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211

어째서인지 새벽마다 한 가지 기억만이 톱니가 맞물리듯 눈 안쪽에 떠오르고는 했다. 날짜도, 시간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그 일 중에 어째서 단 하나의 장면만이 머리를 채우는지, 아, 울컥 퍼져나오는 거무스름한 잉크, 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쓰여지는 첫 글자, V. 이젠 모두 옅어진 찰나의 시간이 어째서 아직도, 어제 일 같은지. 빅터 프랑켄슈타인, 하고 빼곡히 채워진 종이를 발견한 것은 이틀 전이다. 입과 머리가 가득 찼다. 내 이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고 또 살아서 나라는 인간의 처음과 인생과 매 순간 느꼈던 감정과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깨끗이 지워 버린다 해도 그것만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벌어진 입술에서 혀 끝으로 튀어나오던 작은 목소리, 빅터. 그 후의 너의 표정, 이어지는 너의 몸짓. 다시는 살아 있지 못할 너의 모든 것.


은날님께 리퀘 받았던 서재키스 앙빅......은 서재키스인데 왠지 그날따라 스파이를 존나 끼얹고싶어져서 끼얹음...망...설정구멍주의 나는 첩보물이 뭔지 1도 모른다

150222

금요일 저녁 8시 46분을 향해 시간은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서재 문 앞에 서서 앙리 뒤프레가 되뇌였던 다짐들은 약 10분 정도 전에 깃털처럼 날아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다짐이 적힌 작은 깃털들이 '뜻밖의 계획 실패' 라는 이름의 큰 벽난로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인생이란 원래 맞닥트리는 모든 것이 내게 엿을 먹이는 상황이 대다수 아니었던가. 예를 들면, 일을 핑계로 한 데이트가 박살난다거나.

"맙소사. 접선 10분 전 교체라니 스위스의 어느 윗대가리가 고급 인력을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굴린단 말입니까. 앙리 뒤프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담당, 이걸 깨먹으시면 어쩌냐는…"

도청 장치가 없는 것은 확실하니까…아마 그럴 것이다.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고풍스러운 자수의 테이블보에 흉하게 눌어붙은 자국이 남았다. 등 뒤의 카메라에서 작게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각도를 바꾸어 그의 담배가 테이블보에 입힌 피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재 보려는 수였다. 여전한 정적 속에서 그는 약 500m 떨어진 골방의 비명을 상상했다. 뭐, 빠져나가는 돈은 내 통장의 것이 아니니까. 그는 그저 보고서에 한 줄을 덧붙이기만 하면 되었다. <재떨이가 없었음.> 그리고…

그는 뒷말을 삼키고는,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등을 기댔다.

앙리 뒤프레는 목에 걸린 신분증을 자연스레 빼내어 손수건으로 닦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 구멍이 뚫린 책등 안에서 붉은 불빛이 번쩍이는.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내가 책임자라면 아마 이 서재의 모든 책 속에 카메라를 심었을 테지, 그러니 이해한다, 라고 그는 조용히 생각한다. 어차피 보라고 한 행동이었다. '그쪽' 사람들도 이미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목 아래를 내려다보자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자신의 사진과 어딘가 미묘한 느낌의 이름이 새겨진 그것이 보였다. 시드니 칼튼이라니. 물론 가명이었다. 지금은 그가 최근 48시간 동안 그 신분증으로 제네바 안을 아무 문제 없이 돌아다녔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려 줘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바로 이 순간까지도. 요컨대 과하게 편집증적인 보안국 사람이란 길에 흔히 밟히는 흙이나 자갈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까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데이트 요청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그를 펄쩍 뛰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사건인 게 맞았다. 지지난번 접선 때 종이 봉투 아래에 넣은 하트 모양 포스트잇에게 키스라도 해 주고픈 심정이었다. 차? 커피? 빅터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커피. 사랑에 빠진 바보들이란 실수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위대한 우연의 일치인지 우주의 도움인지, 커피. 하고 말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입을 찍은 카메라는 한 대도 없었다. 현대 기술이여, 영원하라.

