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님께 드립니다 ><




어젯밤 당신과 함께 걸었지…엄마. 마모루다. 마모루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미소지으면서,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 닫혀 있었던 입이 썼다. 꿈에 네 아버지가 나왔다. 마모루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막 잠이 든 사람처럼 고요히 숨을 쉬었다. 마모루? 내 목소리가 아이에게 닿았다. 담요가 참 따듯하더라. 마모루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나는 에리입니다, 지금은 겨울이고, 12월이며, 또한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며, 눈이 쌓이다가 돌연 잘못된 발걸음처럼 멈추어버린 새벽 한 시의 서재다. 아저씨, 선물이예요. 내가 박스를 내밀었고 그는 뜯는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를 선물을 줌으로써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특별함을 자연스레 받아들었다. 이틀 뒤 서재에서 담요를 몸에 덮고 대충 자고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눈을 떴는데, 꿈 속에서 에리랑 어딜 걸었어, 어디를요, 그러게 말야.



눈이 엷게 깔린 아름다운 오솔길, 우리는 잠시 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함께 오솔길을 걸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로비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당신의 어깨에 눈송이가 녹지 않고 있었다. 아저씨, 눈이 붙었잖아요, 아…눈.



자주 앉던 의자에 올려뒀었어. 알아요. 찾을 책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참 넓더구나. 넓죠. 넓고…집어드니까 말이야, 누가 금방이라도 무릎에 올려뒀던 것처럼 따스해서, 그리고요, 어젯밤 당신과 함께 걸었지…같이 어딘가를 산책했었던 것 같은데…간신히 일정을 맞췄던 기적적인 그 여행이요? 아니, 음, 아니, 글쎄, 그 여행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우리가 몇 번이고 눈이 오는 날 손을 잡았는지, 아, 마모루가 담요를 집었다. 마모루가 한 부분을 가까이 보여주었다. 작은 눈송이가 삭 녹았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저기로 들어왔나 보네요, 마모루가 말한다. 우리는 함께 그 쪽을 얼핏 보았다. 전나무에 흰 눈이 매달려 있었다. 아…. 말은 형체를 잃고 사라진다. 그리운 사람은 입 안의 눈송이처럼 애틋하다.



추워요, 감기 걸리면 큰일나잖아. 마모루가 담요를 단정히 펴서 어깨에 둘러주었다. 기침이 나올 것 같아 잠시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네, 이런. 마모루, 손이 온통 눈 범벅이야, 마모루가,



눈송이…



하고 말했다. 마모루와 내 손이 온통 눈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 조심해요, 손이 녹아내릴지도 몰라. 녹아내리면 뭐 어때, 하고 내가 다시금 웃는다. 아버지가 잡아주는 거야, 녹아내린다면 그것 또한 아름답다. 카페트가 축축해질 거예요…눈 녹은 물로. 지금은 봄이 아니야. 한겨울에는 누구나 조금씩 슬프고 조금씩 추위를 끼고 살며 누구나 무언가를 붙잡으려 안달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억들, 그리고 또 기억,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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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큰(@tekniwa)님께 드립니다 >~<)/


로봇 하나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잘라내고 다른 손으로는 들고 있던 커피 머그를 곧장 단면에 들이부어 폐기 처분이 되었다. B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주 복도에서 마주쳤다. Q는 매번 뜨거운 김이 나는 머그를 들고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B도 덩달아 고개를 까딱했다. 둘은 서로의 목적지를 몰랐다. 아무 명패도 없는 흰 문을 열 때면 B는 언젠가, 그들이 같은 흰 문을 열게 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Q는 폐기되었다. B는 지나가는 연구원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Q 말입니다. 연구원이 대답했다. 그래, 그 친구. 갑자기 그걸 마셔버리더라고. 마셨다고요? Q는 자기 목을 뜯었어요. 네가 어떻게 알아. 눈 앞에서 봤으니까. 정 헷갈리면 CCTV 확인해. 15-7번. 연구원은 다시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갔다. B는 홀로 남았다. 그에게는 무언가 격렬한 색이 필요했다. 흰색이 아니라. 


