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독성을 파개한다

Devil may care

신부님, 신부님, 신부님, 우리 연기를 좀 해 보자구요. 신부님은 제 아버지고 저는 신부님 아들인 걸로. 착한 아들이요. 착하고 말 잘 듣는 아들. 준호가 의자에 앉은 범신의 무릎에 매달린 채 제 이마를 부비며 말했다. 범신은 제 옷자락에 밴 담배 냄새가 며칠 전부터 전혀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벽 속에 아마 쥐가 살 작은 여관 안에는 담배 연기가 빠질 날이 없었다. 이것 또한 그들에게 들러붙은 것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수많은 징표들, 그들이 아주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서로만을 눈에 담기 시작했을 때에 돌연 생겨난, 마치 먼 과거의 매독 자국처럼, 아니다, 이 비유는 틀렸다. 팔에 난 매독 자국이 무언가로 발을 들였을 때 생겨난 징표라면 회색 연기 너머로 보이는 준호의 울 것 같은 얼굴은 더 이상 생에 아무 연이 없는 자의 그것이었다. 그래, 준호야, 내 아들아. 난 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널 지켜보았지...진짜 아버지는 그런 말 안 해요, 아버지. (사랑한다, 내 아들아.) 꼰대 녀석아. 그게 언젯적 아버지의 표상이냐. 그럼 집어 치우죠, 뭐. 그럼 우리 연인 놀음이나 하자구요. 연기로 흐린 눈 앞에서 준호가 웃는다. 이 녀석아, 철없는 꼰대 녀석, 애송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내 제자야. 그렇게 말씀하셔봤자 다 아무 뜻도 없는 거 알고 있어요. 절 막지 않으실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제가 들고 있는 담배 하나도 못 빼앗으시면서. 둘은 웃으면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꾸어 물었다. 웃음은 점점 더 산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소매로 눈가를 닦던 준호가 문득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김범신 씨. 숨을 조금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 좀 벗겨 주세요, 갑갑해요. 왜 이걸 안 벗었지. 애초에 너 왜 이걸 신고 있었냐? 잊어버렸어요? 담배랑 술이랑 그런 거 사러 다녀왔잖아요. 아, 김신부님, 카운터 아저씨가 민증 좀 보자는 거예요. 웃겨요? 저 진짜 신부님 아들뻘로 보일걸요? 준호가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범신의 귀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범신은 준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싫어요. 그럼 아까 왜 그런 소리 했어. 웃기잖아요. 뭐가 웃겨. 뭐가 그렇게 웃겨, 최준호. 술이나 마시자. 마십시다아. 부어 버려. 바닥에요? 이 미친 녀석아. 입에 붓던가 바닥에 붓던가. 포도주 병이 넘어지면서 바닥에 강을 그렸다. 어라. 왜 그래. 전 분명히 소주 사왔는데. 그분께서 결혼식이라 특별히 바꿔 주셨나 보다. 지금 이거 결혼식이예요? 우리 진짜 단단히 헛소리 중이네. 무슨 소리야. 넌 이 집 문 틀어잠그고 나랑 들어앉았을 때부터 내가 말이야, 감이 딱 왔다고, 아, 얘 돌았구나. 그건 신부님도 마찬가지잖아요, 하고 준호가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지. 왜 신발 안 벗겨 줘요. 발 이리 줘. 범신은 발목을 붙들었다. 한 손에 모두 들어왔다. 그는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겨내고는 아무 곳에나 던졌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준호에게, 주변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모양인지, 준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비가 오네요. 몰랐는데. 범신은 반쯤 열린 창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계속 바닥에 누워 있기만 했다. 방충망은 닫혀 있었다. 작은 격자무늬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서 물방울의 갯수를 셌다. 고개를 살짝 들어 발치를 바라보자 준호의 맨발이 보였다. 불그르슴한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저거 뭐야, 최준호. 아까 넘어트려서 흐른 주님의 보혈을 밟았어요. 이제 내가 주님 부엌의 이스트 반죽에 머리를 처박으면 되나? 그런 거 여기 없잖아요, 관둬요.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범신은 그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입을 가져다댔다. 너 자꾸 나를 손발 페티시 있는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인데. 준호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누군가 새벽 세 시에 벽을 쾅 내려칠 때까지 계속해서 떠들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나눠 폈다. 사랑해요. 뭐? 사랑해요. 마지막 남은 생명줄처럼 서로를 만지고 키스하고 끌어안고 오직 서로의 눈 안에서만 평안을 얻을 수밖에 없는, 그러나 사실 모두 거짓이 아닌지, 기초 없이 지은 집은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이라고, 뭐뭐서 몇장 몇절 말씀. 굳이 거기서 끌어오지 마세요. 구름이 사라지면 우리도 떨어져 죽겠죠. 왜 그렇게 말을 해. 왜 그런 말을 해.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거든요, 저. 키스해 주세요.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 술 다 떨어졌네. 이리 와. 술병 조심해요, 거기. 그들은 손을 잡듯이, 또는 이마를 기대듯이, 또는 등에 손을 올려놓듯이 입을 맞추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거기에 누워 있을 것이다. 눈을 뜨기도 번거로워질때쯤 다시 눈을 감고, 낮에는 잠을 자고 다시 밤마다 깨어나는 이름 모를 꽃처럼, 아, 신부님, 저것 좀 보세요, 낮에는 안 그랬는데 저녁에는 피네요, 준호야, 준호야, 준호야, 착한 내 아들. 네가 아직 너 자신을 억눌렀을 때...그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좋으면서 고통스러웠고. 그때는 우리 둘 다 길에 쭈그려 그 꽃을 보았다. 그때는 그랬지, 사랑하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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