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닝(@bining33)님께 드립니다 >_</


*본문에 언급된 책은 테하누입니다 ㅇ0ㅇ 재밌어요


당신은 밤에 일하고 새벽에 잠든다. 당신은 잠을 잘 자지 못한다. 당신에게 습관이 하나 생겼다. 잠이 오지 않는, 동 트기 직전의 내 서재에서 책을 한 권 빼어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잠들었다. 희여멀건한 아침에 서재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복잡한 추리소설을 읽고 있었다. 주인공이 범인을 밝혀내기 직전(당신이 범인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나는 출근했다.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와서 곧장 서재로 갔다. 안락의자에 당신이 읽다가 내려놓은 책이 보였다. 당신이 책갈피를 해 두어서 어느 부분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살인자야, 하고 주인공이 절규했다. 살인자의 이름을 입 속에서 두어 번 굴렸다. 당신의 나직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신이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인데도 당신이 이미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는 듯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에 당신은 이미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서재로 가서 당신에게 어제 그 책의 클라이막스를 잠깐 읽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당신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러마고 대답했다.


당신의 목소리가 꿈에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꼭 현실 같은 꿈을 꾸었다. 당신과 마주앉아 당신이 책을 읽는 것을 구경하는 꿈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목소리가 예뻐, 그랬던가. 그랬었나. 그렇게 말했었나. 당신은 무어라고 대답했지,


우리는 독서 취향이 꽤 잘 맞는 모양이다, 당신이 딱히 새로 책을 사지 않는 것을 보면.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 앞이 새빨갰다. 눈을 만져 보니 핏물 같은 게 묻어나왔다. V 교수, 눈이 왜 그래? 울었습니다. 충혈된 모양이네. (아뇨, 그냥 울었는데요.) 그날 하루 종일 새벽의 꿈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의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신이 오늘은 책을 읽지 않은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당신의 습관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날 밤을 새고 새벽 다섯시에 당신이 퇴근하길 기다렸다. 당신은 문을 열고 무감정한 얼굴로 한 손에 들린 힐을 내던졌다. 입술이 조금 번져 있었다. 당신은 당신을 기다리는 나를 보고도 딱히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옷을 갈아입고 서재로 들어갈 때까지 당신을 주욱 지켜보았다. 당신이 의자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왜 책을 읽지 않았냐고 물었다. 당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읽었다고 했다. 꿈을 안 꿨어. 네가 깬 후에 잊어버렸던 걸지도 모르지. 무슨 책을 읽었는데, 당신은 대답하지 않고 책 한 권을 빼냈다. 그러고는 다리를 꼰 채 읽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어떤 그릇으로 만든 거예요. 난 그 모양을 알아요. 하지만 그 진흙은 모르겠어요. 삶이 나를 흔들어 춤추게 해요. 난 그 춤을 알죠. 하지만 무용수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게드가 한참의 침묵 끝에 말했다. "그렇게 그 춤을, 영원히 추어야만 한다면..."


당신은 읽기를 멈추었다. 눈에서 피가 조금 흘렀다. 당신이 웃기 시작했다. V, 당신 지금 되게 바보 같아. 당신은 책을 내려놓고 다가와서 내 눈가를 엄지로 천천히 닦아냈다. 당신에게서 향수 냄새가 났다. 나는 당신의 품에 안겨 다시 한 번 당신을 위해 조금 울었다. 당신은 계속 웃었다.

우울(@_deep_r)님께 드립니다! 

*제목은 더 스미스의 동명의 곡에서 따왔습니다.



*

12월 26일이 되자 준호는 머리 위에 뿌리를 내린 채로 누렇게 뜬 겨우살이풀을 뜯어내느라 바빴다. 준호는 무릎을 꿇고 머리 위를 미친 사람처럼 매만졌다. 마른 잎의 버석거리는 소리가 징그러웠다. 범신은 그 모든 시도를 문 틈 너머로 보고 있었다. 준호는 그 날 내내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문을 두드렸다. 신부님, 밖에 계시죠. 범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위 좀 가져다주세요. 잘라내고 싶어요. 잘라내게 해주세요. 왜 없지, 분명히 방 안에 있었는데, 준호는 흐느껴 울었다. 범신은 가위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범신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27일에 준호의 머리에서 잎이 하나 떨어졌다. 딱딱하게 오그라든 상태를 이기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식사를 먼저 끝내고 준호를 주시하던 범신은 재빨리 죽은 잎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그날 밤 제 자신에게 왜 그 잎을 버리지 않았는지 되물었다. 풀떼기가 목을 조르는 꿈이라도 꾸겠는데. 잠을 이루지 못한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반대로 그날 밤 범신은 25일 밤의 일을 다시 재생하는 꿈을 꾸었다. 준호가 웃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취해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게 좋은 점이 뭐냐면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그러니까... 꼭 해야만 한다는 게,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준호는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범신은 잠에서 깨어 주머니 속으로 다시금 손을 집어넣어 나뭇잎을 매만졌다. 그것이 그에게 안정을 주는지 또는 더 큰 슬픔을 주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그 후로 범신의 주머니 속 죽은 잎들은 하나씩 수를 늘렸다. 크리스마스 이후 사흘 째 밤에 둘은 바닥으로 원을 그리며 천천히 낙하하는 잎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었다. 건조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몸을 돌린 건 준호였다. 범신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주워들었다. 왜 바스라지지 않는가,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정신은 아직도 25일에 머물러 있었다. 삶의 틈새, 아주 작은 틈에서 일어난 실수일 뿐이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지, 그래, 아가토. '겨우살이는 낭만적이죠.'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좋은 점이 뭐냐면요...' 그들은 그 날 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1월이 되기 직전에 범신은 바닥에서 얇은 끈 같은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죽은 식물 줄기였다. 그 옆에 실날같은 뿌리가 박살 난 유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준호가 먼저 말했다. 버리고 올게요. 