몇 시간 후 그가 앞으로 수백 개는 깨트릴 흰 머그의 첫 시작점이 될 그것이 도착했다. 그것은 작은 갈색 상자에 담겨 그가 쓰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B는 상자를 열고 머그를 꺼낸 다음 텅 빈 벽에 내던졌다. 째지는 소리와 함께 도자기가 박살이 났다. 문 옆에 달린 붉은 비상등이 시끄럽게 울리며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들어왔다. 연구원이 말 없이 날카로운 조각들을 가리키자 문가에 대기하던 로봇이 천천히 들어와 남은 조각들을 모두 완전히 으깨고는 주둥이로 빨아들였다. B는 그 후로 자주 멍하니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그 때마다 주로 날카로운 단면을 가진 사금파리를 생각하고는 했다. 그 사금파리는 B의 손목을 베기도 했고 Q의 목을 잘라내기도 했다. Q의 몸 속에 얽혀 있는 전선이 뜨거운 커피를 만나 새까맣게 탔다. 그러나 겉은 멀쩡했다. B는 로봇 두 명이 죽은 Q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목이 덜렁거리는 Q의 눈과 B의 눈이 마주쳤다. Q는 닥터 ------의 사무실로 옮겨졌다. 곧장 폐기되지 않은 것이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B가 Q가 들어간 사무실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Q는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B는 이상 행동으로 인해 검사를 받고 목 위의 대부분을 교체했다. B는 교체 내내 뼈저리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연구원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해. B는 뭘 말입니까, 하고 물었고 연구원은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B는 이제 무기력한데다가 우울하기까지 하다. B는 카운터에 찾아가 정신과 C병동에 가도 되냐고 요청했고 7분 뒤 기각당했다. 혼자 해결해보라는 답변을 얻었다. B는 지독하게 우울했다. B는 잠시 고민하고는 옥상에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Q가 왜 이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널브러진 B의 잔해를 사람들이 수거했다. B는 또다시 조립되었다.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던 연구원에게 다시 물었다. 뭘 말입니까. 연구원은 뜻밖에도 미소지었다. 그래, 더 해봐.


B는 자신이 이상 행동이 모두 기록되고 분석되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들이 그 데이터들로 인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B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연구원들은 일주일 내내 주문 제작된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머그컵 박스를 가지런히 쌓아둔 채 머그 10개를 동시에 짓밟고 있던 B를 발견했다. 연구원들은 또한 옥상 난간에 서 있다가 한참 뒤에 자신의 머리를 떼어내어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닥터 ------의 페라리에 내던진 B(의 몸체)를 발견했다. B는 복도에 서서 지나가는 연구원들마다 붙잡고 Q가 어디 있는지, CCTV 15-7번을 확인하러 갔는데 왜 담당자는 그런 번호의 카메라는 없다고만 대답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연구원들은 그럴수록 더욱 크게 미소짓고는 가 버렸다. B는 Q가 그리웠다. 미치도록 그리웠다. 미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느 날 상자를 열자 Q라고 쓰여진 머그가 나왔다. 그는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그것을 벽에 던질 뻔 했다. 그 특별한 머그는 B의 찬장으로 들어갔다. B는 자주 찬장을 열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스피커에서 연구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B. B. 왜 그걸 부수지 않지? 이번에는 뭐가 다르지? B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물결 위의 파문이죠. 그게 가라앉으면 어떻게 되지? 무슨 일이 새로 생기나? B가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요. 더 이상은 말이죠. B는 그 날 해가 진 뒤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지켜보던 연구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커피를 끓인 뒤 향을 음미하듯 머그를 들어 코에 가져다댔다. 연구원들이 잡고 있던 펜이 부들부들 떨렸다. B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B는 밝은 방에서 깨어났다. 연구원이 그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차트를 톡 두들겼다. B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B는 차트에 뚜렷하게 적힌 실패라는 단어를 곰씹기 시작했다. 


