예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일단 일은 해야 하니까 모두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보이 미트 보이, 비밀스레 얽히는 손끝, 비밀 메모, 찰나의 티타임, 그리고 기타 등등의 화학 작용이 앙리 뒤프레와 빅터 프랑켄슈타인 사이에 생겨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노크하자, 그는 편히 기댔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서류 뭉치는 아까 그가 담배를 비빈 테이블 위에 얌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저걸 집어서, 건네고, 나온다. 그러면 밤 9시 15분일 테고 그는 차를 몰아 최대한 먼 곳의 바에 가서 한잔 할 계획이었다. 여기까지 쭉 정리하자 세상이 온통 어두침침해 보였다. 아, 밤이라서 그런가. 어쨌든. 퇴근이란 참 좋은 일이다.

"열려 있습니다." 도청 장치도 없구요. 아주 좋죠.

"알아."

완벽한 O를 그리는 앙리 뒤프레의 입을 무시한 채 빅터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앙리 뒤프레의 따듯한 분홍빛 마음 속에서, 부스러졌던 킷-캣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생겨났다. 응, 그렇지. 킷-캣 녹차맛은 최고야. 그렇다니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짓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차분한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곧바로 그의 팔과 허리 사이에 끼어 있는 갈색 서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저 안에는 최근 4개월 동안 보안국과 감찰국 양측의 모든 CCTV를 해킹한 해커의 신상 정보가 들어 있을 터였다. 일을 벌리는 건 개인의 자유니 그건 그렇다 치고. 항상 문제는 걸린 다음에 터진다. 놈은 분명 내일 오전 12시가 되기 전, 정확하게는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스위스 안은 물론이고 타국의 모든 피난처와 키우는 강아지까지 모두 빼앗길 것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동정심이 드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인가. 그는 딱히 그 주제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빅터, 그러니까..."

"앙리, 5분이네."

"응?"

"5분 내로 끝내야 해. 궁금한 건 없겠지만 질문해도 좋네. 물론 자네 윗사람이 제대로 일을 했다면야 엄청나게 빠르게 끝나겠지만."

"어?"

빅터는 작게 한숨을 쉬고 가지고 있던 서류 봉투를 앙리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뚫어져라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집어든 그는 풀로 봉해진 입구를 뜯고 안을 보았다.

뭐라 적혀져 있었다.

<자네 얼굴을 찍는 카메라는 없네. 5분 동안 궁금한 게 있으면 이야기 해. 돌려 대답할 테니 잘 알아듣게.>

"자, 그럼…이야기해 볼까."

그렇게 말하는 빅터의 표정은 차분하다 못해 음울하기까지 했다. 앙리는 고개를 갸우뚱 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내 얼굴은 안 나온다고? 그럼 지금 카메라는 하나만 활성화 되어 있는 건가? '녀석' 이 일을 꾸미다가 실수로 뭔가 잘못 건드렸군. 안 그래? 걔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서류는 잘 있군. 흐음." 그는 지루하다는 듯 입술을 손끝으로 두들겼다. 그가 배우였다면 얼마나 멋졌을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다니." 그가 말하는 '이런 일' 은 물론 예기치 않은 엮임이다.

"그러니까 뭔가 잘못된 건가? 교체된 사람은?"

"그건 말할 수 없네. 당연하지만. 우린 지금 이렇게 같이 앉아서 하릴없이 별 뜻 없는 얘기나 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감안국'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야. 영원히 없을 테지. 그래…"

" '별 뜻 없이' 내가 뭘 가져왔는지 얘기해볼까?"

"좋…아." 빅터는 눈을 잠깐 게슴츠레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쪽지를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그거 좋지, 그래…나도 여기 오래 있긴 싫으니까. 할 일 빨리 끝내자고."

"왜 자네가 온 거지? 킷-캣은 잠깐 잊어버리고. 흠."