그 날 준호는 집으로 돌아와서 범신의 옷 주머니를 헤집었다. 누런 이파리들이 몇 개 나왔다. 준호는 범신이 보는 앞에서 그것들을 가볍게 쥐었다. 힘없는 가루들은 준호의 숨 한 번에 창 밖으로 맥없이 날아갔다. 언제쯤 화내실 계획이세요? 일 없다. 범신이 대답했다. 준호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울상이겠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범신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보지 않았다. 


그거 아세요? 


그거 아세요, 하고 준호가 말했다 나는 뭐가 말이냐, 하고


크리스마스 겨우살이요. 응. 겨우살이는 낭만적이에요. 뭐가 말이지, 그게 좋은 점이 뭐냐면요, 그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대로 키스해도 된다는 게...그러니까...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게. 필연적인 키스, 멋지잖아요. 뭔가 그래요. 누가 그 사람을 지나치겠어요? 그날은 우리 둘 다 취했다. 지칠 때까지는 아니고, 적당히 행복한 지점이었다. 그래, 우리는 그때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범신은 생각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꼭 해야만 한다고, 그리고 참 낭만적이라고, 그런 감상에 젖었었던 거라고, 범신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신부님, 그거 아세요? 범신은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겨우살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겐 키스해도 된대요. 준호가 또다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머리 위엔 아무것도 없다. 크리스마스는 끝났다. 크리스마스에... 준호는 곧 입을 다물었다. 왜 말을 안 해, 임마. 범신이 맥없이 웃었다. 준호도 함께 웃었다. 준호야, 왜 다 말하지 않니, 준호야, 크리스마스는 정말 끝이 난 건가, 다시는 오지 않을 그 날, 뿌리뽑힌 죄의 낙인, 왜 말을 하지 않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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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는 후에, 그 순간이 마치 지독한 악몽 같았다고 묘사했다. '귀를 잘라내버리고 싶었어요...' 테이프가 달칵거리며 돌아간다. 그것에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A의 울부짖음만이 기록에 남겨질 것이다. A는 그때 대도시의 큰 대로변을 걷고 있었다. 눈을 들자 어둠에 잠긴 매우 높은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기묘한 인상을 받았지만 그는 그것을, 순간의 이질감으로 치부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고독하구나.' 도시 한가운데에 붙박힌 듯 선 고독한 사람. '모든 것을 굽어보시는 우리 주님...' 거대한 전광판에 십자로 겹쳐진 두 직선이 돌연 나타났다. 눈이 부신 A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는 곧 빠르게 지나가던 어느 행인과 어깨를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A는 문득 그를 붙들고 골목 끝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에게 거친 소금과 돼지 피와 흐르는 성수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전광판이 고장났는지 문득 꺼졌다. 빌딩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다시 적막에 휩싸여 한없이 그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 아무도 신경쓰거나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키거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를 골목 끝의 그 방에 데려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 그 행인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A를 밀치고 급히 뛰어나가...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A는 길 한가운데에 서서 쓰게 웃었다. 

 '돌아오지 않았다, 라는 말이 이상해요.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가 버린 거죠. 돌아오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바로 우리예요. 하지만 우리는 결국 돌아오고, 돌아오고, 또다시 돌아오고...' 

 그의 주변을 둘러싼,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이 차례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A는 고요히 몰려드는 시선이 총알이기라도 한 듯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는 그 안에서, 자꾸만 부셔오는 눈을 소매로 가리며, '그 십자가 전광판 말인데요, 역시 너무 거대해서, 압도당할 만큼...' 그렇게 그들의 눈에서부터 쏟아지는 비명을 하나하나 들으며 끝내 울기 시작했다. '귀를 잘라내버리고 싶었어요...무언가 무서운 것이, 맨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차가운 흙과 아스팔트...그 비명은 제 거였어요. 제가 지르고 있었다구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신부님, 신부님은 들리죠, 저 지금 소리 지르고 있어요, 신부님...그 모든 사람들은 제 비명을 보고 있었어요. 그들의 눈에서 비명을 지르는 제 입이 보였어요...그 반사는 너무 지독해서, 피가 흐르는 날것 그대로의 거울이라서...그런데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신부님, 듣고 계세요? 지금 듣고 계세요, 김 신부님?...' 

