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


밤새 비가 왔다고 한다면 허울 좋은 거짓이다. 비는 어둔 밤이 아니라 아침에 왔다. 12시 쯤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게 무어냐 하면…김우진. 요즘이 장마 철인 건 알지, 잘 알지, 그래, 좋아. 어젠 비가 내리지 않아서. 12시를 알리는 시계가 종을 뎅 울리고 나는 잠자리에 들어 이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어머, 날짜가 하루 또 넘었군. 정확하게. 어머, 넘어갔어. 이제 밤 내내 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어제 하루를 꼬박 걸렀으니. 나 윤심덕에게 쩍쩍 갈라지는 여름날 오전을 선물한 자연이여, 이제 빚을 갚을 때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비웃지 말아, 김우진. 넌 이걸 비웃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말이지, 창백한 아침 해가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아침에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지는 것을 기어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이상하게도 네게 뭔갈 써 보낼 맘이 생기더군. 이유는 별 거 없다. 네게 어떠한 하나의 이미지, 뚜렷한 영상을 떠올리게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네 희곡집을 하나하나 태우던(그래, 그 안에 들어 있는 네 낯뜨거운 연애 편지까지 포함해서)초록 옷의 여인, 윤심덕을 네 눈 바로 앞에 우겨넣기 위해. 밤 잠 못 이루는 여인을 그려 봐. 나이와 용모는 네가 아는 대로. 너무 잘 아는 대로. 눈 앞에 극장을 그리고 가구와 소품을 그리고 여배우의 동선을 짜. 몇 막 몇 장인 것 까지는 내 알 바 없고. 아, 이 장의 부제는 이게 좋겠어. 무엇이 그녀를 괴롭게 하는가. 난 이 부제가 네 그 고운 필체로 만년필에 의해 쓰여지는 게 보고 싶어. 그걸 쓰고 난 다음의 네 표정도 보고 싶고. 좀 더 눈을 감아, 김우진. 뭔가를 제대로 회피하고 싶다면 말이야. 겁 많은 사람 같으니.


김우진. 네 이름을 쓰는 것은 딱히 즐겁진 않지만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끌어안고 싶고 그 채로 네 이마에 총을 탕 겨누고 싶다가도 그 다음엔 또 차갑게 우그러진 네 시체를 끌어안을 생각을 한다. 너는 내 낫지 않는 상처이자 효능 없는 약이다. 그러나 사실 말이지, 그 상처가 낫지 않게 헤집는 건 나 자신이노라, 여배우 윤심덕이 말하다. 방금 좀 어느 나라의 황제 같았는데. 이것이 바로 배우의 자랑거리지. 


김우진. 밤새 태워진 네 책은, 네가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로 태어난 최고의 과실들은 연기가 되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들은 형체가 없었다가, 내가 바라보자 형태를 갖추어 내 심장을 끄집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앉았다. 그러나 멍청한 뇌는, 이 덩어리는 아직 그걸 몰라. 아직도 제 심장이 산 자의 그것처럼 붉게 펄떡펄떡 뛰는 줄로만 알지. 심장은 한숨을 쉬고 말해, 멍청한 것아, 나는 이제 너와의 연을 끊겠다. 윤심덕을 움직이는 것은 나다. 자, 이렇게 윤심덕의 심장은 홀로 윤심덕을 조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능의 완벽한 승리이며, 총의 장전을 막던 마지막 마지노선의 종말이었지요. 둘이 아닌 하나로 다시 태어난 여배우의 회색 연기빛 심장. 아, 김우진, 너는 날 움직이게 해. 그것이 증오이든 사랑이든, 무엇이 대수이냐. 


1926년 


윤심덕




+

7/5 낮공 꽃안웅 보고 나서…사찬 정말 좋다 심덕언니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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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봉님 리퀘였던 신혼여행 가는 븨백입니당!

*

(백작은 핸들을 급하게 꺾고는 말했다.)


묘사 좀 해줘. 최대한 자세하게.


좋아. 대신 느리게 말 할 거야. 말 할 기운이 없다.


상관없어.


저기, 오른 쪽 나무 사이로 집 하나가 지나간다. 붉은 지붕이고 여러 시대 양식을 합쳐서 미관상 딱히 아름다워 보이진 않는 저택이야. 지난번 집을 본 지 10분 뒤인 6시 39분, 하늘은 알다시피 해질녘이라 온통 붉어서 저 뒤죽박죽 저택과 어우러지니까 더…더…끔찍하군. 내가 끔찍하다라고 말하자마자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대문가의 전등에 불이 띡 들어왔는데 말이야. 손님을 환영하려고 개구리 수프라도 끓이는 걸까, 난 잘 모르겠어…만약에 저 집이 우리 목적지가 맞다면. 뭔가 느껴져. 뭔가에 푹 젖은 시궁쥐가 발가락을 무는 순간이랑 비슷한 기분이. 그러니까 완전히 잘못되었다 이겁니다, 백작님. 와, 대답 안 하기로 정말 마음 먹었구나. 여하튼 갑자기 뭔가 아련한 기억 하나가 떠오르는데. 「여행의 정석」 기억 나? 책을 펼치니까 온통 백지여서 환불하려다가 네가 마지막 페이지 맨 아래에서 3포인트의 회색 글씨로 인쇄된 한 줄을 발견해서 겨우 반품을 면한 그 책 말이야. 그 문구가 뭐였더라…


(…집에서 TV 보고 고양이 배 좀 긁고 그냥 그렇게만 한 2주 보내세요. 백작은 짧게 말하고는 다시 악셀을 밟았다.)