그래 봤자 앙리 뒤프레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찰국 본부로 뛰어들어와서 서류 가방을 내던지고, 다음 접선 때는 커피를 달라구요, 차는 맛이…더럽게…없단 말입니다!-라고 외치는 것 뿐이었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의 사무실 책상 속 가장 깊은 곳의 노랑 별 모양 메모지에는 한 줄의 글귀가 새로 쓰여졌다. '곁들일 것은?'

그런데, 이 집에 발을 들이기 10분 전에 받은 문자는 그의 어깨를 바닥 끝까지 내리누르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고작 네 글자였지만 그는 그것들이 거대한 바윗덩어리 네 개처럼 느껴졌다. <담당 교체.> 그의 마음 속 냉장고에서 일주일 간 소중히 간직해온 킷-캣이 소량의 부스러기만을 남긴 채 바삭 부서졌다. 그렇게 된 일이었다. 앙리 뒤프레는 이 모든 상황을 보고서에 추가로 기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앞서 밝힌 대로, 한 줄이면 되니까. 자, 따라 해 봅시다. "재떨이가 없었습니다, sir."

시작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보안국과 감찰국의 타겟이 겹쳤고 한참의 '어리석고 비효율적인 난투극' 끝에(이 표현을 쓴 것은 빅터 쪽이었다)두 명의 첩보원은 각자가 원하는 정보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뒤로 이어진 쓸모없는 수많은 회의 끝에 보안/감찰국은 서로 일부 협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인류가 달에 첫 걸음을 내딛은 이후의 가장 큰 발전이라고 직원들은 한동안 쑥덕거렸다. 60년 전 감찰국이 보안국의 타겟을 미리 '삭제' 해버린 뒤로 두 기관은 냉전 상태였다. 이번의 애매한 협동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예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일단 일은 해야 하니까 모두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보이 미트 보이, 비밀스레 얽히는 손끝, 비밀 메모, 찰나의 티타임, 그리고 기타 등등의 화학 작용이 앙리 뒤프레와 빅터 프랑켄슈타인 사이에 생겨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노크하자, 그는 편히 기댔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서류 뭉치는 아까 그가 담배를 비빈 테이블 위에 얌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저걸 집어서, 건네고, 나온다. 그러면 밤 9시 15분일 테고 그는 차를 몰아 최대한 먼 곳의 바에 가서 한잔 할 계획이었다. 여기까지 쭉 정리하자 세상이 온통 어두침침해 보였다. 아, 밤이라서 그런가. 어쨌든. 퇴근이란 참 좋은 일이다.

"열려 있습니다." 도청 장치도 없구요. 아주 좋죠.

"알아."

완벽한 O를 그리는 앙리 뒤프레의 입을 무시한 채 빅터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앙리 뒤프레의 따듯한 분홍빛 마음 속에서, 부스러졌던 킷-캣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생겨났다. 응, 그렇지. 킷-캣 녹차맛은 최고야. 그렇다니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짓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차분한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곧바로 그의 팔과 허리 사이에 끼어 있는 갈색 서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저 안에는 최근 4개월 동안 보안국과 감찰국 양측의 모든 CCTV를 해킹한 해커의 신상 정보가 들어 있을 터였다. 일을 벌리는 건 개인의 자유니 그건 그렇다 치고. 항상 문제는 걸린 다음에 터진다. 놈은 분명 내일 오전 12시가 되기 전, 정확하게는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스위스 안은 물론이고 타국의 모든 피난처와 키우는 강아지까지 모두 빼앗길 것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동정심이 드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인가. 그는 딱히 그 주제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빅터, 그러니까..."

"앙리, 5분이네."

"응?"

"5분 내로 끝내야 해. 궁금한 건 없겠지만 질문해도 좋네. 물론 자네 윗사람이 제대로 일을 했다면야 엄청나게 빠르게 끝나겠지만."

"어?"

빅터는 작게 한숨을 쉬고 가지고 있던 서류 봉투를 앙리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뚫어져라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집어든 그는 풀로 봉해진 입구를 뜯고 안을 보았다.