"귀찮게 다 설명해줘야 하나? 그 해커는 별 힘도 못 쓰고 잡혔어. 물론 우리 쪽의 성과가 컸지. 중요한 건 내가 오는 게 맞단 거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닌가."

"당연하지. 다음 주에 데이트 할까?"

"뭐?"

"데이트."

"…………글쎄,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자, 서류 줘 봐. 읽고…조금 생각, 해 보는 시간을…가져야. 알다시피 이건," 앙리는 빅터가 손에 든 서류를 살짝 흔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확인은 중요하니까."

"내가 받은 변경 문자는?"

"그래, 맞아. 그 해커 녀석 명의로 핸드폰이 하나 개통되어 있었더군. 물론 지금은 정지시켰지."

"대신 오기로 한 자네 쪽 요원의 코드네임은 잭 더 리퍼였지."

"음, 내 생각에 이제 이 이상한 대화를 끝낼 때가 온 것…같아. 이제부터는 그냥 말할 테니 잘 들어. 보안국에 스파이가 있었네. 그 쪽 경로를 통해 해커에게 CCTV를 전달한 모양이야. 해커의 뒤를 봐주는 제 3세력에게 보안국은 제어당하고 있고, 자네가 받은 변경 문자도 그 약소한 연장선이지. 사실 안 보냈어도 상관 없지만, 자네의 실망한 표정이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르지. 어쨌든 나는 자네가 오기 30분 전에 '누군가' 의 하수인이자 오늘 날 대신할 뻔 했던 잭 더 리퍼를 기절시켜서 마당의 수영장에 던져넣었네. 그러니까…나한테 키스하게, 앙리."

빠르게 말을 쏟아낸 빅터를 보며 앙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누가 누가 입으로 더 완벽한 O를 그리나~ 대회 2부인가.

"키스하라고?"

"그래, 이리 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다가온 빅터는 앙리를 일으켜 세우고는 제일 가까운 벽으로 밀었다. 쿵 소리와 함께 책 몇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내리자 넥타이를 쥐고 입술을 깨물며 서 있는 빅터가 보였다. 아니, 그러니까…

"해."

"왜?"

"하라면 해."

두 번. 두 번 확인 사살 당했다. 그 정도면 후폭풍 걱정은 안 해도 정말 괜찮다는 이야기다. 등 뒤의 책이 빠진 자리에서 카메라가 윙 하고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등으로 꾹 막으며 말했다.

"그러죠."

그래서 앙리 뒤프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키스했다. 보고서 위에서 만년필이 잉크를 쏟으며 춤을 춘다. 이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으며, 정확히는 본능이…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보고서가 아니라 시말서를 써야 할 판이다.나중에 그는 이 일을 회상하며, 조금 더 덜 긴박한 상황이었다면, 하고 후회하고는 했다. 어쨌든 첫 키스니까. 처음은 언제나 예상치 못할 때에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술이 떨어지고 그들은 방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딱히 바뀐 건 없어 보였다. 앙리는 몸을 돌려 등을 찌르는 카메라를 손으로 퍽 쳤다. 뭐 한 거야? 빅터가 묻자 그는 그 빈 자리에 책을 슬쩍 밀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귀를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렸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긴, 앙리 뒤프레. 자네도 정보국 요원이면 생각을 해 봐." 그는 한숨을 쉬었다. "키스가 안 먹힌 거지."

"키스가 대체 어떻게 먹힐 거라고 생각한 건데? 아니, 애초에 의도가 뭔가, 그거?"

"시선 끌기? 놈의 판단에 혼란을 주기 위해?"

"아무래도 그건 틀려먹은 것 같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뛰어야지."

"좋아."

그들은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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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츄님께 리퀘 받은 크리빅터입니다!