그래. 당시엔 우리 둘 다 그 구절을 한바탕 웃고 넘겼지만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어. 신혼여행이라는 건 완전히 불필요한 짓이야. 여행이라는 활동 자체가 쓸모없다는 게 아니야. 그저 신혼이라는 뭔가에 눈이 휙 뒤집혀서 안 해도 될 걸 굳이 하다가 망하는 일들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왜 우리가 저 붉은 지붕의 금방이라도 박쥐가 나올 것 같은 폐가를 여행지로 정한 건지 좀 듣고 싶은데, 음…아닙니다. 운전 힘내시구요, 다음엔 네비게이션 좀 사서 달자.


(백작은 다시 악셀을 밟았다.)


이제 더 가까워졌네. 솔직히 말해 봐. 저기에 동족이라도 숨겨 놨어? 그들이 결국 최고의 인공 피를 만들었대? 신혼 선물이라서 오늘 주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난대? 백작, 난 집에서 고양이 배나 긁으면서 냉장고에 그득그득 들어찬 RH-O형 피를 한 팩씩 빼서 쪽쪽 빨면서 TV나 산책시키고 싶어. 근데 그게 안 된다? 그럼 바닷가 휴양지 호텔 스위트룸을 빌리고 거기서 고양이 배를 긁어주면서 피나 빠는 거지. 그것도 아니다? 그럼 뭐 시골 산골짜기 작은 통나무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거기서 고양이 배를…그렇게 보지 마. 여하튼…내 상상 속엔 적어도 유령의 집은 없어. 


(백작은 다시 악셀을 꾹 밟았다.)


그래, 우리도 테마파크 공포의 집에 단골로 출연하는 판에 유령의 집이 뭔 대수겠어. 거미줄 쳐진 차고에 차를 대고 여행가방을 들고 반쯤 썩은 나무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갔더니 관 모양 침대가 나오는 것만 아니면 뭐, 뭐…음…


(백작은 잠시 밭은기침을 조금 했다.) 


오, 이제 몇백 미터도 안 남았어. 네가 악셀을 더 밟고 나무에 박아서 한 이틀 동안 갈기갈기 찢긴 채로 지낼 가능성을 감수한다면, 이 차로 저택 담장이라도 넘을 수 있겠는데. 담장이 꽤 높지만 말이야. 집이 더 자세히 보이네. 철제 대문 위에 역시 철제로 된 글자들이 보여. ㅂ…ㅐㅁ…파이어…러브…하우스…와, 집주인 작명 센스 죽이는데.


(백작은 짜증스럽게 악셀을 꾹 밟았다.)


…진짜로 담장 넘을 건 아니지? 아, 맞아. 어제 집으로 전화 한 통 왔었어. 모르는 번호였는데 일단 받긴 받았고. 받자마자 웬 남자가 호탕하게 웃더니 말하던데. '오랜만에 쓰시는군요. 내일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더니 다시 껄껄 웃고 나서 끊더라고. 자, 그 사람이 저 저택의 관리인일 거라는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우리 저기서 뭐 악마라도 소환하나?


(백작은 악셀에서 발을 떼지 않고 말했다 : 저기 침대가 끝장나게 푹신하거든.)


(뒷이야기 : 그들은 결국 롤스로이스로 담장을 넘었다. 날아올랐다고 쓰는 게 맞을 것이다.)

마돈크 전력 6회차 주제 <피> 로 참가합니다.


피가 안 멈춰, 라고 말할 즈음에 그는 이미 모든 기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꾸 상처를 피했다. 시선이 자꾸 옆으로 돌아갔다. 차마 볼 수 없었다. 끔찍하진 않았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그 꾸준함이었다. 이젠 틀어막을 기력도 없었다.


V, 피가 안 멈춰. V, V. 그는 내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이 문장에는 물론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의 손이다. 그는 오른팔을 내 얼굴 쪽에 올리고 부드럽게 쓰는 시늉을 했다. 손목은 잘린 지 오래였다. 문장을 다시 쓰자. 그는 내 볼을 피가 흐르는 팔로 쓸어내리려고 노력했다. 내가 왜 노력이라는 단어를 넣었나. 실패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그에겐 손이 없으니까.


그의 입에 잔을 대어 피를 흘려넣다가 그냥 쏟았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팍삭 깨졌다. 유리조각이 그를 찌르면 또 다른 작은 상처들은 그를 뒤덮을 것이다.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 아무 것도 없다. 


어쩌면 말이야, 나는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살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 그래? 그렇지? 묻고 또 물었다.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글쎄' 가 아니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조금이라도 더 담고 있기 위함이다. 나는 그가 왜 말을 안 하는지 의아해했다가, 곧 그의 혀가 잘려 입 속이 피로 들어찬 지 오래라는 사실을 힘겹게 다시 깨달았다. 잊고 싶은 기억은 의외로 쉽게 잊어진다. 내가 산 증인이다.