뭐라 적혀져 있었다.

<자네 얼굴을 찍는 카메라는 없네. 5분 동안 궁금한 게 있으면 이야기 해. 돌려 대답할 테니 잘 알아듣게.>

"자, 그럼…이야기해 볼까."

그렇게 말하는 빅터의 표정은 차분하다 못해 음울하기까지 했다. 앙리는 고개를 갸우뚱 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내 얼굴은 안 나온다고? 그럼 지금 카메라는 하나만 활성화 되어 있는 건가? '녀석' 이 일을 꾸미다가 실수로 뭔가 잘못 건드렸군. 안 그래? 걔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서류는 잘 있군. 흐음." 그는 지루하다는 듯 입술을 손끝으로 두들겼다. 그가 배우였다면 얼마나 멋졌을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다니." 그가 말하는 '이런 일' 은 물론 예기치 않은 엮임이다.

"그러니까 뭔가 잘못된 건가? 교체된 사람은?"

"그건 말할 수 없네. 당연하지만. 우린 지금 이렇게 같이 앉아서 하릴없이 별 뜻 없는 얘기나 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감안국'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야. 영원히 없을 테지. 그래…"

" '별 뜻 없이' 내가 뭘 가져왔는지 얘기해볼까?"

"좋…아." 빅터는 눈을 잠깐 게슴츠레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쪽지를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그거 좋지, 그래…나도 여기 오래 있긴 싫으니까. 할 일 빨리 끝내자고."

"왜 자네가 온 거지? 킷-캣은 잠깐 잊어버리고. 흠."

"귀찮게 다 설명해줘야 하나? 그 해커는 별 힘도 못 쓰고 잡혔어. 물론 우리 쪽의 성과가 컸지. 중요한 건 내가 오는 게 맞단 거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닌가."

"당연하지. 다음 주에 데이트 할까?"

"뭐?"

"데이트."

"…………글쎄,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자, 서류 줘 봐. 읽고…조금 생각, 해 보는 시간을…가져야. 알다시피 이건," 앙리는 빅터가 손에 든 서류를 살짝 흔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확인은 중요하니까."

"내가 받은 변경 문자는?"

"그래, 맞아. 그 해커 녀석 명의로 핸드폰이 하나 개통되어 있었더군. 물론 지금은 정지시켰지."

"대신 오기로 한 자네 쪽 요원의 코드네임은 잭 더 리퍼였지."

"음, 내 생각에 이제 이 이상한 대화를 끝낼 때가 온 것…같아. 이제부터는 그냥 말할 테니 잘 들어. 보안국에 스파이가 있었네. 그 쪽 경로를 통해 해커에게 CCTV를 전달한 모양이야. 해커의 뒤를 봐주는 제 3세력에게 보안국은 제어당하고 있고, 자네가 받은 변경 문자도 그 약소한 연장선이지. 사실 안 보냈어도 상관 없지만, 자네의 실망한 표정이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르지. 어쨌든 나는 자네가 오기 30분 전에 '누군가' 의 하수인이자 오늘 날 대신할 뻔 했던 잭 더 리퍼를 기절시켜서 마당의 수영장에 던져넣었네. 그러니까…나한테 키스하게, 앙리."

빠르게 말을 쏟아낸 빅터를 보며 앙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누가 누가 입으로 더 완벽한 O를 그리나~ 대회 2부인가.

"키스하라고?"

"그래, 이리 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다가온 빅터는 앙리를 일으켜 세우고는 제일 가까운 벽으로 밀었다. 쿵 소리와 함께 책 몇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내리자 넥타이를 쥐고 입술을 깨물며 서 있는 빅터가 보였다. 아니, 그러니까…

"해."

"왜?"

"하라면 해."

두 번. 두 번 확인 사살 당했다. 그 정도면 후폭풍 걱정은 안 해도 정말 괜찮다는 이야기다. 등 뒤의 책이 빠진 자리에서 카메라가 윙 하고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등으로 꾹 막으며 말했다.

"그러죠."

