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AU입니다.
​*약한 고어 묘사가 있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Z의 동생은 문을 열자 구식 타자기 자판에 얼굴을 묻은 채 죽어 있는 그의 누나를 볼 수 있었다. 옆에는 텅 빈 원고지가 반듯하게 놓였다. Z와 동생이 사는 5층 빌라는 벽 두께가 부실해 평소 원성이 자자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동생은 성악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다. 먹을 잔뜩 머금은 붓이 호를 그리듯 비명이 쏟아졌다. 바로 옆의 큰 길을 지나던 모 일간지 기자는 가방을 갈무리하고 급히 노선을 틀어 더러운 유리 문을 열어제꼈다. 모르겠어요, 워낙 조용해서, 최근에 뭐가 그렇게 갑갑한지 미친 사람처럼 벽을 두들기던데요, 누가 가끔 찾아와서 한참 얘길 하다 갔는데 모두 뭔갈 독촉하는 내용이었죠, 다음 날 오전에는 집필 중 사망한 30대 초반의 무명 작가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기자는 빛을 보지 못 한 문인들의 생활고에 대해 덧붙이고는 글을 마무리했다. 몇 시간 후 반박 기사가 떴다. 비주류 장르문학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인식을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두 기자는 며칠 후 모 메이저 방송사에서 주관한 대토론회에 나가 서로를 열심히 비난했다. 해당 사건을 다룬 수많은 기사들은 Z의 사인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너무 잔인한 것에는 검열이 필요했다. 암묵의 룰이었다. 부검의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인터뷰에서, Z의 얼굴에서 자판 하나하나를 떼어내는 것은 그들의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아주 막막한 기분이었다고 밝혔다. 정확하게는, Z는 죽은 뒤 허리가 꺾여 타자기에 얼굴을 묻은 것이 아니라 타자기로 얼굴이 완전히 빨려들어가 죽은 사람 같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 끔찍한 사인을 안 것은 부검의들의 주저하는 인터뷰가 나오기도 한참 전이었다. 어떻게든 소문은 났다. Z의 동생이 누나의 사체를 보고 넋이 나가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어이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사거리 전체에 쭉 퍼졌다. 사람들은 주문을 읊듯 말했다. 얼굴이 타자기로 빨려들어갔대. 어린아이마저도 어른에게 그것을 물었다. 정말로요? 어른들은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계속 반복했다. 빨려들어갔어. 청소기처럼? 그래. 얼마 뒤에야 그들은 아이들에게 못 할 말을 해줬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단지 무언가 넋이 나간 모양새로 아이를 안고 어르는 것 뿐.

한 달 뒤에 이번에는 젊은 남자 하나가 죽었다. 신체 부위를 발견한 것은 그의 연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너무 긴 여백이 있었다. 그들은 두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거나 울거나 또는 서로를 어르고 달래느라 진이 빠졌다. 먼저 놓아버린 것은 상대방 쪽이었다. 이제 그만 좀 끊자는 대답이 전화선을 통해 귓가로 비수처럼 박혀오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뜨거운 화가 그의 뱃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는 전화기에 대고 악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죽어 버리라는 저주만은 입 밖으로 내뱉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귓가에서 폭탄 같이 터지는 비명에 전화기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플라스틱 이음새가 부서지며 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마치 로드킬 당한 작은 동물처럼 보이는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작게 뚫린 구멍들 안에서 피가 울컥 쏟아지며 깨진 부분에서 눈알 하나와 귀 하나, 그리고 긴 혀가 굴러떨어졌다. 그의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 빠진 신체 부위들이 아주 멀리 떨어진 아파트의 속이 빈 전화기 안에 어떻게 끼어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눈만 마주치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은 문틈이 자신을 동강낼 까 두려워했고 손잡이가 목에 박힐까 두려워했고 손톱깎이가 피부를 찢어버릴까 두려워했고 펜 다섯 개가 위장 속으로 들어갈까 두려워 모든 종이와 펜을 숨겨두었다.

린신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린신은 어느 날 새벽 들것에 실려 옮겨진 환자를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옆에서 간호사 하나가 휴지통을 낚아채며 토하고 있었다. 린신을 비롯한 의사들은 최선을 다했고 환자는 통조림들과 함께 죽었다. 린신은 집에 가서 매장소의 곁으로 파고든 다음 습관적으로 손목을 만져 보고는 역시 습관적으로 코 밑에 손을 대었다. 매장소는 곤히 잠들어 일어나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끄려던 린신은 문득 탁자 위에 필기구 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위 하나와 볼펜 세 개와 자 하나, 얇고 긴 지우개, 그리고 잉크가 말라 버린 형광펜 하나가 들어 있었다. 린신은 가위를 꺼내 서랍에 넣고 조용히 열쇠로 그것을 잠갔다가 1분 뒤에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통에 든 모든 것을 다 털어넣고 다시 잠갔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매장소가 그를 돌아보았다. 손에는 동그란 탁상시계가 들려 있었다. 린신은 그와 눈을 맞춘 채 가볍게 까슬한 볼에 키스한 후 그의 손에서 시계를 넘겨받았다. 혹은 뺏어갔다. 린신은 그가 아침식사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가려 할 때 충동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앉아. 매장소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어쨌든 그는 고분고분하게 식탁에 앉았고 린신은 접시에 식사를 담은 다음 미루고 또 마루다 마지못해 젓가락과 수저를 내밀었다. 넘겨주는 손끝에서 정전기가 일었다. 매장소가 살짝 손을 뺐다. 린신은 수저를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왜 이래, 매장소가 웃었다. 린신은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급하게,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어, 하고 물었고 매장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뉴스가 그들이 할 말을 앗아갔다. 카메라가 활짝 열리는 병원 문을 비추었다. 린신의 병원은 아니었다. 뉴스가 끝난 뒤에는 공익 광고가 나왔다. 그들은 TV를 껐다.