안녕, V. 그가 웃으며 뭉개진 입으로 말한다. 그의 주변을 적신 피가 마침내 퍼져나가길 멈춘 시간이었다. 나는 그를, 너를 안고 네 모든 상처와 단면과 살과 피와 뼈에 입을 맞춘다. 그들은 모두 노래하고 있었다. 피를 토하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사랑해, V 정작 그의 입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마돈크 전력 60분 4회차 참가합니다!


1995


대장님, 왜 그 구덩이에 들어가 계십니까, 하고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애송이가 속삭이면 얼굴에 고통이 주름마다 줄줄이 배긴 대장이 간신히 힘을 내어 애송이의 군모에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같은 자리에는 다시 포탄이 떨어지지 않지, 하고 계속해서 속삭인다 장면은 전환되고 구덩이에는 아무도 없다 구덩이에는 번쩍이던 빛만이 잔상으로 남고 인간의 자국은 미세하게 남았고 그런 가운데 내가 그 장면을 지속적으로 상상하는 이유는, 병원 침대가 너무나 부드러워서 뭐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잠들 것 같기 때문이고, 또한 그 구덩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적들의 대포를 비웃던 군인들의 모양이 마치 이틀 전의, 붉은 커텐에 감겨 화단으로 떨어져 다리를 부러트린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인가, 약 기운이 셌다.


간호사가 틀고 나간 모양인 TV에서는 크리스토퍼 리브의 낙마 소식이 하루 종일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나는 TV를 끄고 싶었으나 리모콘은 너무나 멀었고 늙은 간호사는 하품을 하며 옆의 나이 많은 할머니와 함께 TV를 손가락질하고 나는 그저 누워서 저 사람의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할까, 이래서 사람은 다치면 안 돼,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커텐이 눈을 베일처럼 휘감던 때를 자주 꿈에서 상상한다, 그 때 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여전히 내가 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2초쯤 하고, 다리를 부러트린다. 


화면은 어느새 리브가 입원한 병원 외부를 전체적으로 보여 준다. 학생들은 지금쯤 내 부재로 인해 맥주 캔이라도 열심히 따고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축복이 있기를, 두 슈퍼맨 빼고. 안녕, 크리스토퍼 리브. 안녕, V. 망토는, 완전히 쓸모 없는 복장이지요. 거슬리기만 하고. 나는 드디어 꺼진 TV를 벗삼아 또다시 꿈을 꾼다, 대장님, 왜 구덩이에 숨어 계십니까, 하고 똑같은 애송이가 또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괜찮아. 안전해. 이번에는 다치지 않아. 아아, 내 부러진 다리. 

마돈크 전력 60분 3주차 <칵테일> 참가합니다! 


으르렁대는 그 목소리는 마치 짐승의 그것과도 같았다. "프로페서 V! 이 망할 생쥐 녀석!" 그의 송곳니가 불그스레한 조명을 받고 위험하게 빛났다. 전화라도 받고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가만히 있으랬지, 이 쬐끄만…작은…손바닥만한…콩알만한…생쥐야!" 확실히 그랬다. 그가 구둣발을 들었다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내 120년 정도 흐른 인생은 잠시 암전 상태에 들어갈 것이다. 


내일 저녁이 뭐더라. 나는 우리 집의 냉장고 안을 상상한다. 아, 까망베르였지. 백작이 직접 마트 유제품 코너에서 집어온 동그랗고 통통한 치즈 덩어리. 나는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좋아, 이대로 가다간 그걸 뺏길 것이다. 그럴 바에야 최대한 빨리 여길 나가서 백작의 무자비한 손보다 먼저 까망베르를 쥐는 것이 낫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해, 유리잔들아. 미안해, 핑크 레이디. 미안해, 기타 등등 서너 가지 정도 되는 칵테일들아. 이건 다 내 꼬리 때문이었다


갈색 털의 작은 쥐로 변한 지 어언 열흘, 나는 꼬리로 부엌에서 타잔 흉내를 낼 수 있을 만큼 내 새로운 몸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서툴러서 물건들을 깨부수고 다녔다면 백작은 그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내쉬며 내가 저지르는 꼴을 지켜만 봤을 터지만, 항상 그렇듯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없었다.


백작은 평생 모를 즐거움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꼬리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잡기, 묶기, 던지기, 만지기, 찌르기, 그 외의 여러 가지-이 얼마나 스릴 넘치고, 또한 하면 할수록 더 고난이도로 하고 싶어지는지 모른다. 예를 들면… 오늘의 칵테일 잔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나는 칵테일 잔이, 그 안에 들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우면 아주 편안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이 6시간 전이다. 백작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바를 잠시 맡기고 어딘가로 나가 버렸다. 나는 이미 며칠 전에 잔 하나를 꼬리로 겨우 끌고 바 구석의 꽤 큰 벽 구멍 안에 옮겨 두었다. 말하자면 침대를 새로 산 격이다. 