그래서 앙리 뒤프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키스했다. 보고서 위에서 만년필이 잉크를 쏟으며 춤을 춘다. 이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으며, 정확히는 본능이…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보고서가 아니라 시말서를 써야 할 판이다.나중에 그는 이 일을 회상하며, 조금 더 덜 긴박한 상황이었다면, 하고 후회하고는 했다. 어쨌든 첫 키스니까. 처음은 언제나 예상치 못할 때에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술이 떨어지고 그들은 방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딱히 바뀐 건 없어 보였다. 앙리는 몸을 돌려 등을 찌르는 카메라를 손으로 퍽 쳤다. 뭐 한 거야? 빅터가 묻자 그는 그 빈 자리에 책을 슬쩍 밀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귀를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렸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긴, 앙리 뒤프레. 자네도 정보국 요원이면 생각을 해 봐." 그는 한숨을 쉬었다. "키스가 안 먹힌 거지."

"키스가 대체 어떻게 먹힐 거라고 생각한 건데? 아니, 애초에 의도가 뭔가, 그거?"

"시선 끌기? 놈의 판단에 혼란을 주기 위해?"

"아무래도 그건 틀려먹은 것 같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뛰어야지."

"좋아."

그들은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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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츄님께 리퀘 받은 크리빅터입니다!

시선이 닿은 곳에 네가 있었다. 그 나무는 이 숲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팔을 두르면 그 거대한 위압감에 쉽게 질려 버리곤 하던 그 나무다. 나무를 베면 드러나는 속살엔 엄청난 양의 나이테가 겹겹이 아로새겨져 있을 터였다. 거의 돌처럼 굳어진 껍질과 겉으로 튀어 나와 반질해진 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나는 한 발짝 발을 내딛었다. 바삭, 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네게로 가까이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쉴 새 없이 무언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공명하는 듯 했다. 안 되는데, 나는 생각했다. 널 깨울지도 몰라, 나무 둥치에서 자는 아이.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 더 이야기했다. 나무 둥치에서 웅크려 자는 아이.

네 얼굴을 톡 건드리자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버렸다.

"아."

마법 같은 일이라고, 고요히 생각한다. "춥지 않아?" 코트를 벗어서 네게 건넨다. 낡고 더러워진 코트, 그러나 나는 계속 멍하니 내밀었다. 주인을 찾아 준 것 뿐이라고, 그런 생각이었다. 이건 네 거야. 아이는 더 묻지 않고 코트를 받아들어 어깨에 걸쳤다. 당연하지만 크기가 너무 컸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되었다.
"손이 안 보여." 너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추운 것 보다는 나아." 너는 이어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손을 잡고 숲을 걸었다. 발소리와 함께 들리는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는 한 사람 어치 뿐이었다. 너는 너무나 작아서 몸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거나, 아니면 유령인 것이 분명했다. 소매를 걷자 드러난 네 손은 아직 차가웠다. 내 손 역시 차가워서 너를 데우지 못한다. 미안하다고 말하자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빽빽한 나무가 눈에 닿기 무섭게 등 뒤로 빠르게 사라져간다. 달릴 때에나 볼 수 있을 광경이었다. 나무가, 숲이, 세계가 우리를 지나친다.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나는 오로지 둘뿐이었다. 우리는 잊혀진 여행자다.

시간이 다른 때보다
천천히 흘러갔다

네 발소리가 자박자박, 하고 났다. 고르고 예쁜 소리가 난다. 네 손을 꼭 쥐었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꾹 하고 손가락을 누른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뒤를 돌면 네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돼.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펼쳐진다. 너는 눈 녹은 듯 사라져 있고 숲은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숲은 회전하며 나를 미로 속으로 들여보낼 것이다. 기계 소리와 함께. 어쩌면 이 곳은, 거대한 기계 안이 아닐까. 해는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진다. 해가 지면 달이 나온다. 달이 지면 날이 밝는다. 톱니에 그런 것들이 쓰여져 있는, 그런 곳일 지도

몰랐다.

자, 다 왔어, 라고 말하며 나는 뒤를 돌았다. 이제 너를 잃어버릴 염려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눈 앞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 눈에 내 눈을 맞추자 너는 그제야 입을 연다. 무서워.