 문을 부서져라 두들기는 소리를 들은 P는 문을 열고 머리며 옷이며 할 것 없이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는 A를 발견했다. A는 한참 동안 그렇게 P를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P는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A의 머리에서 흐르는 물이 바닥에 조금 고일 무렵 P는 수건을 내밀었다. 감기 걸린다. 좀 말려. P가 그의 어깨를 잡고 문 안으로 들였다. 그는 고분고분하게 P의 말에 따랐다. 신부님. A가 말했다. 무서워요. 뭐가. 밖에 아무도 없어요. P는 덜덜 떨고 있는, 무서워서인지 젖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A를 내버려두고 창문께에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가까운 고가도로와 저만치 떨어진 사거리에는 붉은 조명을 켜고 달리는 자동차가 가득했다. 빌라 바로 아래에서는 유리병 같은 게 깨지는 소리와 고양이가 날카롭게 비명지르는 소리가 뒤섞였다. 여기 2층에 고양이 싫어하는 새끼가 산다. P가 무겁게 말했다. 가끔 저렇게 병나발 들고 지랄하는데 존나 시끄러워. A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밖에 아무도 없어요. 길에도 골목에도 건물 안에도 아무도 없어요. 신부님이랑 저 뿐...그만, A. P가 말을 끊었다. A. 예, 여기 있습니다. 정신 차려. 바닥에 쪼그려 앉은 A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 같았다. 너는 여기 있잖아. P는 그것이 최선의 대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A도 마찬가지였다. P가 건네주었던 수건을 꽉 끌어안으며 A가 말했다. 정신 차리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 P는 불 밝은 거리를 정신없이 걷는 A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는 쉴 새 없이 주변과 충돌한다. 궤도를 잃은 행성이다. A는 무엇도 잡지 못하고 무엇도 A를 잡지 못한다. A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 역시 A를 모른다. A가 아는 것,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오로지 P뿐이다. P는 이 말이 주는 무게감에 잠시 비틀거렸다. 꽤 오랜 기간 동안 버텨온 것임에도 이번에는 특히 버거웠다. 멍하니 서 있는 P에게 A가 수건을 내밀었다. 여기요. P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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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을 파개한다

Devil may care

신부님, 신부님, 신부님, 우리 연기를 좀 해 보자구요. 신부님은 제 아버지고 저는 신부님 아들인 걸로. 착한 아들이요. 착하고 말 잘 듣는 아들. 준호가 의자에 앉은 범신의 무릎에 매달린 채 제 이마를 부비며 말했다. 범신은 제 옷자락에 밴 담배 냄새가 며칠 전부터 전혀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벽 속에 아마 쥐가 살 작은 여관 안에는 담배 연기가 빠질 날이 없었다. 이것 또한 그들에게 들러붙은 것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수많은 징표들, 그들이 아주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서로만을 눈에 담기 시작했을 때에 돌연 생겨난, 마치 먼 과거의 매독 자국처럼, 아니다, 이 비유는 틀렸다. 팔에 난 매독 자국이 무언가로 발을 들였을 때 생겨난 징표라면 회색 연기 너머로 보이는 준호의 울 것 같은 얼굴은 더 이상 생에 아무 연이 없는 자의 그것이었다. 그래, 준호야, 내 아들아. 난 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널 지켜보았지...진짜 아버지는 그런 말 안 해요, 아버지. (사랑한다, 내 아들아.) 꼰대 녀석아. 그게 언젯적 아버지의 표상이냐. 그럼 집어 치우죠, 뭐. 그럼 우리 연인 놀음이나 하자구요. 연기로 흐린 눈 앞에서 준호가 웃는다. 이 녀석아, 철없는 꼰대 녀석, 애송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내 제자야. 그렇게 말씀하셔봤자 다 아무 뜻도 없는 거 알고 있어요. 절 막지 않으실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제가 들고 있는 담배 하나도 못 빼앗으시면서. 둘은 웃으면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꾸어 물었다. 웃음은 점점 더 산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소매로 눈가를 닦던 준호가 문득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김범신 씨. 숨을 조금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 좀 벗겨 주세요, 갑갑해요. 왜 이걸 안 벗었지. 애초에 너 왜 이걸 신고 있었냐? 잊어버렸어요? 담배랑 술이랑 그런 거 사러 다녀왔잖아요. 아, 김신부님, 카운터 아저씨가 민증 좀 보자는 거예요. 웃겨요? 저 진짜 신부님 아들뻘로 보일걸요? 준호가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범신의 귀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범신은 준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싫어요. 그럼 아까 왜 그런 소리 했어. 웃기잖아요. 뭐가 웃겨. 뭐가 그렇게 웃겨, 최준호. 술이나 마시자. 마십시다아. 부어 버려. 바닥에요? 이 미친 녀석아. 입에 붓던가 바닥에 붓던가. 포도주 병이 넘어지면서 바닥에 강을 그렸다. 어라. 왜 그래. 전 분명히 소주 사왔는데. 그분께서 결혼식이라 특별히 바꿔 주셨나 보다. 지금 이거 결혼식이예요? 우리 진짜 단단히 헛소리 중이네. 무슨 소리야. 넌 이 집 문 틀어잠그고 나랑 들어앉았을 때부터 내가 말이야, 감이 딱 왔다고, 아, 얘 돌았구나. 그건 신부님도 마찬가지잖아요, 하고 준호가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지. 왜 신발 안 벗겨 줘요. 발 이리 줘. 범신은 발목을 붙들었다. 한 손에 모두 들어왔다. 그는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겨내고는 아무 곳에나 던졌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준호에게, 주변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모양인지, 준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비가 오네요. 몰랐는데. 범신은 반쯤 열린 창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계속 바닥에 누워 있기만 했다. 방충망은 닫혀 있었다. 작은 격자무늬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서 물방울의 갯수를 셌다. 고개를 살짝 들어 발치를 바라보자 준호의 맨발이 보였다. 불그르슴한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저거 뭐야, 최준호. 아까 넘어트려서 흐른 주님의 보혈을 밟았어요. 이제 내가 주님 부엌의 이스트 반죽에 머리를 처박으면 되나? 그런 거 여기 없잖아요, 관둬요.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범신은 그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입을 가져다댔다. 너 자꾸 나를 손발 페티시 있는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인데. 준호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누군가 새벽 세 시에 벽을 쾅 내려칠 때까지 계속해서 떠들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나눠 폈다. 사랑해요. 뭐? 사랑해요. 마지막 남은 생명줄처럼 서로를 만지고 키스하고 끌어안고 오직 서로의 눈 안에서만 평안을 얻을 수밖에 없는, 그러나 사실 모두 거짓이 아닌지, 기초 없이 지은 집은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이라고, 뭐뭐서 몇장 몇절 말씀. 굳이 거기서 끌어오지 마세요. 구름이 사라지면 우리도 떨어져 죽겠죠. 왜 그렇게 말을 해. 왜 그런 말을 해.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거든요, 저. 키스해 주세요.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 술 다 떨어졌네. 이리 와. 술병 조심해요, 거기. 그들은 손을 잡듯이, 또는 이마를 기대듯이, 또는 등에 손을 올려놓듯이 입을 맞추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거기에 누워 있을 것이다. 눈을 뜨기도 번거로워질때쯤 다시 눈을 감고, 낮에는 잠을 자고 다시 밤마다 깨어나는 이름 모를 꽃처럼, 아, 신부님, 저것 좀 보세요, 낮에는 안 그랬는데 저녁에는 피네요, 준호야, 준호야, 준호야, 착한 내 아들. 네가 아직 너 자신을 억눌렀을 때...그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좋으면서 고통스러웠고. 그때는 우리 둘 다 길에 쭈그려 그 꽃을 보았다. 그때는 그랬지, 사랑하는 내...