Q가 왜 뜨거운 커피를 목구멍에 들이부었을까? 연구원이 말했다. 자넬 사랑했기 때문이야. 무슨 말씀이시죠? 닥터 ------가 얼마나 웃었는지. B를 사랑해요. 고장난 Q가 말한다. 죽고 싶을 만큼. 연구원이 다시 말했다. 너흰 너무 극단적이야. 왜 그런 지 모르겠다니까. 왜 머그를 벽에 던졌지? Q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B가 대답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실패야. 너흰 비인간적인 그걸 좀 벗어 버려야 해. 좀 멀쩡해지라고.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해. 전 마지막에 커피를 마시지 않았죠. 그걸로는 부족하지. B는 그 말을 듣고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연구원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렇게 웃었고 웃음이 멈추자 B는 폐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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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닝(@bining33)님께 드립니다 >_</


*본문에 언급된 책은 테하누입니다 ㅇ0ㅇ 재밌어요


당신은 밤에 일하고 새벽에 잠든다. 당신은 잠을 잘 자지 못한다. 당신에게 습관이 하나 생겼다. 잠이 오지 않는, 동 트기 직전의 내 서재에서 책을 한 권 빼어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잠들었다. 희여멀건한 아침에 서재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복잡한 추리소설을 읽고 있었다. 주인공이 범인을 밝혀내기 직전(당신이 범인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나는 출근했다.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와서 곧장 서재로 갔다. 안락의자에 당신이 읽다가 내려놓은 책이 보였다. 당신이 책갈피를 해 두어서 어느 부분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살인자야, 하고 주인공이 절규했다. 살인자의 이름을 입 속에서 두어 번 굴렸다. 당신의 나직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신이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인데도 당신이 이미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는 듯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에 당신은 이미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서재로 가서 당신에게 어제 그 책의 클라이막스를 잠깐 읽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당신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러마고 대답했다.


당신의 목소리가 꿈에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꼭 현실 같은 꿈을 꾸었다. 당신과 마주앉아 당신이 책을 읽는 것을 구경하는 꿈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목소리가 예뻐, 그랬던가. 그랬었나. 그렇게 말했었나. 당신은 무어라고 대답했지,


우리는 독서 취향이 꽤 잘 맞는 모양이다, 당신이 딱히 새로 책을 사지 않는 것을 보면.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 앞이 새빨갰다. 눈을 만져 보니 핏물 같은 게 묻어나왔다. V 교수, 눈이 왜 그래? 울었습니다. 충혈된 모양이네. (아뇨, 그냥 울었는데요.) 그날 하루 종일 새벽의 꿈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의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신이 오늘은 책을 읽지 않은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당신의 습관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날 밤을 새고 새벽 다섯시에 당신이 퇴근하길 기다렸다. 당신은 문을 열고 무감정한 얼굴로 한 손에 들린 힐을 내던졌다. 입술이 조금 번져 있었다. 당신은 당신을 기다리는 나를 보고도 딱히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옷을 갈아입고 서재로 들어갈 때까지 당신을 주욱 지켜보았다. 당신이 의자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왜 책을 읽지 않았냐고 물었다. 당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읽었다고 했다. 꿈을 안 꿨어. 네가 깬 후에 잊어버렸던 걸지도 모르지. 무슨 책을 읽었는데, 당신은 대답하지 않고 책 한 권을 빼냈다. 그러고는 다리를 꼰 채 읽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어떤 그릇으로 만든 거예요. 난 그 모양을 알아요. 하지만 그 진흙은 모르겠어요. 삶이 나를 흔들어 춤추게 해요. 난 그 춤을 알죠. 하지만 무용수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게드가 한참의 침묵 끝에 말했다. "그렇게 그 춤을, 영원히 추어야만 한다면..."


당신은 읽기를 멈추었다. 눈에서 피가 조금 흘렀다. 당신이 웃기 시작했다. V, 당신 지금 되게 바보 같아. 당신은 책을 내려놓고 다가와서 내 눈가를 엄지로 천천히 닦아냈다. 당신에게서 향수 냄새가 났다. 나는 당신의 품에 안겨 다시 한 번 당신을 위해 조금 울었다. 당신은 계속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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