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329 비랑님이랑 연성딜

1.
사죠는 말야, 하고 쿠사카베가 입을 열었다. 그를 곁눈질로 살펴보자 맨 윗 단추 두어 개가 열린 셔츠가 보였다. 5분 전의 뜀박질이 아직도 영향을 미친다는 듯 위로 길쭉한 몸뚱아리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 역시 얼굴에 확 끼쳤다. 쿠사카베는 말이야, 참 말라깽이야. 게다가 위로 멀찍이 커. 단 맛이 나는 단어들이 입 안에서 그냥 녹아버린다. 쿠사카베가 말하도록 두자, 그대로 두자. 옅은 빛의 머리카락이 착 가라앉는다.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집까지는 아직 먼 길이 남아 있었다.

사죠는 말이야, 하고 쿠사카베가 다시 운을 떼는 것이 들렸다. 아이스크림 좋아해? 큰 초콜릿 덩어리가 흘러내리는 그거, 큰길에서 오른쪽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가게에서 파는 거. 거기 안 가봤지? 쿠사카베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웃었다, 더우니까 말이야. 

그러자 사죠 리히토는, 길 한가운데에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다. 

*

한 손에는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 다른 손에는 흘러내리는 더운 손이 닿는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30분 전에 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더위 때문에 어지러운 머릿속에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쿠사카베와 내게 날개가 돋아나서, 태양을 등지고 날아오른다면 얼마나 시원할까, 그런 목소리가 계속계속 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많은 날개가 필요하지 않았다. 등 하나에 날개 하나씩, 왜냐하면 손은 이렇게 잡은 채로 그대로일 테니까. 우리는 가볍게 축축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올라 집 앞에 소리 없이 착지한다. 문 앞에서 쿠사카베는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들어가자. 나긋이 접히는 그의 눈꼬리가 기막히게 완벽해서, 사죠는 그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응?"

등에는 날개는커녕 깃털 하나도 돋아나지 않았다. 사죠는 자신이 방금 소리내어 웃은 것을 알아차렸다. 무언가 차가운 액체가 손에 닿았다. 녹은 아이스크림일 터였다. 사죠는 잠시 길에 멈춰서서 아직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특제 더블사이즈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달았다. 그 맛은 마치 쿠사카베 히카루,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있지, 그 가게 이름은 ----야. 잘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잘 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 없다고 사죠 리히토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음에 그곳에 가고 싶어진다면, 쿠사카베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여름 내내 말이다. 녹아 흐르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여름의 맛. 

"아냐."
"아이스크림 맛있어?"
"항상 여름이었으면 좋겠어." 사죠는 얼굴부터 목까지 잔뜩 붉히고는 말했다. "항상."

*

사죠는 분명히 더워 하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손은 찼다. 쿠사카베는 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갸우뚱하면서 잡은 손가락을 힘주어 엮었다. 혀 끝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착 감겨들었다. 그는 작년 이맘때쯤 혼자 하교길을 걷다가 그 아이스크림 가게에 홀린 듯이 들어가 앉았다. 인심 좋아 보이는 주인 아저씨가 내어준 오늘의 아이스크림(100엔을 깎아준다고 했다)을 한 입 먹고, 쿠사카베 히카루는 말 그대로 감동했다. 그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네 개를 더 먹은 후 값을 치른 다음 집에 가서 복통으로 약 이틀 밤낮을 앓았다. 꽤 좋은 경험이었죠, 아이스크림은 하루에 하나씩, 이런 구호가 생겼으니까. 다음주에 멀쩡한 모습으로 가게에 나타난 쿠사카베가 말하자 아저씨는 껄껄 웃고는 한 스쿱을 더 얹어주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옆을 돌아보니 사죠는 아이스크림에 온 정신을 쏟은 채 열심히 초코를 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고양이 같아서 쿠사카베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귀엽단 말이야.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쿠사카베 히카루는 생각한다. 

문득, 사죠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선을 옮기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휘적이는 게 보였다. 아, 한 부분에 시선이 고정된다. 초콜릿이 녹아서 그의 손가락으로 흐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갑자기 아이스크림, 사죠의 길고 차가운 손, 사죠의 웃는 입, 그리고 사죠라는 사람 자체가 쿠사카베의 눈 앞에 차가운 바람처럼 밀려들어왔다. 더워서 그런 거야. 쿠사카베가 생각한다. 더우니까. 아...사죠, 좋아해. 쿠사카베에게는 이 말을 할 기회가 참 많을 터였다. 언제든지.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사죠가 아이스크림을 베어물자 쿠사카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사죠는 참 고양이 같이 귀엽단 말이야. 이 생각을 아까도 했었던 것 같은데, 아, 더위, 더위, 더위, 모든 게 더위 때문이었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이 사실이 쿠사카베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취할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사죠는 다시 그 가게에 들어가 얼굴을 찌푸리고 어떤 것이 제일 맛있을지 고민할 것이고, 나는 다시 초콜릿을 추천하고, 또 다시 밖으로 나와서 푸르게 뻗은 나무 아래를 지나 집으로 들어가고, 다시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렇게 텅 빈 거리를,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사죠는 잠시 길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여름이었으면 좋겠어." 그는 얼굴부터 목까지 잔뜩 붉히고는 조용히 덧붙였다. "항상."