무리에서 가장 어린 새가 아이다 왕에게 물었다. 모뉴먼트는 누구의 것입니까? 아이다가 대답했다. 모뉴먼트는 우리의 것이다. 나이 어린 새가 또다시 물었다. 왕이시여, 모뉴먼트는 누구의 것입니까? 아이야, 돌계단을 마주하거라. 우리는 그곳을 걸어 꼭대기에 도착할 것이다. 부드러운 벽을 매만지고 폭포 위를 낮게 날으려무나. 왕이시여, 모뉴먼트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 이곳은 한때 인간의 소유였다. 그렇다면 모뉴먼트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까? 무리에서 가장 나이든 새가 가장 멀리 있는 모뉴먼트를 바라보았다. 모뉴먼트의 깊은 곳에서 종소리가 들리자 그는 눈과 귀로 할 수 있는 만큼의 슬픔을 끌어안고는 고개를 돌렸다. 늙은 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고향에 있었음에도 동시에 바깥에 있었나이다. 결국 검은 강에 스스로 몸을 던져 우리의 날개를 검게 물들였지요. 아이다 왕은 말없이 그의 거친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눈을 가리고 그러쥐었나이다. 나이든 새여, 흐느낌을 그치시게. 검은 재에서부터 태어난, 가장 젊으며 또한 가장 나이든 이여, 오래된 세계를 보는 자여. 우리 모두는 그러한 운명을 타고났으며, 그 누구도 그 운명을 내던지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내려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왕이시여,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로부터 온 전언이다. 인간이 말입니까? 아니, 모뉴먼트가.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과거 그 자체입니까?)


그들은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았다. 무리의 선두에는 아이다 왕이 있었다. 그녀의 째지는 울음소리가 그들보다 빨리 허공을 날아 사라졌다. 그들은 해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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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님께 드립니다 >…<)/ 

드뷔시의 Suite pour piano-sarabande를 들으면서 작업했습니다!