시선이 닿은 곳에 네가 있었다. 그 나무는 이 숲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팔을 두르면 그 거대한 위압감에 쉽게 질려 버리곤 하던 그 나무다. 나무를 베면 드러나는 속살엔 엄청난 양의 나이테가 겹겹이 아로새겨져 있을 터였다. 거의 돌처럼 굳어진 껍질과 겉으로 튀어 나와 반질해진 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나는 한 발짝 발을 내딛었다. 바삭, 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네게로 가까이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쉴 새 없이 무언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공명하는 듯 했다. 안 되는데, 나는 생각했다. 널 깨울지도 몰라, 나무 둥치에서 자는 아이.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 더 이야기했다. 나무 둥치에서 웅크려 자는 아이.

네 얼굴을 톡 건드리자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버렸다.

"아."

마법 같은 일이라고, 고요히 생각한다. "춥지 않아?" 코트를 벗어서 네게 건넨다. 낡고 더러워진 코트, 그러나 나는 계속 멍하니 내밀었다. 주인을 찾아 준 것 뿐이라고, 그런 생각이었다. 이건 네 거야. 아이는 더 묻지 않고 코트를 받아들어 어깨에 걸쳤다. 당연하지만 크기가 너무 컸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되었다.
"손이 안 보여." 너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추운 것 보다는 나아." 너는 이어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손을 잡고 숲을 걸었다. 발소리와 함께 들리는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는 한 사람 어치 뿐이었다. 너는 너무나 작아서 몸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거나, 아니면 유령인 것이 분명했다. 소매를 걷자 드러난 네 손은 아직 차가웠다. 내 손 역시 차가워서 너를 데우지 못한다. 미안하다고 말하자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빽빽한 나무가 눈에 닿기 무섭게 등 뒤로 빠르게 사라져간다. 달릴 때에나 볼 수 있을 광경이었다. 나무가, 숲이, 세계가 우리를 지나친다.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나는 오로지 둘뿐이었다. 우리는 잊혀진 여행자다.

시간이 다른 때보다
천천히 흘러갔다

네 발소리가 자박자박, 하고 났다. 고르고 예쁜 소리가 난다. 네 손을 꼭 쥐었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꾹 하고 손가락을 누른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뒤를 돌면 네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돼.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펼쳐진다. 너는 눈 녹은 듯 사라져 있고 숲은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숲은 회전하며 나를 미로 속으로 들여보낼 것이다. 기계 소리와 함께. 어쩌면 이 곳은, 거대한 기계 안이 아닐까. 해는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진다. 해가 지면 달이 나온다. 달이 지면 날이 밝는다. 톱니에 그런 것들이 쓰여져 있는, 그런 곳일 지도

몰랐다.

자, 다 왔어, 라고 말하며 나는 뒤를 돌았다. 이제 너를 잃어버릴 염려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눈 앞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 눈에 내 눈을 맞추자 너는 그제야 입을 연다. 무서워.

그렇다, 동굴이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려는 참이었다.

"비가 올 거야."

네 손을 잡고 약하게 당겼다.

"추운 저녁이야." 너는 발을 옮긴다. 우리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톱니바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허기를 채우고 구석에 웅크렸다. 덮을 것이 딱히 없어서 걸치고 있던 코트를 썼다. 너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직 온전히 잠에 들지는 않았다. 네 곁에 앉았다. 아, 하고 문득 네 손가락을 쥔다. 미지근해졌다. 그리고 참 작았다.

"노래 불러 줘."

나는 아는 노래가 없어. 너는 작게 보챈다. 불러 줘.

가사가 없는 멜로디를 입에 머금는다. 한 농가를 지나가며 들었던 노래다. 내 손이 코트 위를 향한다. 토닥이는 손 아래의 코트 아래의 작은 아이, 그게 너였다. 네 존재가 동굴을 덥힌다. 나 역시 덥히고 있다. 네게서 빛이 퍼져나왔다. 흔들리는 그 빛은 곧 꺼질 것 처럼 보여서, 나는 결국 노래를

시작했다.