2. 
난방이 고장난 건 아니었다. 분명히 그건 멀쩡했다. 처음에는 쿠사카베도 동의했다. 그가 돌연 우기기 시작한 것은 30분 전의 일인데, 내가 간신히 꺼낸 체크무늬의 두꺼운 이불을 다시 벽장에 집어넣으려는 찰나였다. 잠깐, 잠깐만, 사죠. 그가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이게 정말 고장난 게 아닐까? 응? 모처럼 덮을 것도 새로 꺼냈는데, 써 봐야지. 그렇지?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그를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꺼운 체크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는 나란히 코코아를 한 잔씩 타서 손에 쥐었다. 후 하고 불자 씁쓰름한 단 내가 진동했다. 그제 빨아서 어제 말린 이불에서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그리고 버석버석했다. 동굴 속에 들어간 두 마리 쥐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리에게는 긴 앞니도, 갉아먹을 치즈도 없었지만.

얼마 뒤 쿠사카베가 졸기 시작했다. 그의 컵은 벌써 비어 있었다. 나는 컵을 꽉 쥐고 놓지 않는 쿠사카베를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그것을 뺏을 수 있었다. 부엌에 가져다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컵을 쥔 채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에, 무언가 나를 잡아끌었다. 

"…사죠."

원래도 처진 눈이 졸음에 취해 더 늘어졌다. 

"어디 가?"
"컵, 좀…싱크대에…쿠사카베, 좀 놔."
"안 돼."
"왜?"
"그냥 안돼."

나는 잠시 고민하고는, 컵을 가까운 탁자 위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쿠사카베를 따라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잠이 깬 건지 자는 중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재워 줘야지."
"……"
"사죠가 안 재워주면 안 잘 거야."

그러고는 입을 뾰루퉁하게 내미는 것이었다. 코코아를 더 많이 먹였어야 했는데, 그러면 따듯하고 배가 불러서 바로 잠들었을 텐데. 뭔가 굉장히 귀찮은 햄스터를 키우는 주인이나 할 법한 생각을 되뇌이며 사죠는 손을 내밀어 쿠사카베의 볼을 쓰다듬었다. 쥐, 햄스터, 털투성이의 작은 동물들, 그리고 쿠사카베. 이들의 공통점을 서술하시오, (3점). 정답: 쓰다듬어주면 좋아한다. 귓가에 실로폰 소리가 메아리쳤다. 맞추긴 했는데 왠지 머쓱한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하나. 사죠는 착잡한 표정으로 쿠사카베의 눈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눈을 감겼다. 그는 순순히 사죠의 행동에 따랐다. 착하지, 우리 설치류. 

"쿠사카베, 졸려?"
"거의."
"그럼 내가 말하는 거 들으면서 자."
"으응."

*

너는 지금부터 햄스터야. 내가 햄스터야? 그래. 넌 햄스터야. 그것도 꽤 큰. 알았어. 넌 지금 뭐 하고 있어? 사죠랑…아니, 사죠 햄스터랑 이불 속에 누워 있어. 아냐. 넌 지금 톱밥 속에 들어가 있어. 톱밥? 응, 톱밥. 그렇구나, 톱밥… 그리고 손에는 해바라기씨를 들고 있고. 해바라기씨, 맛있지. 맞아. 맛있고 열량도 높고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 그럼 이제 그걸 한입 먹어.

쿠사카베가 입을 우물거렸다. 

먹었어. 그래, 잘했네. 계속 그렇게 해. 그럼 이 해바…해마…라기씨를 다 먹으면…어떡하지?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첫번째 해바라기씨를 다 먹자마자 내가 새로 줄 거니까. 그렇구나…그럼 넌 해바라기야?

응?

해바라기씨를 준다며. 

…그건 그렇지만…나는…나도 햄스터야. 어떻게? 너랑 사귀는 햄스터인데, 네가 너무 좋아서 널 위해 해바라기씨를 100개 사뒀어. 그러니까 부족할 일은 없다는 이야기야. 아, 그렇구나. 고마워. 애인이 있다는 건 좋은 거구나. …그, 렇지, 뭐…말하자면. 

하나 다 먹었어? 아니, 아직…조금…남았네. 그래, 그래. 천천히 먹어, 쿠사카베. 이제 따라해. 으응. 내가 이걸 다 먹으면 나는 잠에 든다. 

내가 이걸 다 먹으면 나는…

쿠사카베는 잠에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톱밥 속에서 서로 꼭 껴안고 잠든 햄스터일지도 모른다고 사죠는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쿠사카베가 잠든지 10분 뒤에 덩달아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해바라기씨를 먹는 꿈을 동시에 꾸었다. 겨울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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