숲 속에는 호수가 없어요. 누군가 말했다. 미신입니다. 누군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들의 덩어리죠.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름달이 비추는, 고개를 숙이고 그 빛에 의해 바닥이 엷게라도 보일까 눈을 찌푸리다 보면 무언가가 올라올 거라고 믿게 되는 그런 호수가 있을 거라고, 있어야 한다고 한 사람이 말하면 어떨까요? 꿈에서 본 게 아닐까요? 하지만 그걸 5인이 주장한다면, 아니, 10인이 동시에 꿈을 꾸었다면…숫자는 점점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 이상으로는 늘어나지 않아요.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서약을 하게 됩니다. 숲 속에는 인어가 사는 호수가 없다. 나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없다.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서약을 거부한 한 사람이 남게 됩니다. 이제 다수가 말 할 차례입니다. 들어 봐, 차분하게, 그렇지. 에이시, 숲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 넌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거야. 사사즈카 에이시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문을 열었고 깊은 숲의 질척한 가장자리에서 또다시 살짝 비틀거렸고,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녹슨 랜턴을 꽉 쥐었다. 에리가 말했다. -얼마나 걸려요? 그녀는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그녀의 눈은 번쩍였다. 두 시간 쯤. 사사즈카가 대답했다. 사사즈카는 서재 책상에 핀으로 박아 둔 에리의 답변을 기억해냈다. 칼로 갈색 봉투를 살며시 잘라내자 질 좋은 종이가 딸려나왔다.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지금 갈게요. 기다려요.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기묘한 정신을 끌어안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눌 준비는 되었는지에 대해 확신조차 할 수 없는 채로. 어두운 숲은 이를 악물고 그들을 기다렸다. 에리 역시 랜턴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발 아래가 흙인지 진흙탕인지 물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옅고 넓은 물웅덩이를 걸었다. 텅 빈 하늘이 바닥에 비춰지다가 발걸음을 내딛는 주변으로 넋없이 흩어졌다. 이 밤이 지나면 코우바야시 에리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별빛이 흐르는 엷은 땅과 울부짖는 나무와 오직 혼자 남은, 인어에 대한 꿈을 꾸는 남자에 대한 꿈을. 혼자 남은 것은 인어인가? 인어일 것이다. 그녀는 흐릿한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억을 안고 다시 돌아가겠지. 말을 타고…그리고 비밀을 간직한 것은 두 사람이 된다.


그들의 숨에 불덩어리가 섞여들었다. 바람이 한 층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숲에 있는 것과 동시에 들판에 서 있었다. 들판은 물로 채워졌다. 그들은 물 속에서 물을 찾아 움직였다. 사사즈카는 나뭇가지를 헤치며, 달이 호수 속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눈 앞에 그렸다. 거대한 돛처럼 생긴 흰 새 한 마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얼마 뒤 은색으로 빛나는 고리 하나가 물 위로 떠올랐다. 사사즈카는 그것을 집었다. 순간 그는, 물 속의 하얀 눈 두 개를 보았다. 검은 물은 달빛에도 불구하고 깊고 짙어서, 그 빛나는 눈은 마치 길고 검은 통로의 반대편 끝에 홀연히 나타난 것 같았다. 그쪽의 눈이 천천히 감겨 사라지자 이쪽의 눈도 감겼다. 날이 밝고 자신의 방 바닥에서 일어난 사사즈카는 온통 진흙투성이인 부츠와 은색 고리를 발견했다. 새의 발목에 끼울 만한 크기였어. 그가 에리에게 말했다. 에리가 대답했다. 누군가가 물 속에서 그 새를 새장에 안전히 넣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먹이를 주고… 그들은 각자 머릿속에 돛 같은 새, 흰 새를 그리며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치웠다. 이슬이 눈물방울처럼 가지를 휘감았다. 에리는 그것을 손끝으로 훔쳤다. 누가 울고 있어요. 무거운 침묵이 그들의 길을 밝혔다. 


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가 있는 빈터 위에 보름달이 완벽한 퍼즐처럼 끼워맞춰졌다. 저 멀리서 늑대와 까마귀가 끊임없이 울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직 무언가로 채울 여백뿐이었다. 둘은 호숫가에 앉았다. 맑은 물이 가장자리를 삼켰다. 사사즈카 씨, 그 고리를 줘요. 에리가 호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속삭였다. 사사즈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은빛 고리는 더욱 작아 보였다. 한 사람의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라면…두 사람. 둘. 두 개의 고리. 하지만 고리는 하나였고, 사사즈카가 어떤 생각을 완성하기도 전에 그녀는 고리를 건네받았다. 이제 그 순간이 찾아왔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에리, 말해봐. 사사즈카가 말했다. 네 꿈은 뭐지? 이제 네가 꾸게 될 꿈은…하지만 그 전에는. 에리가 말했다. 나는 물을 가르고 있어요…


…짙어서 내 숨을 막는 물을. 나는 그 안으로 뛰어들고…


그는 고개를 들어 에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편지를 받는 그녀, 만년필을 휘갈기는 그녀, 말을 타는 그녀, 웃는 그녀, 말하는 그녀, 그녀의 집, 방, 책들, 그가 그녀와 함께한 모든 시공간이 한 점으로 모였다. 그 점이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그녀는 동시에 날카로운 새의 눈, 차가운 맑은 물 같은 눈으로 부드럽게 그를 마주했다. 흰 날개가 사사즈카를 끌어안았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답장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도 이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날개가 그의 볼을 찔렀다. -미안해, 내가 잘못 봤어. 그가 속삭인다. -흰색이 아니라 은색이군. 에리는 공기를 가르며 날아올랐다. 큰 날개가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가렸다. 호수가 날갯짓의 반동으로 물결쳤다. 그녀가 화살처럼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사즈카는 호수로 몸을 숙였다. 고리 하나가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그는 그것을 집었다. 빛의 눈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눈 속의 흰색에 대하여, 그 흰색이 품은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렸다…그리고 눈을 감았다. 


보름달이 뜨면 돌아와요. 호수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우바야시 에리는 꿈을 꾼다. 별빛이 흐르는 엷은 땅과 울부짖는 나무와 오직 혼자 남은, 인어에 대한 꿈을 꾸는 남자에 대한 꿈을. 혼자 남은 것은 남자다. 그는 혼자서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고리를 끼우러 뭍으로 올라온다. 달빛을 폐에 가득 채우며…


숲 속의 인어에 대한 꿈을 꾸는 사람은 오직 이 세계에 하나뿐이다. 하지만 비밀을 간직한 것은 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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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츄(@_Trapezium)님께 드립니다.