백작이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낮잠을 자기로 했다. 물론 잠들기 전 아껴 놓았던 치즈를 한 입 베어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리잔은 차갑고 미끄러웠다. 나는 꼬리를 동그랗게 말고 그것을 손으로 쥐었다. 나는 완벽한 털투성이 공이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나무 막대기가 굴 안을 헤집었다.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고는 바닥으로 내려갔다. 막대기를 피해 굴 밖으로 나가는 일이야 쉬웠지만…여기서 나는 굉장한 생각을 하나 했다. (솔직히 백작은 이 결정만으로도 내게 평생 까방권을 줘야…아닙니다.) 내가 홀 중앙으로 튀어나가면 백작은 가게를 닫아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음, 좋아. 배려심 깊은 프로페서 V.


그래서 나는 의자 밑을 옮겨다녔고, 곧 부엌으로 향했다. 이쪽에 내 전용 통로가 있었다. 통로 입구에는 작은 푯말이 있었다. [V 전용] 아무도 안 믿을 말을 해 보자면, 이거 백작이 썼습니다. 직접. 


빠르게 발을 놀리자 통로 입구는 인간 남자 발걸음으로 한 걸음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만 더 달리면 나갈 수 있다. 망할 백작 녀석. 알바한테 쥐 좀 상냥하게 대해 달라고 미리 부탁해뒀어야지. 나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빗자루 비스무리한 게 바닥을 강타한 것은.


솔직히 이 시점까지 제정신을 유지했으면 여기서부터는 좀 날뛰어도 되지 않냐고, 그럴 수 밖에 없었는데 어쩔 거냐고 백작에게 따지고 싶다. 여하튼 나는 펄쩍펄쩍 뛰며 부엌을 빙빙 돌았다. 누구라도 빗자루가 뒤에 있다면 그럴 테지. 그 동안 병 몇 개가 깨졌고/잔이 두어 개 떨어졌고/여러 기구들이 바닥에 떨어졌고...나는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온 백작과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떨어트린 건 내가 아니라 내 꼬리였다. 정말입니다. 이거 현실 도피 아닙니다. 


으르렁대는 그 목소리는 마치 짐승의 그것과도 같았다. "프로페서 V! 이 망할 생쥐 녀석!" 그의 송곳니가 불그스레한 조명을 받고 위험하게 빛났다. 전화라도 받고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가만히 있으랬지, 이 쬐끄만…작은…손바닥만한…콩알만한…생쥐야!" 확실히 그랬다. 그가 구둣발을 들었다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내 120년 정도 흐른 인생은 잠시 암전 상태에 들어갈 것이다. 자, 이것으로 내가 왜 미친 듯이 도망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끝났다. 과연 생쥐 프로페서 븨는 무사히 까망베르를 내일 저녁으로 먹을 수 있을까요. 백작의 구두가 오늘따라 시꺼멓고 광나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저는 언제쯤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3주 후에 계속!

Counting pulses, @mintracula

덩굴장미가 피었어요, 칼에. 그 가시는 칼보다 날카로웠고…
V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이름 모를 꽃들.

당신의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온 안식이 그 덩굴장미에 적셔지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서 가시를 하나씩 떼어내어 버렸어요. 손끝에 서너 개 정도가 박혀 피가 났어요. 내 피에게는 이름이 있지요. 안식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건 지독한 냄새가 나죠.

당신의 심장박동은 당신이 찔린 이후 얼마간 지속되었는데, 나는 그게 멈추질 않길 바랐다. 영원히 지속되길 빌었다. 그 위태로운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아, 그래. 당신의 박동은 계속된다. 지옥에도 꽃이 다 있네. 아직은 음악을 느끼라고, 언젠가 말했었던 당신을 기억한다. 아차 하는 순간에 일정하던 박자는 흐트러지고 전축은 부서지기 마련이다.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어요, 저는, 왜냐하면…왜냐하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고, 꽃이 만발한 지옥은 내 발을 땅 속으로 끌어내리느라 여념이 없으니까. 음악은 끝났다. 당신은 이 순간부터 죽음을 시작했다.

그렇게 드라큘라 백작은 온전히 죽었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 초록색 순이 하나 돋아났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곁에 고개를 숙였다. 작은 떡잎이 생겨났다 노랗게 변해 떨어져나가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었다. 흰 꽃이었다. 그 꽃은 보통 백합이라고 불렸다. 그건 당신의 머리맡에 있었다. 당신을 향기로 질식시키려는 듯 목을 축 꺾고 있었다. 그래, 드라큘라는 백합 향기에 질식해서 죽었다. 그는 가장 아름답게 죽었다. 그는 칼에 찔리지 않았다. 그를 죽인 것은 그저ㅡ하나의 향기에 불과했다. 나는 백합 줄기를 부러트렸다. 손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꽃잎 역시 축축했다. 급히 그것을 목으로 밀어 넣자 향기가 폐를 찔렀다. 나는 꺽꺽거리며 꽃을, 향기를 마셨다. 가장 아름다운 백합, 가장 독한 백합, 가장 진한 꽃, 나의 칼, 꽃밭에 누운 백작, 아, 나의

칼, 장미 덩굴. 그의 상처에서 뿌리를 내렸지. 흘러나온 안식의 피를 모두 핥아서 결국 더욱 새빨간 장미를 틔웠다지. 아, 이곳은 온통 아름다운 꽃 뿐이었다.