매장소가 무슨 짓이야, 하고 물었을 때는 이미 뭔가가 꽤 진행된 뒤였다. 사실 둘 중 누구도 이것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린신, 최소한 벽지라도 바꿔 줘. 흰색이 어때서 그래, 깔끔하고, 린신은 이 말을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매장소는 웃지 않았다. 그의 눈이 어지러이 방 안을 훑었다. 아무 것도 그를 잡아끌지 못했다. 그의 흥미를 돋굴 수가 없었다. 린신, 펜이라도 좀 줘. 종이도 같이. 그는 오늘도 이뤄지지 않는 부탁을 한다. 린신은 차분히 거절한다. 무슨 생각을 했어, 하고 묻는다, 매장소는 웃는다. 곧 죽을 거라는 생각. 린신이 약을 먹였다. 린신이 물을 먹였다. 린신이 컵을 가져갔다. 린신이 방을 나갔다. 린신이 다시 들어왔다. 린신이 약을 먹였다. 린신이 약을 가져왔다. 린신이 약을 내밀었다. 린신이 약을, 치료를 위한 치료, 해방을 위한 감금, 매장소,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마, 하고 그가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치자 스프링이 울부짖었다. 방은 아직도 새하얬고 안에는 린신과 침대와 매장소와 약과 물컵이 들어 있었다. 린신, 죽게 해 줘. 무슨 생각 해? 죽는 생각. 어떻게? 린신은 방을 나갔다. 그는 그날 밤 매장소를 껴안고 잤다. 꿈에서 침대가 그를 혼자 남겨두고 매장소를 푹 꺼진 매트리스 안으로 삼켜 버렸다. 어린아이 같은 악몽이야, 그가 생각한다. 유치하고. 그는 자신을 약간 자책하며 종이와 펜을 넘겨주었다. 매장소는 종이의 구석에서부터 작은 패턴을 세밀하게 채워넣었다. 린신은 그 종이가 빽빽히 채워지기 직전에 그것을 뺏어서 주머니에 넣어 버렸고 매장소는 쓸쓸한 표정으로, 내 취미였는데, 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린신은 문을 열고 바닥에 웅크린 채 죽어 있는 매장소를 발견했다. 그는 매장소가 평소에 했던 것처럼 방 안을 천천히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매장소에게 다가가 습관적으로 손목을 쥐고는 역시 습관적으로 코 밑에 손을 가져다댔다. 매장소는 잠들어 일어나지 않았다. 린신은 약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구두로 밟아서 잘게 부수었다. 그는 하루종일 바쁘게 일했다. 마침내 오후 늦게,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누워 있는 매장소의 주변에 온갖 물건들이 들어찼다. 카페트와 부서진 의자와 매장소가 즐겨 읽던 혹은 손대지 않던 책들과 부서진 전등과 부서진 플라스틱 컵과 펜과 종이 베개 빵칼 그 가위 안경 이어폰 양말과 그 외의 모든 것을 주었는데 그는 그중 아무 것도 맘에 들어하지 않아서 린신은 이젠 제발 그가 하나를 골라 주었으면 했는데 그는 정말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그 자신을 원했고 그 자신을 골라서 자기 자신을 죽였다. 린신은 죽은 매장소를 발견했다. 자넨 언제나 내게 발견되고는 해, 나는 알면서도 자네를 발견하고, 언젠가의 과거에서 매장소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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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tobira_moon)님과 함께 풀었던 썰 중 일부로 연성했습니다. 항상 같이 이야기해주시는 케노님 감사합니다 ><

누군가는 군왕 소경염의 혼이 아는 이 하나 없는 구천을 떠돌 것이라 말한다. 누군가는 소경염이 궁으로 소리 없이 들어와 나무에 아로새겨진 손때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흐느낀다고도 한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증거와 은밀한 이야기를 들이밀었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복화술사처럼 입 없이 말을 옮겼다. 어린 궁녀들은 이유 모르게 밤이 두려워 함께 숨죽여 울었다. 소경염은 부드러운 적색 비단처럼 모두의 눈을 덮었고 덮인 아래에는 고요한 어둠만이 남았다.