“빅터, 가만히 좀 있게. 나랑 비슷한 덩치의 성인 남성을 안고 눕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흠, 좀 더 붉게, 좀 더 파랗게, 더 보랏빛으로, 빛나는 초록색, 창 밖에선 어린 아이가 나무통을 붙들고 토하고 있고 저택의 유령들은 입에서 양잿물과 연기와 넝마 조각을 뱉지. 다음에는 누가 관에 들어갈지 노인의 틀니를 걸고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면서 한 방씩 쏘는 거야. 빵야!”

“계속해.”

“이것 봐, 간지럽지 않아? 간지럽지 않냐고? 맘만 먹으면 이 손가락…붓으로 자네 귓바퀴라도 간질일 수 있는데. 그것도 파란색 물감으로 말이야. 자네 혹시 파란 귀를 가지고 싶지 않나? 그래, 유령들은 사실 모두 푸른색 오라를 풍기는 중이었지…그들의 몸에서는 갓 구운 레몬 파운드 케이크 냄새가 나서, 그들이 주변에 있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안 그러면 긴 빵 칼로 허공을 멍하니 찌르게 될 지도 모르네. 케이크는 달콤한 입에, 술은 정수리에, 소금은 유령들에게.”

“계속해.”

“요컨대 전세계의 모든 덜 구워진 파운드 케이크를 증오하는 붉은 왕이 이 세상에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는 얼굴보다도 큰 콧수염과 콧수염만한 발, 그리고 발 만한 새끼손가락을 가진 아주 멋있는 황제일세. 내가 왕이라고 했나, 빅터? 왕이 먼저인가, 황제가 먼저인가, 아니면 콧수염이?”

“왕.”

“좋아. 그는 흙에서 칼을 뽑고는 케이크를 정확하게 반으로 갈랐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케이크는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고 덜 익어서 뭉그러진 단면이 난잡하게 까발려졌지. 붉은 왕은 혀로 칼을 핥았어. 그는 사실 덜 익은 케이크 반죽을 먹는 걸 즐겼거든.”

“간지러워, 앙리.”

“그래? 빵을 자른 바로 그 위대한 칼도 딱 자네처럼 속삭였지.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모두가 그걸 들을 수 있었지. 사마귀의 눈을 찌르던 개미도, 나무를 오르던 공작 부인도, 탑에서 뛰어내린 젊은 회계사도, 밑에서 그를 저주하던 그의 아버지도, 사과를 베어물던 그의 약혼녀도, 어머니도, 바다를 질주하던 기차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뱀도. 그리고 작은 발을 바삐 놀리며 붉은 폭군에게로 달음박질치던 현자들도. 그들은 모두 돼지였지.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말일세. 무슨 색이었을까?"

"흠."

"물론 초록 색이었지. 그곳의 진흙탕은 마치 초록 페인트를 들이부은 것 같이 생겼거든. 그들은 정신없이 뒹구는 와중에도 코안경을 제대로 잡고 미간을 찌푸렸네. 한 발에 든 중요한 국가 서류가 사실 백지였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말이야. 그들은 모두 마법을 쓸 수 있었지. 하지만 국무 장관으로서의 일처리는 형편없었지."

"그럼 유령들은?"

"유령들은 다 함께 둘러앉아 일출을 지켜보다가 울기 시작했지. 대부분은 안전하게 무덤으로 들어갔지만 일부는 자기가 외출한 틈을 타 빈 무덤에서 아기를 어르던 나쁜 구울들을 쫓아내느라 여념이 없었고, 남은 두엇은 그냥 서로의 눈물을 핥아주었네."

"간지럽다니까, 앙리."

웃지 말고…나까지 웃게 되잖나. 이런 진지한 서사시를 읊으면서 웃으면 쓰나. 여하튼 다들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거지. 붉은 왕은 나무 밑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서 칼을 꿀꺽 먹어치운 다음 잠에 빠졌네. 이제 그를 깨울 사람은 붉은 여왕 뿐이야. 돼지들은 모두 함께 안경점으로 달려가서 예쁘고 빛나는 새 안경을 맞추었네. 빅터, 이제 자야지. 잘 자.


앙리 뒤프레는 말 없이 웅크린 등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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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낡아빠진 레그타임을 추자, 그건 매우 빠른 춤곡이다. 음악과 함께 미친 듯이 쏟아지는 즐거움이 빛을 반사하는 대리석을 미친 듯이 때렸다. 빛나는 가죽 구두가 기묘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그었다. 반반한 검은 가죽에 주름이 졌다가, 발뒤꿈치를 내리자 다시 원위치로, 자아, 앞으로 가! 어쨌든 벤지 던은 상대를 거의 완벽하게 리드하는 데에 성공했다. 발을 밟지 않고서 말이다. 모두가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러나 벤지 때문은 아니었다. 오늘 밤은 유독 길었다. 아무도 홀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안에 테러범이라도 있을까, 벤지 벤지 던은 웃지 않았다. 이단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샹들리에를 조심해. 천장에 매달린 무언가를 볼 때면 그들은 자동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는 했다. 아니, 이단. 벤지가 말했다. 샹들리에가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서 그런 거야. 직업병에 걸린 건 너지. 어쨌든 그들은 다시 춤을 췄다. 키스할까? 이단이 묻자 벤지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휙 돌렸다. 이단은 여전히 잘 웃었고, 여유가 넘쳤으며,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그런 그를 다시 끌어당겨 품에 안은 벤지 던은 키스를 정중하게 거절하고는 대신 이단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벤지, 집중하지 않으면 다시 발을 밟게 될 거야. 어쩌면 네 오른발이 왼발을 밟을 지도 모르지. 내 발이 아니라. 벤지는 몸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몸을 잘 쓰는 편은 아니었다. 둘은 처음 벨을 누르고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 고등학생들처럼 낄낄대기 시작했다.