나는 백작의 곁에서 남은 백합을 마저 씹었다. 꽃이 몸을 뒤틀었다. 입천장에 자꾸 달라붙어서 손가락을 넣어 잘게 찢었다. 무언가가 혀를 감싸고 천천히 아마 갈기갈기 헤쳐진 큰 꽃잎 중 하나가 목구멍과 혀와 이와 나의 날숨과 들숨과…

부드럽고 작은 꽃잎은 내 혀를 먹어치우고 나 대신 이야기를 시작했다. 차마 들을 수 없어 눈을 꾹 감았다. 저는, 꽃이 말했다. 슬퍼요. 그러시면 슬퍼요. 꽃잎과 나는 섧게 울었다

민트(@mintracula)님께 드립니다. 


1. 스칼렛(이 원고는 폐기되었습니다)

제 이름은 스칼렛 오하라, 당연하지만이건 가명이예요. 제가 이 가명을 쓰는 이유는 제 상황이 스칼렛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물론 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열두 참나무 농장’ 을 갖고 있지도 않고, 지금은 남북전쟁의 한복판도 아니고, 제가 ‘오타야.알아.트 버틀러’ (물론 이것도 가명이예요. 웃기지만요.) 와 키스할 때 고개를 거의 부러질 때까지 젖히냐고 물으신다면…음, 아뇨. 어쨌든 그래요. 난 약혼자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그런 아름다운맞는 말이긴 한데, 뺐으면 좋겠다, 백작. 싫어. 아름다운 나를 다른 누군가가 사랑하죠. 밤마다 몰래 컴퓨터를 켜고 조금씩 몰래 완성한 글을 이 ‘월간 뱀파이어’ 에 투고한 수많은 여성들처럼 저기, 당신 이 코너 이번 달에 처음 만들었잖아. 그랬던가? 난 나의 문제가 굉장히 까다롭고, 또한 해결하기 어렵다고 느껴요. 나와 같은 일을 이미 겪었거나 거의 풀어 나가는 중이거나 아니면 깔끔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마무리한 다른 잡지 구독자들에게 조언을 얻는다면, 굉장히 좋겠죠.

물론 내가 제일 아름ㄷ

그이를 애슐리…갑자기 귀찮네요. 그냥 V라고 할게요. 가명의 의미가 없잖아? 내가 귀찮다면 귀찮은 거야. 토 달지 마. 그래, 뭐. V라고 할게요. 난 V를 처음 만난 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내가 카페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막 한 모금 마시려던 찰나에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죠. 순간 방 안의 공기가 훅 하고 달라졌어요. 여차저차해서, 그는 댄스 플로어로 올라가더니 멋들어진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고, 곧바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런 그를 보는 순간 난… 솔직히 싹 다 지워버리고 싶은데 화 낼 거야? 왜 지우고 싶어 하는데? 그냥… 안 돼.

…사랑에 빠지고 만 거예요. 바보 같죠. 고작 노래 하나에 말예요. 심지어 가사도 우스꽝스러웠다구요. 뭐였더라, 오오, 오오, 오오, 프로페서 V? 고독한 앞모습? 아, 뒷모습이었나. 맞아요. 뒷모습이예요. 내 행복한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죠. 그와 영화도 같이 보고, 같이 산책도 하고, 식사도 하고, 카페도 가고, 놀이공원, 파르테논, 산책, 파르테논, 저녁 식사, 파르테논, 음…우리 집, 그가 다니는 대학, 헛간… 너 지금 이거 쓰기 귀찮지. 지면 때우기 힘든 거지. 그래.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왜 그렇게 늦게서야 발견했을까요? 그와 이렇게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내가 그 반지에 대해 따져 묻자 그가 말한 것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난 너를 애인으로 본 적 없어. 내겐 메텔 뿐이야! 저리 가!’ 난 이렇게 유치한 중학생 같은 말 안 해. 인정해. 넌 연애엔 젬병이야. 나 아니었으면 넌 결혼도 못 했어. 그러셔요. 어쨌든 난 상처를 입었어요. 그리고 그에게 상처를 냈죠. 물론 물리적인 상처 말이에요. 난 그와 헤어지고 클럽에 가서 신나게 놀기로 작정했어요. 난 힐을 신었죠.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난 그걸 벗지 않았어요.

참 나.

‘레트 버틀러‘는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죠. 내가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뻔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대답을 내놓았어요. ’그 노래 부르던 남자의 손을 잡고 내려간 여자가 당신이죠, 스칼렛?‘ 오, 난 부끄러워서 제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어요. 이제 더 할 말 없나? 난 지쳤어. 사실 위에 ’신나게 놀기로 작정’ 했다고 적었지만, 그래요, 거짓말이에요. 사실 그날따라 재미가 없었죠. 내 취향인 남자도 없었고요. 취향? 너. 어...그래.

