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퇴고따윈 안 한다네



린신은 그 때 이어폰을 낀 채 문자 메세지를 읽고 있었다. 그 옥으로 장식된 벽시계를 살 수 있을까요? 붉은 숫자를 흘깃 올려다보며 자판도 보지 않은 채 답장을 입력했다.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후렴구의 기타 리프가 정신없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이 아니라 큰 종이 박스의 산이 보였다. 린신은 왼쪽으로 몸을 피해 인부가 종이 박스를 무사히 끌고 나갈 때까지 버튼을 누른 채 기다렸다.

박스와 남자가 멀어지자 엘리베이터에 홀로 올라탄 린신은 15층을 누르고 옆에 있던 거울을 무심히 보았다. 피곤에 절은 눈이 이쪽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어폰 잭을 잡아뺀 뒤 메세지를 하나 더 보냈다. 

[그걸 고치는 데에 10년이 걸렸습니다.]

기술적으로 어려웠다기보다는, 급할 게 없으니 느긋하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의뢰인은 시계를 맡기고 한 달 뒤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로 죽었다. 린신의 집 안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렇듯 나무로 만들어진 벽시계는 모서리에 좀 하나 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하게 무언가가 어긋나 있을 뿐이었다. 린신은 그 정지된 평온함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돌연 마음을 고쳐먹고 먼지를 턴 뒤 작업에 들어간 것이 한 달 전이다. 

'하지만 내가 10년이라면 10년인 거다.'

사실 십 년이나 일주일이나 그에게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시계는 어제 죽었고 오늘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골동품점 입구께에 그것을 걸어 두었다. 그는 그 배치에 만족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 때 까지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차가운 저녁 바람과 함께 자동차 경적 소리가 메아리져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오전에 집을 나설 때 창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신발을 대충 던지듯 벗고 길게 하품을 하며 거실로 갔다. 어둑한 와중에 형체 하나가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는 턱을 긁으며 스위치를 올렸다. 자고 있는 매장소였다. 

스위치를 내리자 거실은 다시 어두워졌다. 린신은 대충 벗어 품에 껴안고 있던 외투를 다시 걸치고 아무렇게나 내던진 구두 대신 슬리퍼 두 쪽에 발을 밀어넣었다. 문이 등 뒤에서 세게 닫혔다. 복도를 가로질러 아직도 15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에 탄 린신은 1층을 누르고 아무 생각 없이 다시 거울을 흘끗 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크서클이 짙게 깔린 눈과 마주친 그는 거의 튕겨나듯이 밖으로 나갔고, 외투를 여미고는 아무도 없는 밤 거리를 광인처럼 발 닫는 대로 걷다가 문득 우뚝 멈춰섰다. 

가로등에 나방이 자꾸 몸을 박고 있었다. 

그는 나방을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몸을 돌렸고 한 시간 동안 걸었던 거리를 30분 동안 정확하게 되짚으며 달려나갔다.

"장소!"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고 비밀번호를 틀리고 나서야 겨우 들어간 집 안에서 린신은 소리를 질렀고 거실 쪽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왜, 하는 대답이 들렸다. 

린신의 시야에 졸린 기색이 역력한 매장소가 들어왔다. 그는 린신을 보더니 길게 하품을 했다. 

"신."
"너..."
"응."
"잘 자."
"알았어."

린신은 더 말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기절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매장소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린신의 침실 문을 열었다. 구겨진 외투를 몸 밑에 깔고 괴상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린신이 보였다. 매장소는 다시 하품을 하고는 외투자락을 당겨 빼낸 뒤 린신의 몸 위에 대충 덮었다.

"늦었잖아."

-

가늘게 눈을 뜬 매장소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린신이 제 몸을 덮고 있던 두꺼운 이불에 막 손을 대던 참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매장소가 물었다.

"아침은 보통 언제 먹어?"
"장소."
"응."
"말할 게 있어."
"해봐."
"사랑해."
"응."

매장소는 다 안다는 듯, 혹은 아무 말 말라는 듯 팔을 벌려 친우를 안았다. 린신은 30분 정도 그 품 안에서 흐느낀 뒤 벌게진 눈을 하고 후라이팬 위에서 계란을 세 알 깼다. 투명한 흰자가 점점 희게 굳으며 퍽퍽 터졌다. 뒤를 돌아보자 마호가니 식탁에 걸터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매장소가 보였다. 린신은 꼴사납게 코를 훌쩍인 다음 "정말 꼴 사납네..."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네가 언제 내 앞에서 멀쩡했던 적이 있었나? 린신은 결국 계란 프라이의 밑바닥을 태워 버렸다. 매장소는 큰 유리컵에 우유를 가득 따랐다. 린신이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50초 데웠다.