벤지 던은 이단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런 벤지를 일종의 코마 상태에서 헤어 나오게 해 준 것은 큰 컵케이크 한 입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그의 앞에는 흐뭇하게 컵케이크를 자신의 입에 쑤셔 넣고 있는 이단과 컵케이크가 가득 올려진 은쟁반을 든 청년이 서 있었다. 벤지는 급하게 입에 든 빵을 우물거렸다. 맛이 어떠신가요, 청년이 물었다. 벤지는 힘겹게(일단 양이 너무 많았다)이빨을 놀리며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이단은 어느 새 벽에 기대어 잇자국이 크게 남은 컵케이크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금세 볼이 툭 튀어나왔다. 그럼 이제 뭘 하지?이걸 타겟한테 하나씩 던지면서 놀까? 하지만 이 파티장 안에는 타겟이 없었고, 두 사람은 아까의 그 청년을 다시 불러 세워 컵케이크를 하나씩 더 먹고 나중에는 아예 민트 향이 나는 탄산수까지 한 잔씩 들이켰다. 저 멀리 치즈 쟁반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고 둘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지, 이게 바로 파티의 참맛이지. 벤지가 탄식했다. 우린 맨날 귀 한번 확인하고 쪽지 하나 받고 다시 귀 확인하고 기둥 뒤에 숨고 위치추적기 붙이고…그러고 나서 정신 차려 보면 뛰고 있단 말이야. 갓 딴 스파클링 와인에는 손도 못 댄 채로. 망할, 나쁜 놈들은 왜 다들 파티로 숨어들지?이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미소를 지으며 핀이 꽂힌 카망베르를 집어들었다. 그쯤 해두고 그냥 오늘의 휴식을 즐기란 말이야, 벤지. 벤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전투적으로 치즈를 씹기 시작했다. 어쨌든 여기엔 치즈도 케이크도 와인도 탄산수도 마카롱도 넘쳐 흐를 정도로 많았다.

자, 이단, 이단 헌트, 다시 빙글빙글,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가. 그리고 다시 이상한 춤을 추는 거다. 저만치 떨어진 무대에서 보컬이 마이크를 두드리며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구름처럼 천장을 맴돌았다. 긴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홀 한가운데에서 파트너와 춤을 추다가 갑갑한지 힐을 벗고는 창문으로 무자비하게 내던졌다. 모두의 기대대로 창문은 동그랗게 박살이 났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다들 미쳤어, 이단!물론 그중에 네가 제일 미쳤고. 자 이단, 이단, 이단, 발을 굴러. 더 세게!조명이 기묘하게 변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사실 무슨 조명을 틀었던지 간에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거세게 환호했을 것이다. 물을 마셔도 취할 터였다. 그리고 숨만 쉬어도 눈 앞이 번쩍거릴 테고. 키스해 줘, 벤지. 시끄러운 와중에도 이단 헌트의 목소리는 충분히 또렷했다. 그러고 나서 술이나 한 병 더 따자고. 나한테 IMF라고 새겨진 은 병따개가 있는데 말이야…그걸 언제 얻었냐면…벤지 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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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가서 아래쪽 사랑니 두 개 한번에 뽑고 온 다음에 분노에 차서 쓰는 사내 이빨빼는 글...ㅇ사내 생각하면서 씀


3개 남았다. 위 하나, 아래 둘. 무리는 없다. 마주본 사람이 아, 하고 그 공백을 뒤늦게 깨달을 때도 있겠지만, 혀로 희고 가지런한 이를 훑을 때 묘한 기분이 얼마간 들겠지만. 3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불균형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겠지만. 사실 정답은 간단하다. 하루 정도 사람과 마주치치 않으면 된다. 이를 훑어보지 않으면 된다. 생각을 멈추면 된다. 생각을…


하지만 그건 모두 출혈이 멈췄을 때에 고민할 문제다. 그는 거즈가 필요했다. 새 거즈가, 벽에 붙은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자 벌써 푹 젖은 그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이를 더 꽉 물었다. 아팠다. 


그는 고통과 딱히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이 곧 진통제였고 마취제였으며 마약이었다. 오늘은 오래 간다. 고통이 빨리 멈추질 않는다. 이것은 어떤 징조일까. 무엇을 나타내는 신호인가. 인간이라도 된 것 마냥. 그 생각은 그를 웃기기에 충분했다. 아하, 인간이라고…하지만 정말 웃을 수는 없었다. 아팠으니까. 