동네 사람들 똑똑히 들으세요 이 부분 쓰면서 V가 얼마나 부끄러워서 죽으려고 했는지아 백작 그만 좀달링은 내가 달링 같은 얼굴이 취향이라고 하는 게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인 거지? 지금 그런 거지?도대체 왜 글을 쓰면서 그 내용을 쩌렁쩌렁 읊는 거야? 왜? 혹시 나 싫어해?

좋아해.

프로페서 V, 리타이어.

(V가 30분째 쇼파에 웅크린 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수정 작업 도와주겠다고 한 패기는 땅에 굴 파고 들어앉은 모양이다.)

백작, 이 칼럼 좀 심하게 망한 것 같은데. 그만둘까. 그러자. 좋아. 다음엔 더 멀쩡한 걸 써보자구. 스칼렛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서 애슐리의 얼굴에 장미 꽃다발을 던졌답니다이거 대체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가 현실이야?

7. V언니의 동안매직 뷰티(이하생략)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밤에 라면 끓이지 말고 일찍 주무세요, 프로페서 V. 피 냄새 너무 심해. 나까지 배고파지잖아. 그럼 같이 먹던가. 됐어.

10. 이달의 시

힘이 든다

내가 너무 잘생겨서

힘이 든다

완벽한 수미상관이야…(프로페서 V께서는 이 미친 시에 아무 코멘트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거 참 너무하시네.

12. (부제) 300년도 더 지났는데 그냥 몇 세기 지난 기사 다시 꺼ㄴㅐ와도 되지 않겠나 V 말 좀 해 봐라이원고의제목은수정될예정입니다잊어버리지 맙시다.

뱀파이어의 시초는 천삼백XX년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이라고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시초인지, 아니면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질투한 나머지 펜과 잉크로! 그건 빼자, V. 뺄 거면 왜 줄 안 쳐. 알아서 지우라는 뜻이야.

싫은뎁쇼

아 좀

…그를 질투한 나머지 펜과 잉크로 악의 섞인 소문을 퍼트린 것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그가 누구든지 간에,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이 최첨단의 시대를, 몇 세기 전, 포에나리성의 영주이던 그는 어떤 기나긴 삶을 겪고 이 시간까지 견뎌냈는가. 그것은 필히 고독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독과, 그리움과, 슬픔과, 마지막으로 소량의 기대. 그는 운명과 함께 춤을 추었지만 결코 미소 짓지는 않았다. 미소는 마지막의 몫으로 남겨둬야 하니까. 그가 혹여 이 잡지를 읽고 웃음 짓는다면 그것은 그의 비극적인 인생이 드디어 끝났으며, 또한 그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졌다는 뜻 아닐까. V, 나머지는 내일 써. 수고했어. 좋아.

자정이다. 백작이 관을 닫았다. 그는 가끔 심심할 때 침대를 버려두고 저기에 들어간다. 완전히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안녕하세요, 대필 업무 중인 프로페서 V입니다. 잠이 옵니다. 때려 치고 집에 가고 싶네요. 아차, 지금 집인데. 심지어 내 방인데…백작은 자고 있습니다. 사실 그냥 지금 저장하고 저도 침대랑 교우다운 교우를 좀 하고 싶어요. 아, 일하기 싫다. 추가수당 나오는 것도 아닌데. 뽀뽀해 달라고나 해 볼까. 설마 그런 부탁 했다고 죽기야 하겠어요? 그건 별 문제 아니에요. 문제는 이걸 내일 백작이 읽고 전체삭제를 해버리면 어쩌냐는 거죠.

그럴 줄 알고 실시간 백업중이죠!

…다시 루마니아의 백작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이건 이를테면 특집 기사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뭘 기념하는지는 사실 저도 그도 모릅니다. 우린 기념일을 챙기기에는 이미 너무 오래 살았어요. 의미가 없죠. 그렇다면 이 특집 기사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별 거 아닙니다. 그냥 그런 이름을 붙여보고 싶었어요. 그냥요. 여러분 가끔 그런 생각 하시잖아요. ‘아, 1년 중에 364일이 생일이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거랑 같은 맥락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특집이라고 칩시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건 아니고…아이고 헷갈려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예요. 이 기사는 말이에요, 새벽 감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 왠지 센티멘탈해지는 밤, 보름달도 아니고 초승달, 비록 지금 제 입가에는 빨대 꽂힌 혈액팩이 있지만(다시 말해서 멋진 느낌은 영 없지만)그냥, 그런 기분이라서 시작했어요. 누군가의 인생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드라큘라 백작의 539년에 대해 쓴다는 건, 그냥 그런 거죠. 정리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 터고. 이 기사를 읽은 그는 당연하게도 삭제..까지는 아니지만 따로 빼서 자기 책상 어드메에 던져 두겠지만요. 하지만 그는 내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그럴 겁니다. 전 알아요. 그가 이 말을 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어요. ‘차, 아니면 커피?’ 왠지 신나잖아요. 안 그래요?