"고소한 냄새가 나."
"그러네."
"따스하고," 

린신은 차가운 우유를 마시고 덜 익은 노른자를 수저로 조심스레 떠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린신은 접시를 정리한 뒤 매장소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린신의 손길을 받으며 매장소가 고르게 숨을 쉬었다. 문득 린신의 손이 머리카락에서 매장소의 가슴께로 향했다. 매장소는 잠시 린신을 바라보다가 이내 숨을 크게 서너 번 쉬었다. 린신은 천천히 손을 다시 매장소의 귓가로 가져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었다.

"어때?"
"아주 좋아."
"이제 일주일 동안 뭐 하고 싶어," 하고 매장소가 말했다. 린신은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발끝에서부터 저릿하게 올라왔다. 변하지 않는 골동품들의 녹과 먼지와 가루는 모두 그의 심장에 날아와 달라붙어 있었다. 

"장소."
"응."
"한번만 더 안아줘."

그들은 토요일 자정이 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

(린신의 인생에 있었던 수많은 A씨들 중 하나인)A씨는 고대사에 대한 책을 한 권 찾으러 왔다가 카운터에 앉아 커피를 후후 불고 있는 키 큰 남자와 마주쳤다. 누구세죠, 하고 묻기도 전에 카운터 오른쪽의 책 더미 사이에서 예의 가게 주인이 연하늘색 앞치마를 두르고 나타났다. 아,

"친구입니다."
"예에..."

A씨가 내민 종이 쪽지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들여다보던 린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A씨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지독한 악필이시네요."
"됐고 책은요?"
"저기요." 린신의 긴 검지가 정확히 한 지점을 가리켰다. 회색 종이 달린 입구의 바로 옆 더미였다. 책 더미 위에는 벽시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주인장과 미지의 카운터 친구를 뒤로하고 먼지가 날리지 않게 조심하며 가게를 가로지르던 A씨가 문득 린신에게 물었다. 이 주 전의 대화가 기억난 탓이었다. 

"B가 연락했나요?"
"며칠 전에 했죠." 
"실망했겠네요."
"그러시던가요. 백 배를 줘도 안 내줍니다."
"뭐 말이야?" 남자가 말했다. 
"저거."
"흠." 남자는 딱 두 번 입을 열었고 그 뒤로는 어떤 장르에 흥미를 빼앗겼는지 카운터에서 일어나 가장 높고 깊은 책 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A씨가 먼지투성이 책을 들고 린신의 눈 앞에 흔들 때까지 린신은 그 뒷모습을 홀린 듯 쫓고 있었다.

"아, 맞다."

린신은 대충 돈을 받고 대충 책을 다시 넘겨준 다음 대충 A씨의 등을 두 팔로 밀며 콧노래를 불렀다. 사실 팻말 뒤집는 걸 잊었지 뭡니까, 예? 다음 주까지 안 열어요, 예? 안녕! 문이 닫히고 의외로 얌전히 '끌려나온' A씨는 한숨을 쉬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린신은 문을 걸어잠그고 벽시계를 흘긋 본 다음 조심스럽게 떼어내 옆구리에 꼈다. 

"주인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책을 읽던 매장소가 고개를 들어 린신을 올려다보았다. 
"죽었어."
"언제?"
"몰라."
"좋은 사람이었나?"
"기억 안 나."
"아름답네."
"아름답지."

두 사람은 개구리를 잡은 어린 소년들처럼 엎드려 턱을 괴고 바닥에 눕혀 놓은 벽시계를 이리저리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별안간 시계의 작은 나무 문이 양쪽으로 젖혀지며 붉게 칠해진 톱니를 내장처럼 내보였다. 딸꾹질 같은 소리가 열네 번 울렸다. 흰 옥 날개를 가진 옥 나비들이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왜 안 판 거야?"
"모르겠어."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상관없어. 자네가 원하면 팔게." 
"그럼 내가 사지."
"좋아, 좋아, 마음대로 해."

언제든 저걸 가져가도 좋아, 언제든지, 그러면서 린신은 시계를 저만치 쓱 밀어 버리고는 매장소에게 다급하게 입을 맞췄지만 자꾸 웃음이 나와서 결국엔 얼마 못 가고 멈추고 말았다.

-

린신은 참 많은 곳을 매장소를 데리고 돌아다녔는데, 곁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돌아볼 때마다 조용한 기쁨에 온통 사로잡혀 그대로 길 한가운데에서 멈춰 버리고는 했다. 그들은 연극을 두 편 봤고 영화를 한 번 봤고 공원을 아침저녁으로 산책했으며 집에서 라자냐를 구웠다. '휴가' 라고 쓰여진 종이를 문 밖에 붙인 채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소우주의 골목을 몇 번이고 돌며 매번 새로운 오래된 책을 찾아내 토론했다. 

-

솔직히 일주일은 1초와 똑같았다. 린신은 나흘 째 되던 날 자신의 선택을 내심 후회했다.