그렇다, 동굴이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려는 참이었다.

"비가 올 거야."

네 손을 잡고 약하게 당겼다.

"추운 저녁이야." 너는 발을 옮긴다. 우리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톱니바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허기를 채우고 구석에 웅크렸다. 덮을 것이 딱히 없어서 걸치고 있던 코트를 썼다. 너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직 온전히 잠에 들지는 않았다. 네 곁에 앉았다. 아, 하고 문득 네 손가락을 쥔다. 미지근해졌다. 그리고 참 작았다.

"노래 불러 줘."

나는 아는 노래가 없어. 너는 작게 보챈다. 불러 줘.

가사가 없는 멜로디를 입에 머금는다. 한 농가를 지나가며 들었던 노래다. 내 손이 코트 위를 향한다. 토닥이는 손 아래의 코트 아래의 작은 아이, 그게 너였다. 네 존재가 동굴을 덥힌다. 나 역시 덥히고 있다. 네게서 빛이 퍼져나왔다. 흔들리는 그 빛은 곧 꺼질 것 처럼 보여서, 나는 결국 노래를

시작했다.

어때. 괜찮아? 환상 속에서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웃는다. 누구한테 배운 거야? 나는 대답한다.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내가 잠자리에 들 때마다 곁에서 이 노래를 불러 주셨어. 나는 항상 듣다가 어느 새 잠들었기 때문에, 노래의 끝 부분을 아직도 알지 못해. 괜찮은 거짓말이었다. 내겐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아이는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너는 내 눈 앞에서 자라났다. 손이 단단해지고 얼굴이 바뀌고 팔이 옷 밖으로 튀어나왔다. 웅크린 몸을 전부 덮었던 코트는 반으로 줄어들어 커버린 몸을 겨우 덮었다. 너는 아이에서 소년이 되었고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그저, 동굴 한 켠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너를 깨워야겠다. 살짝 벌어진 입가에 손 끝을 대었다. 깨어난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빅터."

너는 눈을 떴다. 너를 재우던 내 손은 돌연 허공을 향한다.

"나, 숲에서 길을 잃었어. 그래서, 이 동굴로 들어왔어."

아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노래, 해...주세요. 아버지. 잠들기 전의."

너는 곧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코트를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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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연성할 때마다 이 글에 추가합니다.

2015/1/18/알버스텔

손이다.

3단 생크림 케이크에 손이 박혀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팔부터 박혀 있다.

흰 크림에 박힌 그것은 힘이 빠지지도 않는지 빠르게 휘휘 돌아가기 시작했다. 계속 보다 보니 영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서, 나는 작은 손을 덥석 잡았다. 따스했다.

"자, 그럼 당기겠습니다."

손은 버둥거렸다. 동의인지 아닌지는 빼고 나서 물어볼 일이다.

순간, 큰 케이크는 힘 없이 허물어졌다. 장식용 딸기도, 거대한 크림 덩어리들도, 설탕 리본도 모두 바닥에 떨어져 뒤섞였다.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서, 두 발로 겨우 버티고 선 케이크 범벅의 아가씨는 꽤 즐거워 보였다.

"남작님! 그동안 안녕하셨나요?"

스텔라, 분명히 지난 달에 스페인에 있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다음 달이 생일이시죠? 저는 여행 중 사정이 생겨서 안타깝게도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요. 대신 사람을 시켜서 케이크를 보낼게요. 나는 편지를 모두 읽고 원래대로 잘 접어서 책장에 올려두었다. 케이크라. 그녀는 나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손꼽아 기다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가 직접 왔더라면…어쩌면 더.

그런데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버린 것이다. 샤워가 매우 필요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녀가.

"아가씨."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샤워실은 저쪽 복도의 두번째 방…"
"아뇨, 아뇨.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요. 뭘까요?"
"뭡니까?"
"인사요!"
"어…안녕하십니까, 스텔라?"
"그런 거 말고요!"

도대체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케이크 덩어리들을 치워 버리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했다. 손수건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주머니로 들어가려던 손이 휙 하고 들렸다.