어때. 괜찮아? 환상 속에서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웃는다. 누구한테 배운 거야? 나는 대답한다.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내가 잠자리에 들 때마다 곁에서 이 노래를 불러 주셨어. 나는 항상 듣다가 어느 새 잠들었기 때문에, 노래의 끝 부분을 아직도 알지 못해. 괜찮은 거짓말이었다. 내겐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아이는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너는 내 눈 앞에서 자라났다. 손이 단단해지고 얼굴이 바뀌고 팔이 옷 밖으로 튀어나왔다. 웅크린 몸을 전부 덮었던 코트는 반으로 줄어들어 커버린 몸을 겨우 덮었다. 너는 아이에서 소년이 되었고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그저, 동굴 한 켠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너를 깨워야겠다. 살짝 벌어진 입가에 손 끝을 대었다. 깨어난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빅터."

너는 눈을 떴다. 너를 재우던 내 손은 돌연 허공을 향한다.

"나, 숲에서 길을 잃었어. 그래서, 이 동굴로 들어왔어."

아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노래, 해...주세요. 아버지. 잠들기 전의."

너는 곧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코트를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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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앙빅/1  (0) 2014.11.23
헝그리버스(http://clzlsajrrhtlvdj.tumblr.com)기반 류한앙빅. 약 고어 주의!

너는 부수어졌다. 내 손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그 점이 나를 슬프게 했다.

깨끗하고 납작한 접시 하나를 살짝 집어들고 실험실로 향했다. 손에 영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혹 실험실까지 가기도 전에 떨어트려 깨질까 하고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접시는 얼마든지 더 있으니 상관은 없다. 내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일은…

…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황망하게 실험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사형장에서 이곳까지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무던히 애를 썼던가. 들쳐메었던 몸을 철 침대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던 건 30분 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 후 방을 나와 문을 잠가 두고 부엌에서 접시를 가져왔다. 그 사이에 어느 누가 어느 곳으로 들어와서 그의 몸을 가져갔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열린 창문이 눈에 띄었다. 조금 높지만 도구를 사용하면 충분히 제 3자가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인기척들…

비밀리에 운반하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잘못 들은 것으로 치부했지만 그 중 하나가 사실 진짜 인기척이었다면, 그래서 뒤를 밟힌 거라면.

실험실 한가운데에 서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난 뒤에 나는 놀랍게도 꽤 침착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기된 의혹들은 던져진 직후 해결책이 나왔다. 누군가 내 뒤를 밟았다면 그는 실험실로 들어와 몸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불러 내 성으로 쳐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열린 창문을 다시 확인하러 고개를 들자 그것은 자물쇠까지 달린 채로 고요히 닫혀 있었다. 거짓말처럼. 아무래도 철 침대가 아닌 다른 곳에 놓아두고 잊어버렸던 것이 틀림없었다.
알아차렸다. 내 등 뒤에 몸이 놓여져 있다. 아마도 벽 쪽 의자일 것이다. 나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걸로 됐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과도한 흥분 상태는 좋지 않다. 틀린 것을 옳다고 믿게 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믿게 되어버린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킨 뒤

그 때 조금만 더 의혹의 꼬리를 잡고 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른 대답을 얻었을까.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실험대로 갔다. 거기에는 네가, 머리가 있었다. 접시를 내려놓고 머리를 얹었다. 피가 흘러나와 접시를 적셨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손수건을 꺼낼지 아니면 내버려둘지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너는…머리는 눈을 감고 있나? 뜨고 있나? 보이지 않는다. 피를 닦아내야 보일 심산이다.