문득 그는, 자신이 아직 이를 다쳐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마 이는 자랄 것이다. 총알을 빼낸 상처가 제 스스로 아물었듯이. 잘린 손이 자라났듯이(이걸 지켜보는 과정은 꽤 역겨웠다). 그리고…오늘의 이, 이 망할 송곳니. 그는 천천히 냉장고까지 걸어가서 얼음을 빼내 수건에 쌌다. 찬 기운이 입가를 문질렀다. '아마' 이는 자랄 것이다.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거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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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RT 되면 븨백작이 베이커리물로 반전스러운 분위기로 여전히, 예뻐요. 사랑합니다.라는 대사가 들어가는 연성을 합니다.


※어쩌다 보니까 또 머리를 잘라부럿습니다 고어 주의


종이 뎅, 하고 크게 한 번 울렸다. 아, 이제 네 번 더 울려야 하는데. 입에서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 혹시 어제 이 자리에 체리 파이가 진열되지 않았었나요? 바닥이 한 지점으로 빨려들어간다. 발 바로 앞에 크고 검은 구멍이 뚫렸다. 단순히 어지러워서인가, 아니면 이 가게가 함정이거나. 잠시 푹 꺼진 바닥 아래의 지하실의 광경을 상상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주인이 방금 물걸레로 반듯이 깨끗이 열심히 꾹꾹 눌러 닦은 타일 바닥에 뭔가 붉은 뭔가가 흐르고 있다. 피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그냥 엎어진 딸기잼이었다. 그냥 좀 불결해 보이는 딸기잼이었다. 찐득해 보이고 군데군데 검게 말라붙은 딸기잼이었다. 유리병 안에서 구더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 중 하나를 발로 밟아 죽이고 카운터를 향해 서서 목을 가다듬었다. 주인을 부르자 그가 이쪽을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종이 한 번 더 울렸다. 아직 부족하다. 세 번이 부족하다. 오후 다섯 시의 안전함이라. 역시 이상했다. 이 가게는 오후 4시부터 정확히 한시간 후에 문을 닫는다. 그동안은 매번 이 앞을 지나쳤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앞치마를 두어 번 털고 말한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아, 이 체리 파이 말인데요…

…왜 오늘은 없죠, 라고 누군가 말한다.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불편하고 어색한 고요가 내리깔렸다. 그 어떤 수식어를 모두 되는대로 갖다붙여도 이 정적을 표현할 길은 없어 보였다. 잠시 뒤 주인이 밝게 말했다. 아, 이게 체리 파이입니다. 아닌데요, 이건 제 머리잖아요. 손님, 이건 체리 파이예요. 자르면 체리가 나옵니다. 아, 그런가요, 하지만 이건 제 머리처럼 생겼는데요. 안경까지 똑같아요. 손님,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조각 잘라드릴 테니 드셔보시겠어요, 아뇨, 사양합니다, 그렇지만 그것 외에는 이게 손님의 머리가 아니라 그냥 그저 그런 체리 파이라는 걸 입증할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요, 방금 그저 그런 체리 파이라고 하셨나요, 네, 그런데요, 보통 자기 빵한테 그저 그렇다고 말씀하시나요, 예, 뭐. 제 빵은 맛있으니까요. 방금 맛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말 끝마나 태클 거는 인간으로 보이기는 싫지만 지금 당신은 이상한 소리를 계속 늘어놓고 있어요, 손님, 제가 이 체리 파이를 그저 그런 파이라고 말한 건 제가 만든 것 중에서 이게 제일 평범한 맛이기 때문이예요, 다른 것들에게서는 더욱 맛있는 맛이 엄청나게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납니다. 지금 당장 보여

드릴까요? 아뇨, 사양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리 내려오세요. 지하실에는 맛있는 빵이 많아요. 아뇨, 전 이제 나가야 합니다. 5시가 머지않았어요. 전 가야 해요. 가던 길을 가야 해요.나가시면 어디로 가실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이 가게에 왜 들어왔는지도 모르겠고 왜 나가야 하는지 나가서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지금 손님께서 꿈을 꾸는 중이기 때문이예요, 교수님, 아, 저를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이 머리는 사실 파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냥 손님의 머리입니다, 넌 지금 머리가 없어요. 왜지? 이건 악몽이니까. 바닥으로 흐르던 딸기 잼이 구둣발 아래에 흥건했다. 깨끗한

바닥에 비벼 닦았다. 매일 꿈을 꾸면서 체리 파이를 보고 지나간 뒤에 꿈에서 깬다. 알아. 네가 그런 꿈 꾸는 거 알아. 넌 매일 얘기했어. 그걸 매일 아침 깨어난 후에 내게 얘기했어. 그건 거짓말이야. 넌 매일 유리창 너머로 예쁘게 진열된 네 머리를 봤어. 너는 그렇게 머리만 남아도 여전히 예뻐. 사랑해. 정말 맛있는 파이지, 안 그래? 아니야? 최고의 베이커리 아니야? 그걸 먹는 건 누굴까? 악몽에서 앞뒤를 따지면 안 되지. 내가 말했다. 네가 날 죽여서 먹어버렸으면 좋겠어. 진심이 튀어나왔군. 주인이 말했다. 그러자 5시 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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