"생일 축하해요, 남작님! 같이 케이크 고르러 가실래요?"

나는 잠시 그녀와 내가 시내의 가장 큰 케이크 가게 앞에 서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유리 너머로 거대한 초콜릿 케이크가 보인다. 그녀는 손 끝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그러고는 말한다. 체리를 얹어야 더 예쁘지 않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뭐, 나쁘지 않은 광경이 될 것 같다.

"그러죠."
"신난다!"
"일단 샤워실은 복도로 나가서 쭉 가신 다음 두 번째 방에 있…"


2015/1/19/라알

오늘은 미로를 걸었다.

화려한 무늬의 벽과 조금 얼룩진 바닥은 끝없이 이어져, 나 자신마저 잊게 만들었다. 시간을 죽이기에 딱 좋은 일이다. 손을 뻗어 벽을 만졌다. 벽을 짚고 따라가다 보면 출구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출구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데요. 저택 문을 넘으며 내가 말했다. 노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을 빕니다. 내일은 그 분의 생신이죠.

그렇다면 행운을 빈다는 말은 의미가 없어지지 않냐고, 그렇게 대답했다. 집사는 말 대신 긴 끈을 하나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앨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겁니다. 돌아오는 길 같은 건 찾지 않아도 될 거라고요. 집사가 입을 연다. 어쩔 작정이야? 내 앞에 있던 것은 긴 전신 거울이었다. 거울 너머의 그가 웃었다.

그것을 넘어트려서 깨부술 수도 있었을 터였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저택은 넓고 또 넓었다. 아마 어딘가 구석에는 쥐가 살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면 밟아 죽이리라. 순간 발에 물렁한 무언가가 채였다. 답답한 공기 때문인지 눈 앞이 흐려서, 손으로 그것을 집어들어 얼굴 가까이 대었다. 잘린 손이었다. 손은 얇고 길고 컸다. 내가 찾는 사람의 손은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어리고 연약했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

복도가 일그러진다. 저택은 그 자체가 커다란 구멍이었다. 중심을 향해 모든 것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어두운 그 가장자리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될까. 점점 거무튀튀해질 것이다. 알 껍질을 깨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속은 썩었을 뿐이었다. 웅크린 남자아이, 그 아이가 보인다. 나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아이의 팔을 잡았다. 조금만 힘을 주어 당기면 작은 체구의 아이 정도는 가볍게 건져낼 수 있었다. 그 전에, 우선.

"알로이스."

기묘한 기계 소리를 내며 저택의 가장 깊은 부분, 어두운 중심점이 돌아간다. 천천히 회전한다. 소리는 우리 둘을 내리눌렀다. 종이 친다. 앞으로 열두 번일 것이다. 열두 번이어야 했다. 새 날이 밝았으니, 말 해 줘야지. 태어나줘서-

"생일 축하해."

아이는 눈을 감았다. 나는 손의 힘을 뺀다. 예전, 어딘가에서 본 광경이 어느새 떠오른다. 죽은 새였다. 길가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새는 아무리 건드려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날개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건드릴 이유는 없다. 그 채로, 그 자리에서, 내가 발견하기 전의 상태 그대로 그 새는 썩어 갈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썩어버린 잔해는 어딘가로

기계음이 멈췄다.

너는 눈을 떴다. 라이오넬, 들려? 작은 목소리가 시간을 뚫고 내게 닿았다. 내 눈과 귀와 입과 머리에 닿았다. 이제 내 생일이야. 응, 그래서 아까 인사했잖아. 네가 웃는다. 미소 짓는 너는 아름답다.

"고마워."

2015/2/14/라알

너, 이게 무슨 꼴이야, 하고 물었다. 대답은 바라지 않았다. 네 입 속은 초콜릿으로 가득 찼고 손가락은 초콜릿 가루가 묻어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손을 마주잡자 너는 곧 고개를 돌리며 뭐라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달콤한 초콜릿과 남작님은 내 생각보다 꽤 잘 어울렸다. 기껏해야 고맙지만 난 먹지 않을래,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저분하게 칠해진 입가에 얼굴을 가져다대자 너는 뭐라 말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씁쓰름한 가루였고, 기침을 참으려고 애쓰는 네가 문득 우스워서 나는 웃어 버렸다. 공기가, 달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와 내 사이의 공기가.