-

믿기지가 않아,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이 탄식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자네 곁에 있을 건데 뭘 그러나, 매장소가 라자냐를 길게 늘이며 말하자 린신은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이라도 고맙네, 라고 말했고 그날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

-

결국 계약은 어떻게든 깨진다. 사실은 계약서에 나온 대로 문제 없이 만료되었지만, 린신에게는 어떤 방법이든 고통스러웠다. 

-

매장소는 신발을 신었다. 찬 기운이 감도는 신발장의 센서가 돌연히 켜졌다. 린신은 동상처럼 그를 배웅하려 서 있었다.

"안녕." 매장소가 말했다.

"괜찮겠어?" 매장소가 말했다. 

"정말로?" 매장소가 말했다.

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매장소가 무거운 금속 문을 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후회하나?" 문이 닫히기 직전 매장소가 웃으며 물었다.
"아니."

-

린신이 문을 열었다.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박스가 가득 담긴 끌차를 붙잡은 채 린신에게 말했다.

"어디 있죠?"
"안방에요. 잠시만요..."

안쪽으로 들어간 린신은 곧 키 크고 가벼운 남자를 품에 안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기다리던 배달원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스티커를 꺼내 박스들 중 하나에 붙였다. 그리고는 남자를 받아들어 박스 안에 조심히 넣고 린신이 보는 앞에서 포장했다. 도와드릴까요, 린신이 물었다. 테이프를 떼는 소리가 요란했다. 

안녕히 계세요,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타자 문이 닫혔다. 

"좋아...안녕."

린신이 속삭였다. 바보 같을 정도로 덧없는 휴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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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꽃꽂이' 로 연성했습니다! 단츄님께 드립니다><)



투명한 막이 부서지듯 매장소가 눈을 떴다. 창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닫으려 팔을 뻗자 길고 흰 소맷자락에서 무언가 천천히 떨어졌다. 꽃잎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응시하다가 손가락을 안 쪽으로 접었다. 좀 더 큰 손이 나타나 형체를 완전히 잃을 뻔한 그것을 빼앗아 갔다. 위를 보자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린신이 있었다. 일어났어, 응, 린신은 얼굴을 찡그렸다. 해가 중천이야.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추듯 창문께에서 빛이 다급히 들어왔다, 그는 거대하고 묵직한 푸른 빛을 잠시 상상했다가 그 위압감에 생각을 멈춘다. 자라고 한 건 자넬세. 린신은 길 잃은 장난감 나무배처럼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탄식 비슷한 소리를 내며 등을 돌려 버렸다. 문을 여는 그의 머리통에 대고 매장소가 무심히 물었다. 그건 자네 건가, 그래, 깨우지 마. 린신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가 가고 난 후 매장소는 창문을 닫고 다시금 잠들었다. 이번에는 며칠 동안 깨지 않았다.

린신이 무심한 손놀림으로 옥으로 만들어진 화병을 매만졌다. 보지 않아도 조각된 문양들을 느낄 수 있었다. 비류가 밝은 창문에서부터 머리를 내밀었다. 아이는 린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직 아무것도 담지 않은 화병을 바라보았다. 비류. 린신이 말했다. 화병 바닥에 뭐가 있는지 알려줄까? 아이는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연 사라져 버렸다. 린신은 낄낄 웃다가 뚝 그쳤다. 손이 점점 차가워졌다. 나쁜 예감이 등뼈에서부터 스물스물 올라와 그의 뒷목에 도사렸다. 열 개? 그가 문득 생각한다. 빈 화병은 계속 비어 있을 것이다.

찻잔이 굴러떨어졌다. 린신이 기침을 했다. 린신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또는 매우 하기 싫은 표정으로 흉한 그것들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나도 알아. 매장소가 대답했다. 더 할 말 없지? 린신이 나직하게 물었다. 없네. 이젠 꽃잎으로만은 안 끝날 걸. 자네는 정말, 정말, 정말 악취미를 가지고 있어. 나도 알아, 나도 안다니까...매장소가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나. 그리고 이번 한 번 만이야.

린신이 또 무언가를 숨겼다. 물론 본인 역시 알고도 남았겠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린신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린신의 목에 손을 대자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턱과 윗입술을 양쪽으로 잡고 벌렸다. 린신, 숨겨도 소용없어, 매장소는 바닥을 나뒹구는 화병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 화병의 주둥이에서 토악질하듯 볼품없이 빠져나온 그것을 하나씩 집어 린신의 목구멍에 넣었다. 린신이 작게 신음했다. 린신, 그가 말한다. 가만 있어. 나는 몸에 힘을 풀었다. 목구멍에서부터 흙이 차올랐다. 놀랍게도 말할 수 있었다. 잘려나간 줄기 밑둥을 삼킨 흙이 서서히 요동친다. 나의 말은 줄기를 거쳐 결국 꽃으로 나왔다. 장소. 내가 다시 틔워낸 꽃. 나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말하고 또 말하고, 속삭이고, 삼키고, 전날 밤엔 다섯 송이를 삼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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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 님께 드립니다.