열전영이 무언가 쓰여진 종이를 발견한 것은 이틀 전 밤의 일이었다. 그는 펼쳐볼 생각도 못한 채 종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직 채 굳지 않은 물감 같은 기억이 다시금 흉하게 흘러내렸다. 군왕은 전영과 함께 절벽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칼로 멋대로 자른 듯한 절벽들이 맹수의 이처럼 서로 들러붙은 황량한 지형이었다. 그들은 매복 중이었다. 골짜기가 아래에서 위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전영은 드물게 현기증을 잠깐 느꼈으나 입을 꾹 다물고 그것을 견뎠다. 군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영. 예. 참으로 깊군. 그 말은 정말로 무거웠던가, 아니,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웠던가, 전영은 군왕이 부득불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이곳에 온 것이 과연 잘 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전영 역시 그와 함께 같은 나이를 세었고 함께 끝없어보이는 전장을 누비고 또 누볐다. 군왕의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단지 점점 깊숙한 살 어드메로 파고들 뿐이었다. 꺼지지 않는 빛. 적을 베어낼 때마다 그 눈은 두려움을 주면서도 동시에 편안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 빛은 어느 순간에 가장 위태로웠는가, 전영은 다시금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아직이다. 전영이 알겠다 대답하자 군왕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기다리는 것에는 익숙해. 다만...

그들은 해가 진 뒤 골짜기를 피로 물들였다. 군왕이 짧게 소리치자 말이 굽으로 바닥을 짓이기며 머리를 돌렸다. 전영은 그 뒤를 따랐다. 갑옷이 나를 옥죄는 것 같군, 군왕이 말했다.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전영이 말했다. 아니, 아니야. 마무리할 것이 있어. 전영은 그것이 무언지 알고 싶지 않아서, 알 수 있다 해도 거절할 것이어서,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천천히 군왕의 막사를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소경염은 그날 밤 자다가 숨을 거두었다.

전영의 손 안에서 종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매화나무에 대한 짧은 시였다. 전영은 제 몫이 아닌 다과를 훔친 아이처럼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다시금 알기를 거부했다. 그는 무언가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고 또 억누른 채 종이를 화로 속에 던진 다음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글자는 회색 연기로 화해 위로 끝없이 올라간다. 흩어지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어쩌면 흩어지기 전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 하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어 그 재 맛이 나는 글자들을 한가득 마셔버릴지도 모른다고, 열전영은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 남자는 모든 것을 알던 사람이니까. 모든 것을.

여전히 누군가는 궁의 구석진 곳에서 진주처럼 흩어진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궁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는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가장 깊은 복도에서 소곤대다가 혀를 잘렸다. 그래서, 소경염의 생을 관통하는 그리움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 산 자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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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입니다.

오후에 만난 소경환은 꽤 졸려 보였다. 따듯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품을 했다. 우리는 볕 좋은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앞에 내려놓은 요거트 망고 스무디에서 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춘곤증 같네요, 봄도 아닌데요. 나는 웃으며 내 몫을 조금 끌어당겼다. 경환은 세상에서 제일 쓴 커피만 세 잔 연속으로 들이부어도 멀쩡할 것 같은 이미지인데 실상은 망고와 요거트 둘 다 포기할 수 없어 망고요거트를 먹는 단 것 마니아였다. 경환이 조금 멍한 얼굴로 스무디를 먹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퍽 귀엽다는 생각에 웃어 버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뇨, 단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요. 내가 말했다. 혹시 초콜릿 같은 것도 좋아하세요? 그의 눈이 잠시 동그래지더니 이내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좋아합니다. 영문을 모르겠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좋아하니까, 그러자 그는 거의 나무 테이블에 이마를 박을 기세로 얼굴을 묻고는 격렬하게 스무디를 먹기 시작했다. 잠이 깨셨나 봐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고개를 언제쯤 들까,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경환의 입에 요거트 크림이 묻어 있었다.

실례고 뭐고 모두 날아가버린 채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그가 영문을 모를 차례다. 나는 미소를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휴지를 몇 장 가져왔다. 경환은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팔을 뻗어 휴지로 그의 입가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입에 크림 믇으셨어요. 그래서...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경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스무디를 들고 바깥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나는 그의 가방을 챙기고 같이 뒤따라나갔다. 경환은 카페 문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다가 스무디를 목구멍에 붓다가 울다가 웃다가 다시 머리를 뜯다가 아주 난리를 치고 있었다. 경환 씨.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져 있어서 또 웃어버릴 뻔 했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괜찮으세요? 그럴 수도 있지요, 저도 크림 얹어진 것 마실 때면 매번 입가가 엉망이예요. 그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네, 그래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마저 들어가서 침착하게 다 마시고 일어납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가 이끄는 대로 다시 카페 안으로 끌려들어왔다. 그는 정말 춘곤증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부드러운 꿈 속에 빠진 듯 보이는 남자, 무언가 행복한 상상 중인 멍한 남자, 소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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