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024 케노님께 드림(......)부끄러워 죽겠다 


London Rain


그는 문가에서 잠시 망설이고는 손끝으로 푸른 문을 살짝 밀었다. 곧 틈이 살짝 벌어졌다. 닥터는 한 쪽 팔을 시험해보듯이 문 밖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였다.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어때요?“

그는 종종, 비 오는 날이면 삭신이 쑤시다고 앓는 소리로 엄살을 부렸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당신 나이가 1000살이 넘었으니 몸이 안 쑤시는 게 이상하다며 장난이 반쯤 섞인 타박을 놓았다. 부루퉁한 얼굴로 조종 장치에 기댄 그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비가 오면 지구의 인간들이나 달렉이나 상냥한 우드들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들 조금씩 우울해지기 마련이라고. 난 내가 원할 때 빼고는 슬픈 게 싫어.

그럼 당신이 그걸 사라지게 하면 되잖아요? 당신의 그…뭐랄까 특허라도 받아야 할…기린 댄스를 춘다던가. 난 그거 되게 웃기던데. 당신은 닥터잖아요?

안 돼. 그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이유라는 게 없기 때문에 없앨 수 없어. 

으음. 납득이 갈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네요. 음…아닐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고 지금 부엌에서 타는 냄새가 나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오븐에 수플레 올려놓은지 몇 시간이나 됐지?

어머나.

그 때 나는 한바탕 무릎을 치며 바닥을 구르는 그의 얼굴에 까맣게 타서 이미 형체를 잃은 수플레 조각을 명중시켰다. 물론 내 얼굴도 멀쩡하게 유지되지는 않았고. 맙소사, 우리 꼴 좀 봐요. 10분 뒤 내가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수플레 반죽을 떼어내며 외쳤다. 우리 둘 다 엄마한테 한 쪽씩 귀를 잡혀 샤워기로 공격당해도 할 말이 없겠군요. 그가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지내왔다.

“방금 전에 모니터로 확인한 것 같이, 비가 오는군.“

“우산 챙겼어요.“

“나가려고?“

내가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가 엉겁결에 다른 쪽 손으로 내가 건넨 커다란 파란색 장우산을 받아들었다. 

“당연하죠.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난 비 오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좋았어…어…음…그러지 뭐. 레이디가 원하시는 대로.“

나는 윙크를 하고 여전히 그와 팔짱을 낀 채 함께 타디스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문가에서 수다를 떠는 동안 빗줄기는 모니터로 보았을 때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옆에서 닥터가 헛기침을 하며 옷 젖을 걱정은 덜 해도 되겠구만, 하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찰랑이는 물웅덩이는 여전히 길 곳곳에 누워 있어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발목까지 흙탕물에 담글 수도 있었다. 나는 마침 긴 다리를 잘못 가눠 바닥에 코를 박을 뻔한 닥터를 잘 잡고 반쯤 끌고 다녔다. 그의 매우 탁월한 균형감각은 1000년 더산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터였다. 바뀔 리가 없다. 

“당신은 혼자 여행할 때가 많았나요, 닥터?“

“아니. 내 옆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아마도.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혼자 다니기도 했지.“

“당신이 말하는 가끔이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영원이예요.“

“그렇겠네.“

“…그래서. 그럴 땐 비가 오면 어떻게 했죠?“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모르겠어요.“

닥터는 활짝 웃었다. “비가 오지 않는 곳으로 갔지.“

그와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구름이 빈틈없이 꽉 이가 물려진 채로 물방울을 하나하나 떨어트리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살던 집에서 크리스마스 쯤 되면 바닥에 깔아 놓던 두꺼운 진회색빛 양모 담요 같았다. 알고 지내던 프리랜서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필요가 없어졌다며 싼 값에 넘겨준 물건이었다. 왼쪽 가장자리에 커피 자국이 살짝 있는 것 빼고는 완벽한 카페트였다. 슬리퍼를 벗고 양 손에 코코아 컵을 든 채 가만히 그 위를 걸어다니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났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톡 하고 콧잔등을 쳤다. 걷다 보니 어느새 공원 한가운데로 와 있었다. 얕은 가랑비라도 비는 비인지 사람들은 주위의 건물 안으로 피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적적한 공터가 천천히 어두워졌다. 

나도 모르게 닥터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제 가로등이 하나씩 켜질 거예요.“

그러자 내가 마법 주문이라도 말한 것처럼 주욱 늘어선 가로등들이 비를 맞으며 순서대로 희뿌연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네요.“

“뭐가?“ 닥터가 말했다.

“비가 오면 슬퍼져요.“

“내가 울 몫을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는 것 같잖아.“

“흠.“

나는 고개를 끄떡인 다음, 아직도 우산 손잡이를 꼭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닥터에게서 우산을 가져왔다. 그의 붕 뜬 머리가 천천히 젖어들어갔다. 어둑해진 채로 천천히 우리의 머리 위로 회전하는 구름은 땅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차갑네요.“

“있지, 클라라.“ 그가 말을 꺼냈다. “지금은 어때?“

“네?“

“우울한 기분이 드냔 말이야.“ 

“…아뇨. 왜냐하면 난 지금 당신이랑 함께 비를 맞고 있으니까.“

닥터, 지금 완전 물에 빠져서 홀딱 젖은 생쥐 꼴이라구요. 얼마나 웃긴 지 알아요? 내가 깔깔 웃었다. 그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 너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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