보인다, 보이지 않아,
어느 쪽이 옳은가? 어떤 이는 보이는 쪽이 옳다 하였다.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쪽이 옳다 하였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소경염은 잠시 고민한 뒤 답을 말하고는 모든 이의 얼굴을 쓱 바라보았다. 모두 빠짐없이 만족한 듯 웃고 있었다. 소경염은 그들의 입이 괴이할 정도로 벌어지는 것을 보고 몰려오는 한기에 몸을 떨다가 잠들었다.

​그곳은 거울 속이야, 황제가 말을 걸었다. 이제 그만 나오려무나.

​끝나는 게 싫다면 살지 않으면 돼, 스물 한 살이 된 7황자 정왕 소경염은 비둘기와 쥐가 소곤대는 소리로 그의 친우가 매령이 아닌 다른 곳으로 기어가 거둬졌으나 곧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알 수 없을 때 죽었다. 그 후 경염은 어떻게든 살았다. 그 무거운 현실을 등에 지고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조금씩 떼어내어 씹어 삼켰다. 서른 살이 넘어가자 밤마다 황제의 검은 옷을 입은 또다른 소경염이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너 또한 외로움에 잠기는구나, 그 편지를 보낸 것은 나다. 임수의 죽음을 목격하셨는지요, 목격했고말고, 아이야, 독은 어쩔 수 없는 독이란다. 아아, 이제는 그만두자. 사는 것이 끝없는 지옥이로구나. 절대로 오지 않을 매장소의 끝을 위해 잔을 들자. 그들은 마주보고 술잔을 바닥으로 기울여 버렸다. 황제 소경염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 꺾이더라도, 그 때란 언제입니까, 황제 폐하, 과거입니까, 혹은 미래, 그 때 꺾이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혹은 그 때 꺾이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혹은, 폐하, 이제 주무셔야지요, 밤은 차고 길어요, 가지 말아라, 불면의 밤이 나를 괴롭히는구나, 햇수를 아느냐, 모릅니다, 몰라야 한다, 모두가 알아도 너는 몰라야 한다, 폐하, 폐하는 평생 꺾이실 운명입니다, 폐하는 점점 꺾여나가 결국 바닥에 들러붙으실 겁니다, 그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시겠고, 아아,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나는 네게 미래를 주려고 했었어, 그거 아니, 여러 가지의 미래를 생각해 봐, 나는 네게 그걸 주려고 했었는데, 기억하니, 폐하, 밤은 차고 길어요, 이제 주무세요

​혹시 거울을 좋아하시는지? 이건 아주 대단한 거울입니다, 이국의 가면을 쓴 자가 말하고는 비단 장막을 끌어내렸다. 소경염은 거기서 한번에 세 명 그리고 다섯 명의 자신을 볼 수 있었고 구부러지고 늘어지고 뒤틀린 자신 역시 볼 수 있었다. 소경염은 길게 웃고는 큰 장막을 품에 끌어안은 사내에게 큰 보화를 내렸다.

소경염은 적막한 봄의 소택을 즐겁게 거닐었다. 소택의 매화 향은 맡아도 맡아도 끝이 없었다. 그의 어린 호위는 매화를 좋아한다. 매화 향의 남자, 매화줄기 같은 남자. 소경염은 손에 상처가 나는 것도 잊은 채 꽃이 가득 들러붙은 나뭇가지를 마구 꺾고는 아직도 물이 차 있는 연못으로 발을 옮겼다. 선생, 매화가 참으로 아름답구료, 매화 철이로군요, 아, 선생 나는 그대는 나는 나는 이건 당신을 위한 매화 가지요 ​이제 가라앉아 주지 이제 안녕히, 물 속을 헤치다 보면 그대를 다시 만날까.

​녹아 내리는 손 끝을 물에 담그자 붉은 액체가 돌연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상처가 꾸덕하게 굳기까지는 작은 연고 통과 며칠이 더 필요했다. 경염에게는 아직 둘 다 없었다. 어쩌면 이 손을 잘라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갑자기 시작된 그의 천한 번째 속죄가 절정으로 치달을 것이다. 경염. 상처입은 물소가 늪에 빠져 죽은 것을 보았어. 임수가 소리친다. 꿈에서 말이야. 나흘 뒤가 길일이라는구나. 경염, 상처를 늪에 담그면 어떡해. 늪에 빠져 죽을 셈이냐! 경염은 그 말을 들은 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빼낸다. 잘 했어. 임수가 멀어져가며 또 외쳤다. 난 간다. 피가 퍼진다. 자세히 보니 흙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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