사실은 말이죠, 그래요. 이건 아무래도 잡지용 원고가 아닌 것 같군요. 역시 따로 빼는 게 낫겠어요. 그가 그렇게 하기 전에 말이죠. 제 질문 목록이 지금 제 팔 아래 눌려 구겨져가고 있지만, 그건 그와 저만의 비밀이니까요. 수만 명의 독자 여러분, 드라큘라 백작의 사생활이 궁금하다면! 혹시 궁금하다고 해도! 지금 당장 이 잡지 구독을! 그만두시는 게 어떨까요!

…이거 아무래도 마케팅 실패 같은데. 안녕히 주무십시오, 독자 여러분. 아니, 유일한 독자님. 이미 자고 있지만.안 자.으아ㅇㅏ나먀ㅡ퍄ㅕㄹㅁㅊㅁ뎌ㅡㅈㅊ


븨+백, 책장에는 살인의 시작과 끝이 새겨져 있다 #마돈크_전력_60분 2회차 연성

서재에서 진한 풀내음이 나기 시작했다. 긴 식물의 머리채를 잡아 낫으로 베어 구석에 던져둔 후의, 정리가 끝난 정돈된 방. 나의 서재. 우리는 반쯤 열린 서재 문을 노려보았다. 누군가가 책상의 전등을 켜두었는지 노랗고 가는 불이 새어나왔다. 들려? 그가 말했다. 종이 사각대는 소리가 들려.

그 소리는 그저 나뭇잎이 서로 쓸리며 나는 소리였을 뿐이었다. 방에 나무가 자랐어. 보여, V? 보고 있어? 나는 보는 대신 들었다. 나뭇잎이 속삭이는 이야기들을, 그 이야기에 사용된 어휘들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주인공은 누구인지를. 그리고 그를 보았다. 어릴 때 그런 이야기를 읽었어. 밤이 되면 나무들이 비밀 이야기를 한다고.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그들은 모두 기억한다고. 그 순간을 평생 나이테에 적어넣는다고. 그런 나무들은 말야, 전기톱을 가져다대면 비명을 지른대. 자기들의 기록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대. 네게만 말해주는 거야, 백작. 이후에 그에게 묻자 그는 그 때 잠시 동안 내가 열두어살 먹은 소년처럼 보였다고 했다. 망토는 있었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나무는 늪을 둘러싸고 있었다. 꽤 큰 늪이었다. 거무튀튀한 자국이 가장자리에 눌어붙어 있었다. 허리를 굽혀 손으로 자국을 쓸자 손에는 곧 검댕이 옮겨붙었다. 아니, 이건 재야. 누군가 나무를 태웠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기에서 탄 내가 풍겼다. 백작은 대본을 이미 알고 있는 배우 같았다. 나는 무대에 뛰어든 관객이었다. 1막 3장입니다. 늪 등장.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빙 둘러싼 나무들 사이에 책장 하나가 기울어진 채 끼어 있었다. 속의 책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나는 그 책들의 제목을 모두 알았다. 누군가가 한 권을 뽑아 내게 페이지 수를 말하면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갈색 가죽 표지의 두꺼운 책이 책장에서 늪으로 떨어졌다. 늪은 식사를 즐기듯 맛있게 책을 삼켰다. 무언가 긴 막대기로 저걸 건질 수 없을까, 하고 내가 물었다. 늪에게, 나무에게, 풀을 벤 낫에게, 재투성이 흙에게, 백작에게. 저건 죽었어, V. 구할 수 없어. 아, 책의 용도가 생각났다. 인명 사전이야.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늪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인명 사전이야. 그 말은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졌다. 수많은 이름들이 질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책장을 밀기로 결정했다. V, 밀어.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우리가 손을 짚고 함께 온 몸으로 책장을 밀자, 그것은 힘없이 책을 토해내며 늪 속으로 떨어졌다. 무언가 둥둥 떠 있는 더러운 물이 책장을 더럽혔다. 붉은 표지, 노란 표지, 푸른 표지, 검은 표지, 그리고 갈색 표지의 책이 힘없이 등을 내보이며 둥둥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팔다리가 자라날 것 같았다. 뒤집어져 떠 있는 사람들, 사람, 많은 사람들, 대다수의 사람들, 엄청난 사람들!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백작은 고개를 돌렸다.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야. 우리는 한 쌍의 위선자들이었다. 책장을 다시 건져낼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늪은 쩍 벌렸던 입을 닫고 책장을 온전히 먹어치웠다. 나무들은 사각대던 소리를 멈추었다. 늪에서 거품이 두세 방울 올라왔다. 모든 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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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크 전력 60분 1회차 참가글입니다 ㅇ0ㅇ

상황이 기묘할수록 차분한 서술을 해야 한다. 최대한 차분해지자.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기운을 내어 펜을 들면 뭐라도 정리가 될 것이고,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종이에 한 줄을 적었다.