그래, 나는 간간히 어떤 상상을 하고는 했다. 네가 가볍게 입을 맞추던 때도, 내 부름에 뒤를 돌아 볼 때도, 함께 이야기하던 때 역시, 그리고 네가 단두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때. 네 머리를 품에 껴안고 싶었다. 네 단면은 그렇게 가지런하면 안 되었다. 조금 더 헤쳐지고 너저분해야 했다. 상상 속의 나는 웃고 있는 네 입에 입을 포갰다. 타액 대신 나쁘지 않은 쇠 냄새가 내게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나 환상일 뿐이다. 나에게 남은 것은 조금 고인

피에 손가락을 적셨다. 혀에 가져다대자 그제서야 나는, 네 피가 더 이상은 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네 살을 베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네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없고...앞으로는. 그 생각을 하니 조금

슬퍼졌다.

등 뒤에는 네 몸이 있다. 그걸 바닥으로 끌어내려 안을 열어젖히고 심장을 쥔 것은 나다. 다른 사람은 없다. 접시는 네 목을 올려놓기 한참 전부터 내 손에 의해 더럽혀져 있었다. 프랑켄슈타인 성의 입구를 생각해 본다. 문을 여는 것은 손이 미끄러웠던 탓에 조금 힘이 들었다. 한 발을 내딛어 들어오자마자 나는 느꼈다. 네 숨결과 꿈과 말들은 성 안 어디에나 있었고, 내 품에 있는 이 몸 속에도 역시나 존재했다. 존재했었다. 나는 그것들을 가질 권리가 있다. 그것들을 내 피와 살의 일부로 만들 권리가 있다.

식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불만스러운 듯 식당에 들어온 우리를 노려본다. 하지만 화가 나 보이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누나와 나를 부른다…오늘의 후식은 사과 파이란다, 그러니 어서 들렴. 그건 어느 날의 기억인가. 나는 먹고 또 먹었다. 칼과 포크는 실험대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집어들었다. 구역질과 함께 억눌린 신음도 함께 흘러나왔다. 네 형체는 점점 흐려진다. 사라지고 일그러진다. 나는 너를 잠깐 옆으로 밀어 두고 바닥에 주저앉아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 앞이 어지러웠다.

너는 이제 내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기뻤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팔인가, 아니면 앙리 뒤프레의 팔인가. 둘 다의 것이자 아무것도 아니었다. 피를 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바늘도 괜찮을까. 이곳에는 무엇이든 있었다. 뭐든 구할 수 있었다. 맛은 어떨까.

나는 마지막으로 나를 먹어치웠다. 식사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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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28Qi4jLtigc&feature=youtube_gdata_player

어쩌면 무언가의 징조일 것 같기도 하다고, 앙리 뒤프레가 어느 날 말했다. 어떤 징조? 우리가 저걸 영영 못 열어볼 거라는 징조 말인가? 내가 되물었다. 그 편이 더 나았다. 고집스레 닫은 입 안에는 끽해봤자 좀벌레 한 뭉텅이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닌 모양이었다. 빅터, 정말 기억 안 나나? 그래.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 했다. 그의 시선은 서랍의 녹슨 손잡이와 바닥의 얇은 틈과 먼지 쌓인 책장 사이를 기민하게 훑었다. 실패할 걸. 나는 웃었다.

그러나 열쇠는 마치 처음부터 악기와 한 몸이었다는 듯 부드럽게 맞아떨어졌고, 굳었던 금속 줄은 진동했으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꿈에서 깨어난 것은 바로 직후였다. 확실히 어느 정도는 그의 말이 맞았다. 이것은 징조다. 좋고 나쁨을 분간할 수 없는 어떤 징조.

어릴 때 한동안 그런 꿈을 꾸었다. 거대하고 시커먼 나무 악기가 사람을 몸 속에 집어넣고 천천히 씹어먹는 내용이었다. 나는 발돋움을 해서 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언가 미끈한 것이 손에 잡혔다. 꺼내 보니 배가 열린 개구리였다. 그것은 아직 숨이 붙어 있어서 작게 팔다리를 옴찔거렸다. 꼭 개구리 뿐만 아니라 작은 곤충이나 죽은 생쥐가 걸려들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사람이 잡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 손을 넣어 보았다.