네 이 사이로 녹아 흘러내리는 초콜릿과 네 혀를 상상했다. 네가 그걸 뱉지 못하게 네 입을 틀어막았다. 네 코에서 식식대는 숨이 다급히 빠져나왔다. 아, 화가 난 거야? 장난스레 묻자 너는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선물이야. 먹어, 알로이스. 이제 손을 떼도 되지 않을까, 이 녀석아. 하고 네 눈이 간절히 소리치고 있었다. 안 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손을 떼면 키스하고 싶어질 거야.

너는 날 밀어 넘어트렸다. 네 입을 감싸던 내 손도 넘어진 몸을 따라 떨어져나갔다. 아쉬운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새기고 싶은, 손바닥 한가운데에 남은 단 맛의 표식. 아무래도 오늘의 나는 조금 이상했다. 싱관없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한 행동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

네가 위에서 날 보고 있다. 네 입술은 붉다. 알버트, 입에 초콜릿 묻었어.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키스 해, 라이오넬.

지구는 여기에서 멀다.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보이지는 않을 거리다. 그렇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모성. 나는 하늘을 꿈꾸었지만 동시에 중력을 사랑했다. 나를 땅에 붙이는 그것. 기체에 올라타 레버를 올리면, 느긋하고도 차분한 감각으로 온 몸을 감싸던, 그러나 5분 뒤면 잠깐 동안 온전히 사라질 그것.

죽음은 눈 앞에 여러 방법으로 다가온다. 마치 강철 가시가 달린 벽 사이에서 압사당하는 느낌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사실 이 말 그대로였다. ELS는 분명, 생명체였지만 배려심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으로부터 진화할 것이다. 그들은 과격했지만 동시에 배우는 게 빨랐다. 여러 기체와 함선들을 완벽하게 카피한 그것들은 적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적이 되어 보라는 옛 격언을 직접 실천에 옮겼다.

사실, 인간들도 별반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가시 하나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플래그 슈트의 의의는 무엇인가. 시체 수거반이 왔을 때 적의 시체인지, 아니면 아군의 그것인지 구분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아닐까. 어쨌든 나는 곧 금속으로 뒤덮일 것이다.
고통스러울까. 잘 모르겠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내 플래그 커스텀이 폭발했을 때가 기억난다. 몸의 반쪽이 화염에 휩싸였다. 나는 치료를 받았지만, 한동안 화상 입은 쪽 손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오른손이었다. 루시가 수프를 뜬 수저를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들고 후후 식히는 것을 못 봐서 유감이었다. 그녀는 병원에만 오면 침착한 얼굴을 벗어던지고 모든 일에 서툴러지고는 했다.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그 때는 내가 처음으로 죽음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아니, 그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처음으로 생각한 순간이었다.

왼손 손목이 점점 무거워졌다. 금속이 슈트에서부터 살갗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기체를 빠르게 한 바퀴 회전시켰다. 조여 오던 ELS가 잠시 멈추었다. 어쨌든 잠시 뿐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지 생각했다.

5분 정도였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연습하던 곡을 떠올렸다. 4분 30초 정도 되는 소품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그녀는 첫 음부터 미스키를 낸 뒤, 내게 사과하고 한번 더 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연주회는 내일이다.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었다.

진심으로 가고 싶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은빛 가시로 뒤덮인 앞 유리 사이에 얼기설기 엮인 금속 구체가 보였다. 꽤 끔찍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황폐한 행성. 그 어떤 나무도 없고 물과 흙과 빛도 없다. 그렇다면 안은 어떨까? 그건 행성이라기보다는 행성의 모양을 한 블랙홀 같았다.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나는, 이미 궤도에 말려든 셈이 아닐까. 나는 끌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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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그라함의 기일이었다. 나는 먼지가 더께진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기본 연결음이 놀리듯 길게 이어져서 끊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려놓으려던 참에 달칵 소리와 함께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묘한 안도감이 들면서 어깨의 힘이 빠졌다. 여보세요?

