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tobira_moon)님과 함께 풀었던 썰 중 일부로 연성했습니다. 항상 같이 이야기해주시는 케노님 감사합니다 ><

누군가는 군왕 소경염의 혼이 아는 이 하나 없는 구천을 떠돌 것이라 말한다. 누군가는 소경염이 궁으로 소리 없이 들어와 나무에 아로새겨진 손때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흐느낀다고도 한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증거와 은밀한 이야기를 들이밀었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복화술사처럼 입 없이 말을 옮겼다. 어린 궁녀들은 이유 모르게 밤이 두려워 함께 숨죽여 울었다. 소경염은 부드러운 적색 비단처럼 모두의 눈을 덮었고 덮인 아래에는 고요한 어둠만이 남았다.

열전영이 무언가 쓰여진 종이를 발견한 것은 이틀 전 밤의 일이었다. 그는 펼쳐볼 생각도 못한 채 종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직 채 굳지 않은 물감 같은 기억이 다시금 흉하게 흘러내렸다. 군왕은 전영과 함께 절벽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칼로 멋대로 자른 듯한 절벽들이 맹수의 이처럼 서로 들러붙은 황량한 지형이었다. 그들은 매복 중이었다. 골짜기가 아래에서 위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전영은 드물게 현기증을 잠깐 느꼈으나 입을 꾹 다물고 그것을 견뎠다. 군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영. 예. 참으로 깊군. 그 말은 정말로 무거웠던가, 아니,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웠던가, 전영은 군왕이 부득불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이곳에 온 것이 과연 잘 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전영 역시 그와 함께 같은 나이를 세었고 함께 끝없어보이는 전장을 누비고 또 누볐다. 군왕의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단지 점점 깊숙한 살 어드메로 파고들 뿐이었다. 꺼지지 않는 빛. 적을 베어낼 때마다 그 눈은 두려움을 주면서도 동시에 편안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 빛은 어느 순간에 가장 위태로웠는가, 전영은 다시금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아직이다. 전영이 알겠다 대답하자 군왕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기다리는 것에는 익숙해. 다만...

그들은 해가 진 뒤 골짜기를 피로 물들였다. 군왕이 짧게 소리치자 말이 굽으로 바닥을 짓이기며 머리를 돌렸다. 전영은 그 뒤를 따랐다. 갑옷이 나를 옥죄는 것 같군, 군왕이 말했다.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전영이 말했다. 아니, 아니야. 마무리할 것이 있어. 전영은 그것이 무언지 알고 싶지 않아서, 알 수 있다 해도 거절할 것이어서,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천천히 군왕의 막사를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소경염은 그날 밤 자다가 숨을 거두었다.

전영의 손 안에서 종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매화나무에 대한 짧은 시였다. 전영은 제 몫이 아닌 다과를 훔친 아이처럼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다시금 알기를 거부했다. 그는 무언가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고 또 억누른 채 종이를 화로 속에 던진 다음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글자는 회색 연기로 화해 위로 끝없이 올라간다. 흩어지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어쩌면 흩어지기 전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 하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어 그 재 맛이 나는 글자들을 한가득 마셔버릴지도 모른다고, 열전영은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 남자는 모든 것을 알던 사람이니까. 모든 것을.

여전히 누군가는 궁의 구석진 곳에서 진주처럼 흩어진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궁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는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가장 깊은 복도에서 소곤대다가 혀를 잘렸다. 그래서, 소경염의 생을 관통하는 그리움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 산 자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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