이번에는 무엇이 걸려들까.

손바닥에 열쇠를 올려놓고 먼지를 털어냈다. 앙리가 눈을 크게 떴다. 안 쓰던 실내화 속에서 찾았네. 줘 봐. 나는 선선히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것을 쥐고 등불에 비추어 보았다. 금색이었다.

무거운 뚜껑을 들어올리고 지지대를 세우자 내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생명체의 몸 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들은 잘게 소화된 지 오래되어, 남은 것은 먼지뿐이었다. 나는 작은 솔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현을 주욱 그었다. 괴상한 소리가 났다. 반대편은 손이 닿지 않아서 조금 더 긴 솔을 찾아야만 했다. 먼지를 모두 털어내고 안쪽과 바닥을 닦았다. 이쪽 건반이 안 올라 와. 앙리가 왼쪽의 흰 건반 하나를 슬쩍 눌렀다. 건반은 쑥 하고 내려가더니, 한참 뒤에야 슬쩍 위로 솟아올랐다. 영 맛이 간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다른 건반 몇 개도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습기라도 찬 건가? 앙리가 그렇게 말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둡고 높은 천장에서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그 후 우리의 관심사는 낡은 성 보수로 물 흐르듯 이어졌고, 악기는 잠시 잊혀졌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으니까. 앙리가 말했다. 침실 벽 안쪽에는 쥐가 많았다. 밤마다 작은 발로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침실을 메우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다음 날 쥐덫을 설치하고 한 쪽 벽을 거의 뜯어내자 그것들의 기세는 조금 수그러들었다. 적어도 거슬리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이 새롭게 나를 밤마다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이었다. 연주가 아닌, 산발적으로 아무 음이나 눌러대는 소리였다. 간격은 일정하지 않았다. 앙리일 거야. 이 성에는 나를 제외하고 앙리밖에 없다. 앙리가 등불을 악기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는 장면을 상상한다. 앙리의 손이 건반을 훑는다. 그가 미처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건반 뚜껑이 세게 닫힌다. 손목이 부서진다. 그것이 또 무언가를 먹는 중이다. 이것은 악몽일지도 모른다. 땀 범벅인 채로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시계를 확인한다. 같은 시간이다. 나가 보지 않는다. 문고리는 바로 앞에 있다. 돌리지 않는다. 앙리일 테니까. 앙리, 내 하나뿐인 친구, 손을 넣고 붙잡아 꺼낸다. 앙리의 목이다. 옆에는 으깨진 손도 있다. 깨어난다.

몇 주 내내 들었던 소리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너무 간단해서 맥이 빠질 정도였다. 조율을 좀 했지. 사람을 불러오기는 좀 그렇잖나. 그는 머쓱하게 웃고는 의자를 빼어 앉았다. 어제 끝났네. 깊이 잠드는 것 같아서…나는 손을 내젓고는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내 입을 빌리는 것 같다는 점만 빼고는 괜찮은 마무리였다. 들어 보겠다고 하자 그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버지가 꽤 좋아했던 곡이었다.

앙리, 잘 들었네. 연주를 마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목이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천천히 집었다. 목 아래부터는 어디로 갔지? 활짝 열려 있는 뚜껑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자 지지대가 뚝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뚜껑이 쾅 소리와 함께 닫혔다.

그것은 그 일련의 행동을 서너 번 반복했다. 마치 굶주린 입 같았다. 닫힌 틈에서 무언가 새어나왔다. 그것이 날뛰기를 멈추자 다시 한 번 다가가서 그것의 뚜껑을 열었다. 배가 갈린 개구리도 아니고 꼬리가 잘린 생쥐도 아니고 등이 굽은 채로 죽어 있는 벌레 무리도 아닌 그 무엇.


오늘도 쥐 떼가 극성이다. 쥐덫 속에 치즈를 넣고 약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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