"응, 나야."

너야? 적당한 말을 입 안으로 굴려 보는 그녀의 찡그린 얼굴이 눈에 선했다. 지금이라도 끊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기다리자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이 말을 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에게 상황을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그래 보았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서 우리는 전화선을 사이에 두고 또 다시 망설였던 것이다.

그녀는 지난번 통화에서도 그렇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몇 년 전에 갓 이사해서 나무 박스 두어 개를 품에 안은 채 인부들에게 뭐라 소리치는 그녀를 뒤로하고 휴대폰 배터리부터 갈아끼운 것은 나였다. 그것부터 하지 않았더라면 301호가 아니라 302호라고 전화한 그녀의 남편의 뒤늦은 노력은 허사가 되었을 터였다. 나는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올 걸, 하고 하루 종일 되씹었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는 부부의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거실 쇼파에서 그라함이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 후 뒤늦은 신혼 생활에 푹 빠진 그녀에게 전화하는 일은 한 달에 두 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점차 아무도 없는 집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톱을 물어뜯으며 친구나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보다 텔레비전을 켜고 멍하니 뉴스를 보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확인하려면 그 편이 나았다. 사상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면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눈을 붙이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문이 열렸다. 열리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너무나 당연한 일에 감사해하고 매달려 왔다는 걸 깨달은 때는 너무 늦은 때였다.

"아무 일도 없어."

장례식 날에 그녀는 나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보기 흉하게 코를 훌쩍이며 정말 안됐다고 울먹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열 번 정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어야 했다. 텅 빈 관에다가 뿌릴 뼈마저 없었지만,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어쩌면 내심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집에 가서 좀 자고 일어나면 그라함이 들어올 거야. 뭣 하러 장례식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까지 벌였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지도 몰라.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자 그녀는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힘들 때 꼭 전화하라고 덧붙이고는 집으로 가 버렸다. 나는 전화하지 않았다.

"이번 주에 시간 있어?"
이제야 좀 사람이랑 말을 할 기운이 생겼나 봐? 그녀가 말했다. 화가 난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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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함 에이커, 터미널 AU

오래 전에 나의 아버지는 곧 내 손에 들려져 우체국 3번 카운터로 향하게 될 편지를 쓰느라 일주일에 두서너 번 정도 펜뚜껑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고는 했다. 아버지는 건네받은 편지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고 뜯어볼 생각도 않았던 나에게 서랍에서 꺼낸 어떤 흑백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어떤 음악가들의 단체 사진이었다는 것만 기억나고 자세한 건 거의 다 잊어버렸던 그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두 달 전이다. 오래된 사진은 이사를 위해 잠시 꺼내둔 아버지의 유품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사진을 꺼내들고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입을 꾹 다문 어린 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며 이 사진을 보여주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봐, 모두 음악의 대가들이야.' 청소년기의 나는 재즈보다는 다른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들었지만 그렇다고 재즈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아마 아버지의 은근한 영향이었을 거라고 뒤늦게 생각하며 나는 아버지의 다음 말을 떠올렸다. '답장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넌 모를 거다.' 그 사람들은 정말로 모두 음악의 대가였고 아버지의 머릿속을 점령하는 커다란 하나의 기준인 동시에 나에게는 토요일 오전 30분을 뺏는 주범이었다. 아버지가 금요일 밤마다 투박한 손으로 찬찬히 라디오 채널을 맞추던 광경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종종 답신을 받고는 했는데, 내가 묵묵하게 아버지 대신 우체국을 드나든 건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 때 답장을 받는다는 것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직 쓰지 못한 편지지 십여 장과 잉크를 남기고 돌아가신 것은 그로부터 2년 뒤다. 그 편지지들은 사진이 들어 있던 상자 바닥에서 56장의 사인 종이들과 함께 겹쳐져 있었다. 인정해야 했다. 아버지는 꽤 괜찮은 재즈 애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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