'어제부터 백작의 얼굴이 반달로 보인다. 비유가 아니다. 그냥 반달이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어제부터 백작의 얼굴이 반달로 보인다." 그렇다. 심지어 눈코입도 없다. 아니, 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끔찍했겠지만. 나는 몇 시간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백작, 뭐 해.' '코 긁고 있는데.' 뒤를 돌아보자 그는 대충 반쪽 달의 중심부 즈음(꽤 평평하고 크레이터 비스무리한 울퉁불퉁한 자국이 있는)을 검지손가락으로 대충 긁적이고 있었다. 숨은 쉬고 있었던 걸까. 대체 어느 구멍으로 숨을 쉬는 중인 걸까. 아, 뱀파이어는 숨 쉴 필요 없나.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일단 말이라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으나 나는 조금 더 기다렸다. 그가 앉아 있는 쇼파에 손거울이 놓여져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사실 일부러 내가 놓았다. 그가 자연스레 거울을 들고 얼굴을 살피면, 굳이 내가 말할 필요까지는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저기, 너 지금 얼굴이 반달 모양이야.' 그리고 정말로 반달이기도 해…' 라고 말 했을 때 나를 슥 올려다볼 달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건 정말 생각만 해도…끔찍했다.

나는 노트를 넘기는 척 하면서 곁눈질로 백작을 살펴보았다. 그가 손거울을 긴 손으로 집어들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책 아래로 숙여졌다. 어떤 소리가 나도, 어떤 비명이 울려퍼져도 감수할 결심이 내겐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쇼파 쪽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거기엔 그저 손거울을 들고 이리저리 얼…달을 비추어 보는 백작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래, 본인이 충격받지 않았다는데 뭐가 어쨌단 말인가. 타인이 참견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취향 존중이라는 건 매우 중요하니까.

"그렇고말고."
"응?"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대답했다.
"지금 이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난 이게 정말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해, V."
"아무리 봐도 백작, 네 행동은 충격 받은 사람의 그게 아니잖아…?"

백작은 팔짱을 꼈다. 그러자 그의 반달 얼굴이 더욱 부각되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장하다, 프로페서 V. 넌 최선을 다했어.

"무슨 소리야. 이 못생긴 초승달이."

나는 노트를 내려놓았다.

"무슨 소리야?"
"지금 네 꼴을 보라고." 그는 말을 마치고 핑크빛 손거울을 내 쪽으로 던졌다. 손거울의 뒷면에는 리틀 프린세스 뭐시기라고 적혀 있었지만 내겐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손톱보다도 얇은 초승달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말이야, 백작." 나는 손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너도 지금 반달 얼굴인 거, 알아?"

우리는 말 없이 창가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누가 어느 새 먼저 켰는지 TV는 혼자 떠들고 있었다. 오늘은 보름입니다. 지금 창문을 여시면 선명한 달을… 글쎄, 틀린 뉴스인 것이 분명했다. 하늘은 너무나 맑아 별이 번쩍였지만 달은 분명 없었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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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날(@silver_frost)님 리퀘입니다!

name

너는 언제나 거기 앉아서 나를 불렀다. 달링, 달링, 달링. 연인에게나 쓸 법한 간지러운 호칭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사랑이여. 나의 운명이여. 너는 ‘그런 말투‘ 를 쓰면서도 얼굴 한 번 붉히지 않는 치였다. 네 부름은 어디서나 나를 중력처럼 끌어당겼다. 사실 연인이라는 단어는 너무 간단했다. 너와 나는 시간을 최대한 열심히 흘려보내려고 노력하는 전우였다. 흘러가는 삶은 우리를 끊임없이 지치게 했다. 그러나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어느 날은 그 호칭에 아예 푹 질려 버려서 쏘아붙였다. 유독 간지럽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네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내 갈비뼈 안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날갯짓을 했다. 너무 이상해. 뭐가. 너는 차분히 되물었다. 그냥, 모든 게 이상해. '달링, 우린 이상하지 않은 적이 없어.' 네가 말했다. '우린 언제나 이상했고, 앞으로도 이상할 거야. 이상한 교수 씨.' '그래, 세라.' 그 때 나는 '달링'에 견줄 만한 이상한 호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미묘하게 부스러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 세라.

너는 뜻밖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라, 세라, 세라, 세라. 나의 세라. 다른 이가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았다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웠겠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다. 우리는 웃어야 할 때 진지했고 진지해야 할 때 농담을 했다. 언제나 그랬다. 역시 우리는, 이상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너는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것이 너무 평온하게 느껴져서, 나 역시 눈을 감았다. 네게는 아무 향도 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름이 없고 냄새가 없고 자취도 없고 과거도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했다. 내가 나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려면, 너와 함께 하는 수밖엔 없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다. 나는 네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맞추었다. 세라. 굳었던 내 입이 갈라졌다. 세라, 세라. 그래, 달링. 어서 와.

대체 가명을 부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백작이 낫지 않아? 그냥 백작. 너는 웃음을 터트렸다. 세라가 좋아.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널 사랑하길 바래? 꽤나 대담한 느낌이었다. 달링, 이건 사랑이 아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엔 아무 의미도 없어. 끝이 없는 도로에는 목적도 없다. 그의 말대로, 의미도 없다.

이리 와. 네가 명령한다. 나는 그 말 대로 따르고는 입을 연다. 그래, 세라. 너는 만족하고는 나를 안았던 팔을 푼다.

문득 너도 간지럽냐고 묻고 싶어진 적이 있었다. 너도 나비를 삼키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혀에 내려앉아 녹는 설탕 나비를 상상한다. 그것의 단 맛을 생각한다. 그리고 말 없이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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